183화
KA―98746.
그는 수십 년 전에 세계정부를 전복시킬 뻔한 능력자의 이름으로 그에 관한 정보는 극비리에 취급된다.
그가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기밀 사항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KA―98746은 세계정부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따르는 초능력자들을 데리고 쿠데타를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어서 세계정부는 토벌 부대를 파견했고 그 결과 KA―98746과 그를 따르는 쿠데타 세력은 붕괴되었다고 한다.
세계정부는 그 존재를 밝히면서 다시는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런 어리석은 위험인물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발표는 세계정부에 저항하던 레지스탕스 세력에게는 기폭제가 되었다.
세계정부의 내부에서 암약하며 세계정부를 무너트리려고 했던 존재는 레지스탕스들에게 있어서 무척 희망적인 존재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봐라. 세계정부의 군림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우리가 이길 것이다.
이런 희망을 심어주기에 딱인 존재였다.
세계정부에 대항하는 수많은 레지스탕스들은 KA―98746의 뜻을 기리고 존중한다고 밝히고 심지어 몇몇은 자신들의 조직이 KA―98746과 연계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세계정부의 의도와 달리 KA―98746은 세계의 불안 요소가 아닌 반 세계정부 세력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수많은 레지스탕스들이 세계정부의 시설을 테러하면서…….
“이건 위대한 혁명가 KA―98746의 뜻이다.”
라는 말을 외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KA―98746의 존재는 세계정부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일방적인 도구로 이용당하는 무수한 능력자들에게 있어서 희망과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금 카일의 눈앞에 있는 AP―55248 역시 그랬다.
“정말… 정말 당신이 그 위대하신 혁명가입니까? 우리들에게 자유를 심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저항하셨다는 그분이 맞으십니까?”
“…….”
카일은 침묵했다.
물론 답을 몰라서 안 말하는 게 아니다. 답은 당연하게도 ‘NO’이기 때문이다.
카일은 단 한 번도 능력자들의 인권이라던가 세계의 평화, 차별 없는 세상, 세계정부의 전복 같은 것을 꿈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능력자보다 세계정부에 협조하며 그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조직 생활에 최대한 협조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고 하는 인물.
그게 카일의 전생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죽고 나서는 갑자기 위대한 혁명가이자 반 세계정부 세력의 상징처럼 되었다고?
‘어이가 없군. 이래서 시체만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쉬운 것도 없다고 하는 건가?’
세계정부는 카일의 죽음을 저항 세력과 능력자들에 대한 경고로 이용하기 위해서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저항 세력은 오히려 그런 카일의 죽음을 자신들의 희망과 선전을 위해서 이용했다.
그 양쪽의 입맛대로 죽음의 과정이 이용되고 미화된 결과, KA―98746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능력자들의 희망이 된 것이다.
카일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죽음이… 만약 헛된 일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긴 하군.”
“오오오오.”
카일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 이건 전쟁이다. 그것도 굉장한 강적을 상대로 하는 전쟁.
그러니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다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세계정부나 레지스탕스들도 아니고 나 자신의 죽음을 내가 이용하겠다는데 뭐 어때?’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양심에 찔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직빵이었다.
AP―55248의 눈에서 적의와 경계심이 싹 사라지고 오직 카일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만이 무럭무럭 샘솟은 것이다.
‘이만하면 애들 물리라고 해도 되겠는데?’
지금 이 방에는 카일과 AP―55248 단둘만 있는 게 아니다. 레이븐의 능력을 이용해서 아리시아, 검은 바람, 세피로스, 노 페이스 등등의 정예 전력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AP―55248이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 순간 바로 목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카일은 은근슬쩍 수신호를 보내서 부하들에게 내려놓은 척살 명령을 취소했다.
그런 카일에게 AP―55248이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위대한 혁명가시여.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부끄럽군. 난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이건 진심이다.
“아닙니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위대하단 말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당신은 존재 그 자체가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론 상대가 믿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카일은 그런 AP―55248에게 말했다.
“나는 한 번 죽었지만 다시 한번 세계정부와 맞서서 능력자들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생각이다. 나와 함께 해 주겠나?”
“물론…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AP―55248은 크게 망설였다.
“왜 그러지?”
“그게, KA―…….”
“카일이다. 지금 이 이름으로 부르도록.”
“예. 카일 님이 계시던 시절과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세계정부는 이제 머릿속에 박아 놓은 인식 칩을 이용해서 능력자들을 관리합니다.”
“그건 나 때도 그랬다.”
“그때보다 훨씬 심합니다. 우선 B급 이하의 능력자들은 감정 그 자체를 당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B급 이하의 능력자들은 뇌에서 감정을 느끼는 시냅스 자체를 철저하게 봉인당하고 있어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세계정부의 명령이라면 죽으라는 명령도 태연하게 수행하는 진짜 도구가 된 거죠.”
“그 정도라니…….”
카일이 있을 때 인식 칩으로 제재할 수 있는 건 대화와 행동의 감시. 그리고 전류를 흘려서 격렬한 두통으로 페널티를 가하는 정도였다.
