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발레리아는 카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카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어나라, 발레리아.”
“…….”
카일의 말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상태로 묵묵하게 죄를 청했다.
“명령이다. 일어나.”
그러자 발레리아는 어렵게 일어났다.
침울한 표정의 그녀를 보고 카일이 말했다.
“애들이 많이 상했다고 했지.”
“제 불찰입니다.”
그녀가 카일에게 사죄를 청하는 것은 이번 전투에서 장미 기사단에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장미 기사단을 이끌고 나서 발생한 최대의 피해였다.
그로 인해서 카일에게 죄를 청하는 그녀였지만…….
“처벌은 없다. 발레리아.”
카일은 그녀를 처벌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주군.”
발레리아가 그런 카일에게 항변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카일이 먼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 탓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죽음은 적, 아군 모두에게 따라오는 것이지. 네가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다.”
“…….”
“책임감을 가지는 건 좋지만 어깨에 힘을 조금 빼라.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아군에서 사망자를 전혀 만들지 않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
카일의 말이 모두 맞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발레리아였다.
장미 기사단은 그냥 평범한 기사단이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중요한 전력이었다.
그런 장미 기사단을 서른 명이나 잃어버렸다.
카일이 믿고 맡긴 중요한 전력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주군, 저를 이대로 용서하시면 기사단의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발레리아의 말에 카일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기사단의 단장이란 자고로 실책에 다른 책임이 따라야 하는 법. 여기서 제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 단원들이 납득하고 절 따라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 발레리아의 말에 카일은 피식 웃더니 어딘가를 향해서 말했다.
“…라고 말하는데 정말이냐?”
그렇게 카일이 말을 하자…….
방의 안쪽에 있는 다른 문이 열리면서 장미 기사단의 조장급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너희들이 여기는 왜 왔어?”
깜짝 놀란 발레리아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카일이었다.
“너보다 한발 먼저 나한테 찾아왔다. 이걸 들고 말이야.”
카일이 내민 것은 장미 기사단 전원의 사인이 들어간 탄원서였다. 그 탄원서의 내용은 발레리아의 처벌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카일은 그걸 발레리아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
“이대로 너를 처벌하면 오히려 장미 기사단의 단합이 무너질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린가?”
“…….”
발레리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카일이 단정 짓듯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처벌은 없다. 손실이 있었다고 하지만 올린 전과는 훌륭했으며 무엇보다 큰 성과도 이뤘다. 오히려 상을 내려야 마땅하지만 아직 전시 중이니 모든 논공행상은 전쟁이 끝난 후로 미루겠다. 이것은 결정 사항이며 일체의 반론도 용납하지 않겠다. 알겠나?”
“예, 주군!”
“예, 주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장미 기사단의 단원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발레리아를 돌려보낸 후, 에이라가 카일을 찾아왔다.
“오빠, 나 왔어요.”
“무슨 일이니?”
“무슨 일이긴, 보고 할 일이 잔뜩이니 왔죠.”
“그럼 해 봐.”
카일의 말에 에이라가 쉬지 않고 말했다.
“빅토르 전하의 본군에 지원군이 합류해서 루마니스 제국의 남부는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어요. 전선이 확장되었고 여기저기서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죠.”
“그렇군. 우리 쪽 작전은?”
“적의 이목을 가리느라고 시간은 좀 걸렸지만 순조롭게 진행 중이에요. 이제 절반 정도만 더 진행하면 돼요.”
“가능하면 서둘러 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발레리아 경과 아리시아 씨가 여러 가지 전리품을 잔뜩 가지고 왔어요. 어떻게 할까요?”
“전리품이라, 그게 은근히 계륵이란 말이지.”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리아와 아리시아는 이번 전투에서 세계정부의 전투 부대와 싸우고 승리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장비 중에 상당 부분을 전리품으로 습득했다.
각종 중화기와 수류탄, 폭약, 그 밖에 군대에서 사용하는 첨단 장비 등등. 하지만 그걸 가져왔다고 해도 바로 사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총알은 얼마 안 남았다고 했지?”
“예. 전투 중에 거의 다 소진되고 남은 건 1천 발 정도라고 했어요. 폭탄도 서른 개 정도밖에 안 남았고, 다른 장비들도 배터리를 충전하거나 연료를 구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고철이죠, 뭐.”
“흠, 아쉽군.”
지구에서 만들어 낸 군사 장비는 과학을 근거로 해서 제작되어 있다. 그 장비를 사용하기 위한 유지 보수에 대한 지식과 기술자가 없으면 사실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총화기에 사용할 탄약이나 지프차에 넣을 기름도 만들어 낼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일단 가지고 있도록 해. 어떻게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봐야지.”
“고철로 취급해서 녹여서 사용하게요?”
“정 안되면 그렇게라도 하든가.”
지금으로서는 달리 유용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물자는 그렇게 한다 치고, 그 사람은 어떻게 할 거예요?”
“AP―55248 말이지?”
카일의 말에 에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그렇게 사람을 인식 번호로 분류하고 불러요. 농담 아니고 진짜?”
