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원 어스 클랜의 본부.
거기서 클랜장은 썩은 표정으로 누군가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오라버니.”
화사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아리따운 미녀의 정체는 황제의 애첩인 혜정이었다.
그녀의 인사에 오라버니의 대답은…….
“집어치워.”
이거였다.
그리고 혜정 역시 표정을 싹 바꾸더니 말했다.
“흥,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이 돼지 새끼야.”
안면을 바꾼 그녀는 멋대로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 가서 앉더니 말했다.
“애들 데리고 가서 전쟁터 좀 가지?”
“내가 왜?”
단번에 인상을 찡그리는 클랜장 제이를 보고 혜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최근에 대위님한테 찍히지 않았나?”
그 말에 제이의 안색이 확 변했다.
“어디서 그딴 말을…….”
“어머, 내가 알고 있는 게 신기해? 우리 잘난 2급 시민님이 최근 실수해서 싹싹 빌었다는 사실이 지구 반대편까지 퍼졌던데?”
“…….”
제이는 푸짐한 볼살을 부들부들 떨면서 모멸감을 씹어 삼켰다.
‘저 년이…….’
제이는 진심으로 지금 이 상황이 미칠 것처럼 분하고 치욕스러웠다.
최근 자신의 실책으로 이진영 대위에게 깨질 때 하고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왜냐하면 이진영 대위는 제이보다 윗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을 질책하는 건 서열상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혜정은 그 서열 자체가 제이보다 낮았다. 그것도 까마득하게 말이다.
잠시 세계정부의 서열을 설명하자면 통상적으로 1급, 2급, 3급 시민으로 나뉠 수 있다.
이 급수에 따라서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차등을 두고 있으며 이 급수의 서열을 거스르는 행위는 절대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로 초능력자들의 경우에는 급수가 없다. 인간 이외의 ‘도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이 자신은 세계정부가 인정한 2급 시민이다.
세계정부에서 2급 시민이라고 하면 상당히 상류층이고 실질적으로 사회의 지도층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다.
지금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세계정부가 파견한 간부급은 네 명.
임무의 위험성 때문에 대부분은 도구인 초능력자를 파견했지만 그 도구를 관리할 ‘인간’이 필요하니 그들을 파견한 것이다.
최고 책임자로 파견한 이진영 대위. 그는 1급 시민이다. 그리고 그 밑에 실무진으로 2급 시민 세 명을 선발해서 보냈는데 그게 제이, 케이, 제트였다.
본래는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2급 시민의 경우 임무에 투입될 경우 이름을 몰수당하고 따로 코드 네임을 받는다.
어쨌든, 지금 세계정부에서 ‘인정한 인간’은 네 명뿐이다.
그렇다면 혜정은 뭘까? 그녀는 초능력자다.
즉, 세계정부의 기준에서 그녀는 인간이 아닌 도구다. 그것도 아주 약한 초능력을 지니고 있는 최하급 도구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서 세계정부의 고관들의 마음에 드는 것에 성공했다.
보통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신분의 벽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아주 가끔씩 나타나기도 한다.
미모, 야망, 집념, 독기 등등. 이런 것들을 다 갖추고 태어나서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는 권세를 손에 넣는 여인들이 말이다.
혜정이 딱 그런 타입의 여인이었다.
천하지 천한 도구로 태어나서 세계정부의 고관의 눈에 들어서 ‘귀여운 애완동물’이라는 위치를 손에 넣었다. 그 올라가는 수단은 여자로서의 굴욕과 치욕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세계정부의 기준으로 혜정의 신분은 인간이 아닌 도구일 뿐이다.
심지어 그녀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가는 과정에는 제이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한때는 그녀는 제 밑에 깔려서 오만 아양을 떨고,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 했었다. 인간 취급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재미있는 성욕의 해소용 장난감일 뿐이었다.
그랬던 혜정이 지금은 자신의 앞에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데도, 제이는 그녀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만약 함부로 손을 썼다가 그녀의 뒤를 봐주는 높은 분의 심기를 거스르면 제이 역시 끝장이기 때문이다.
제이는 이를 빠득빠득 갈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장난감이었을 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혜정은 제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능히 짐작이 갔지만 오히려 더 진한 비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무능한 것 티 내지 말고 진정해. 나는 지금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개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최근 네 실수로 인해서 세계정부의 계획에 약간의 지장이 생겼지. 거기다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루마니스 제국은 전쟁까지 하고 있어.”
혜정은 제이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일방적으로 이어갔다.
“심지어 그 전쟁으로 인해서 던전 코어의 가격은 더 올라갔고 우리 세계정부 소속 요원들의 활동도 더 힘들어졌지.”
“…….”
“하지만 말이야. 만약 네가 원 어스 클랜을 이끌고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 어떻게 될까? 황제의 입장에서 공을 세운 클랜장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나더러 미개한 원주민 따위에게 상이라도 받으라는 거냐?”
“정확하게 말하면 황제에게 신임을 사서 우리 세계정부의 입장에서 유리한 대가를 받아 내자는 거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세계정부의 이세계 진출을 더 앞당겨 줄 수도 있어.”
“미개한 원주민 따위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냐?”
“미개하건 말건 제국의 황제야. 마음먹으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많지. 실제로 원 어스 클랜을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너라면 잘 알 텐데?”
“…….”
혜정이 하는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제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혜정이 결정타를 날렸다.