거기다 A급 이상까지 올라간 능력자들에게는 전류를 흘리는 기능은 제거해 주기도 했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그동안 세계정부에 협조해서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A급 이상의 능력자들의 경우 그 뇌의 구조가 훨씬 섬세하고 예민했기에 함부로 전류를 흘리다간 능력이 폭주하는 사례가 번번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인식 칩의 성능과 능력이 지금은 훨씬 더 올라간 모양이다.
‘하긴 시간이 흘렀으니까…….’
“자세하게 설명해 다오. 인식 칩의 성능과 기능은 어떻게 되어 있지?”
“예. 우선 기본적인 위치 추적과 도청이 있습니다만 그 부분은 안심해 주십시오. 지금 이 세계에 파견된 우리에게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감청을 해 봤자 데이터가 메인 센터로 전송되지 않을 테고, 위치 추적을 위한 위성도 없으니 말이지.”
“예, 맞습니다.”
카일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 AP―55248과 하는 대화가 세계정부에 감청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감정의 절제 기능이라든가 고압 전류로 강제 뇌사로 만들어 버린다는 기능 같은 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예전보다 훨씬 엄중해졌어.’
카일은 신중한 표정으로 AP―55248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세계정부의 저항 세력은 어때?”
“꾸준하게 활동은 지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가 이렇다 할 구심점이 없는 점조직이라서 그 활동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국지성 테러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카일은 그 외에도 현재 세계정부의 지배 구조와 초능력자들의 관리 시스템 등등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렇게 수 시간에 걸친 조사가 끝난 후 카일은 AP―55248에게 말했다.
“일단 오늘은 편히 쉬어라.”
“예?”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는 나도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오늘은 편히 쉬고 있도록. 세피로스.”
“예. 주인님.”
카일의 명령을 받고 세피로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카일은 세피로스에게 명령했다.
“이 친구, 푹 쉬게 해 줘. 네가 직접 챙겨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세피로스는 카일의 지시를 받더니 AP―55248에게 가서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구면이죠?”
“아, 아. 예.”
“후후후.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고 세피로스는 AP―55248를 데리고 화이트 공국의 귀빈을 모시는 별궁으로 안내했다.
뒤에 남은 카일은 에이라를 불러서 지금 상황에 관해서 의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만 하면… 되겠어.’
카일은 이 전쟁의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AP―55248은 자신이 생전에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화려한 방에 들어갔다.
그런 AP―55248에게 세피로스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안에서 편히 쉬도록 하면 돼요. 별궁 안이라면 어디든 자유롭게 다녀도 좋아요.”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세피로스가 신호를 하자 한쪽에서 시녀들이 우르를 들어왔다.
그녀들은 평소 궁에서 일하던 시녀들과는 좀 달랐다. 보통의 시녀들 좀 더 미인들이었고 입고 있는 옷차림도 조금 더 노출이 많았다.
세피로스는 AP―55248에게 웃으며 말했다.
“제 아이들을 붙여 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시키세요.”
여기 붙여준 시녀들은 원래 사이펀 왕국의 밤거리에서 세피로스가 직접 가리고 가려서 뽑아 놓은 요원들이었다.
능력도 없고 전투력도 없었지만 미모와 방중술로 남자들을 녹여내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로 가려서 뽑아 놓은 것이다.
정보 수집이 주 임무인 그녀에게 있어서 미인계 전문 요원들은 너무나 필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더 예쁜 여자들을 뽑아서 AP―55248에게 붙인 것이다.
‘주인님이 나에게 직접 챙기라고 한 것은 이런 것도 염두에 둔 신호니까.’
그리고 세피로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편하게 지내세요.”
“예. 알겠습니다.”
AP―55248는 엉거주춤하게 인사를 하였고 세피로스가 방 밖으로 나갔다.
시녀들과 우두커니 남은 AP―55248는 어색하게 말했다.
“지금은 딱히 필요한 게 없습니다. 모두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그런 AP―55248의 말에 보통의 시녀들이라면 ‘예.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녀들은 시녀이기 이전에 요원이다. 세피로스에게 이 남자를 말랑말랑하게 녹여 놓으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 여기서 그녀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개중에 한 명이 다가와서 AP―55248의 옆에 자기 몸을 밀착하며 말했다.
“정말 필요한 게 없으신가요? 정말?”
“아니… 그게…….”
“잘 생각해 보세요. 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실 거예요.”
“맞아요. 저희는 손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해 드릴게요. 뭐.든.지.”
그녀들의 노골적인 유혹에 AP―55248은 크게 당황했다.
세계정부 소속의 초능력자들은 그 사생활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통제당한다.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등등 전부 말이다.
AP―55248의 경우 상급 능력자라서 감정의 제어가 불가능했고 그만큼 더 철저한 통제를 했다.
그러니 여자에 대한 경험이 있을 리가 없었다. AP―55248은 숙맥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성미숙자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는 AP―55248이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인간으로서의 본능은 지금 이 상황을 충실하게 인식하고 또 반응하고 있었다.
“어머, 역시 원하시는 게 있는 것 같은데요?”
여자들 중에 누군가가 AP―55248의 어딘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 이, 이건 그런 게 아니고…….”
“그런 게 맞답니다.”
“우리한테 맡기세요.”
“그럼 천국으로 보내 줄게요.”
그녀들은 AP―55248의 손길은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날 남정네 한 명이 순결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