“나는 KA―98746이었다.”
“와아아… 심하다. 오빠가 있던 세계에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다.”
에이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에이라에게 카일이 말했다.
“놈의 상태는 어때?”
“아직 약으로 재워두고 있어요. 아리시아 씨의 보고에 의하면 굉장히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쉽게 구속하기도 힘들 것 같아서요.”
“…….”
카일은 고심했다.
보통 적을 사로잡았을 때 가장 유용한 활용법은 그 적을 심문해서 정보를 빼내는 것이다.
하지만 AP―55248이 알고 있는 정보라면 이미 다 빼낸 상태다. 이전에 노 페이스가 놈을 복제해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빼돌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냥 죽이기에는 아쉽지.’
놈 하나를 사로잡기 위해서 발레리아와 아리시아가 굉장히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그 고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놈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만나 봐야겠다.”
라는 결론이 나왔고 말이다.
* * *
AP―55248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자신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일어났나 보군.”
그 남자를 본 순간 AP―55248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카일 화이트.”
“나를 아는 모양이야.”
당연히 알고는 있었다.
세계정부에서 이 세계를 조사하는 와중에 알게 된 카일 하이트는 초능력자를 양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 특이도와 위험성은 경계 대상 특급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런 인물의 인상착의도 모를 정도로 AP―55248은 얼빠진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 화이트 공국도 끼어든 것이오? 황제 폐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AP―55248은 자신이 마치 루마니스 제국 소속의 인간인 것처럼 말했다.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세계정부에서 적에게 잡히면 그렇게 답하라고 시킨 모양이지.”
카일에게는 아무런 소용없었다.
AP―55248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카일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루마니스 제국민으로 제피오 영지 출신입니다. 현재는 원 어스 클랜에 소속되어서…….”
“AP―55248이고 세계정부 소속의 초능력 부대 상급 전투원이지. 십수 년간 세계정부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소탕 작전에 동원되어 왔으며 지금은 이 세계의 정복을 위해서 다수의 초능력자들과 함께 넘어와 있지. 뭐 틀린 거 있나?”
뿌드득.
AP―55248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아니, 아마도 무슨 방법이 있겠지.’
AP―55248은 카일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기억을 뒤질 수 있는 능력자나 기술이 있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만큼 알고 있으면서 나를 살려두고 있는 이유는 뭐요?”
“너를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들면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오?”
AP―55248은 날카롭게 노려보며 은근히 자신의 초능력 중추를 점검해 봤다.
‘좋아. 움직인다.’
초능력 중추가 움직인다는 말을 싸울 수 있다는 말이다. 설령 적진의 한가운데라고 해도 이래도 잡혀 있을 바에는 마지막으로 한번 날뛰고 죽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때 카일이 말했다.
“너희들이 세계정부를 상대로 지켜야 할 의리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너희 능력자들을 인간 취급도 안 하고 오직 도구로 취급하는 이들인데 왜 그렇게까지 충성하지?”
“당신이 뭘 한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요?”
“글쎄, 내가 뭘 알까?”
카일은 피식 웃었다.
자신 역시 세계정부에 소속된 능력자로서 살아왔고 마지막까지 이용하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카일의 입장에서 지금 AP―55248이 하는 말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AP―55248은 그런 카일의 조소를 보며 말했다.
“세계정부가 우리를 도구 취급 할지라도 결국 우리 초능력자들이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법은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오. 그리고 언젠가 이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고 나면 우리에게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치구를 준다고 했겠지?”
“뭐……?”
“자유를 주고, 이름을 주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준다고 했겠지? 세계정부의 계획에 협조만 잘하면 말이야.”
“당신이 그걸 어떻게……?”
“멍청한 새끼, 그건 거짓말이다. 놈들은 절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아니, 약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지. 세계정부에게 있어서 능력자는 철저한 도구다. 넌 도구하고 약속을 하나?”
“그걸 어떻게 장담한단 말이오?”
버럭 소리를 지르는 AP―55248에게 카일이 말했다.
“나 역시 당했으니까 아는 거다.”
“그게 무슨 개소…….”
“내 전생의 이름은 KA―98746 한때 세계정부에서 SS급으로 지정되어서 관리되던 능력자다.”
“…뭐라고?”
“한 번 죽고 나서 이 세계로 전생했지. 자세한 얘기를 들어볼 테냐?”
그리고 카일은 자신의 지난 인생에 관한 얘기를 털어놨다.
사실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 것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밝히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는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절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오직 같은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만 마음이 열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좀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데 너희들 세계정부의 흔적을 찾게 된 거다.”
카일이 여기까지 설명을 하자 AP―55248은 입을 쩍 벌리고 말했다
“그게, 그게 정말입니까?”
“왜 못 믿겠나?”
“아니, 믿어야지. 믿을 수밖에 없지.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설마 당신이…….”
AP―55248은 떨리는 목소리로 카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 KA―98746이라고? 능력자들의 희망이라고 불렸던 그 위대한 혁명가?”
“…뭐?”
이번에는 카일이 어이없어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