“위기가 곧 기회인 법이야. 여기서 공을 세운 다음 이진영 대위님에게 잘 보이기라도 하면 혹시 알아? 1급 시민으로 진급할 수 있을지도.”
“1급 시민…….”
제이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드러났다.
세계정부에서 2급 시민이 상류층이라면 1급 시민은 그야말로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전 세계의 20억 인구 중에서 약 5만 명의 인간이 1급 시민으로 등록되어 있다. 인류 전체의 0.0025% 밖에 없는 1급은 그야말로 신의 계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1급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권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제이 같은 2급 시민들에게 있어서 1급 시민으로의 진급은 평생의 숙원이나 다름없었다.
정신 줄을 놓고 몽롱하게 있던 제이는 황급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냐?”
“당연하지. 지금 세계정부에게 있어서 이세계 개발만큼 중요한 일이 있어?”
“…….”
“그야말로 정부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야. 여기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합당한 포상이 주어지는 건 당연하지. 안 그래?”
“그건 맞는 말이긴 하군.”
제이는 고민했다.
사실 최근 이진영 대위에게 크게 혼이 나고 나서 클랜의 활동 자체를 크게 자제하고 있었다. 괜히 튀다가 다시 실수를 해서 찍히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혜정의 말대로 공을 세우고 나면 이전의 실수를 덮는 건 물론이고 세계정부에서 큰 공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제이의 말에 혜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쟁터 가서 하긴 뭘 해? 사람 죽여야지.”
그리고 그녀는 전쟁의 상황과 황제의 요구 사항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 * *
발레이아와 아리시아는 순조롭게 전과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핀을 이용한 기동력.
기본적으로 월등한 전투력.
각종 초능력을 각성한 능력자들의 활용성.
이 정도의 조합으로 작정하고 날뛰고 있으니 루마니스 제국의 평범한 지방 영주들의 군대가 어떻게 이길 리가 없었다.
그녀들은 후방의 은밀한 지역에 캠프를 차려 놓고 계속 루마니스 제국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캠프에서 아리시아는 머그컵 두 잔을 손에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커피 가져왔어요.”
“고마워.”
발레리아는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커피를 받아서 홀짝였다.
아리시아는 그런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까요?”
“글쎄, 얼마 전에 빅토르 전하가 있는 요새에 엘파소 왕국과 미들랜드 왕국군의 지원군이 합류했다고 하니…….”
발레리아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제 슬슬 물러나도 될 것 같기는 하네.”
그러자 아리시아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요. 주인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좀 더 큰 공을 세우고 싶지 않아?”
“관심 없어요. 주인님하고 있는 게 더 좋아요.”
“…….”
“우리 공이 크면 주군께서도 기뻐하실 거야.”
“루마니스 제국 황제 목이라도 딸까요?”
“아니, 있어 봐, 그건 아니고, 으음…….”
발레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빅토르가 있는 요새에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 최소한의 목적은 이루었다.
하지만 기사로서의 본능이 여기서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자고로 기사란 전쟁터에서 가장 그 가치가 빛나는 존재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리시아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도 더 큰 공을 세우면 카일이 자신을 칭찬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카일은 발레리아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수고했다. 과연 나의 기사다. 발레리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발레리아에게 카일은 직접 다가가서 말했다.
‘그렇지 않다. 실로 대단한 전과였다. 너는 최고의 기사다. 발레리아.’
‘주군…….’
‘그리고 최고의 여자이기도 하지.’
‘그런…….’
카일은 발레리아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고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서서히…….
“무슨 생각 해요?”
“어? 어어어?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
허둥거리는 발레리아를 보고 아리시아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주인님 가지고 망상했죠?”
“뭐? 내가? 왜? 안 했어.”
“표정이 망상 속에서 주인님을 독차지하고 칭찬받고 사랑받으면서 키스까지 받는 표정이었는데…….”
‘무슨 촉이…….’
발레리아는 뜨끔 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보다, 물러나기 전에 한 번 크게 날뛰고 물러나는 게 어때?”
“크게 날뛴다고요?”
“그래. 지금까지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 위해서 수천 단위의 작은 부대만 급습해서 처리했잖아? 여기까지 왔으면 마지막에는 정체가 드러나도 상관없으니 크게 한탕 하는 거야.”
“나쁘지 않네요. 주인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그렇지. 그럼 어디서 한탕을 하면 좋을까?”
“한탕 하기 좋은 목표 말이죠. 으음…….”
그렇게 두 여인은 지도를 보며 한탕 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참고로 그녀들의 본업은 절대 산적이 아님을 명시해 둔다.
그때 발레리아와 아리시아가 회의 중인 막사 안으로 탐색대의 대원 한 명이 들어왔다.
“아리시아 대장님. 보고 사항입니다.”
“무슨 일이야?”
“예. 수색조가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고 합니다. 숫자는 2천입니다.”
“너무 적네. 다른 목표를 찾아봐.”
“하지만 대장님. 놈들이 끌고 있는 수레는 200대가 넘는다고 합니다.”
“뭐, 수레가 200대?”
“예, 그렇습니다.”
아리시아는 발레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급에 주력한 부대일까요?”
“가능성은 있지. 그동안 우리가 보급선을 망쳐 놨으니 한 번에 많은 물량을 이송할 수도 있어.”
“수레 200대라. 그게 온전하게 식량이기만 해도…….”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겠지.”
둘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한탕 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지? 한번 거하게 할 수 있겠어. 후후후.”
“후후후후후…….”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막사 안의 분위기는 눈곱만큼도 훈훈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