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아리시아와 발레리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불과 열흘.
“후작님. 또 원군이 궤멸했다고 합니다.”
“또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루마니스 제국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바라빈 케메로 후작의 표정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벌써 많은 병력이 당했다.
아군에 합류하기 위해서 식량과 병력을 징발해서 참전하려던 지방 영주의 군대가 전멸해 버리는 것이다.
그냥 패배하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전멸이었다.
생존자 한 명 남기지 않는 철두철미한 적들 때문에 케메로 후작은 아직 적의 정체도 알 수가 없었다.
“제길, 적의 형태조차 보이지 않다니. 이래서는 대응책을 세우기도 쉽지 않은데.”
초조해하는 케메로 후작에게 부관이 말했다.
“정찰 부대를 편성해서 후방의 보급 부대를 대대적으로 순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 그랬다간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한 저지선이 약해진다. 우리들의 본연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으면 안 돼.”
“하지만 이대로 후방을 혼란스럽게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
부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케메로 후작은 선택해야 했다.
전방의 적에 집중해서 지원군 없이 지금의 병력만으로 막아서느냐? 아니면 후방 안정을 위해서 뒤로 병력을 조금 물리느냐?
‘보급선의 길이가 짧아지면 적도 지금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만약 여기서 저지선을 뒤로 물린다면 루마니스 제국이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양상이 된다.
만약 루마니스 제국이 그냥 그런 왕국 중에 하나라면 상관없겠지만 여러 제후국을 거느리고 제국의 위광을 보여야 하는 루마니스 제국이 그런 전략을 취하는 것은 국내와 제후국에게 불안과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자고로 강자에게는 강자 나름의 입장과 사정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체면이냐? 실리냐?
둘 중에 하나를 두고 고민하던 케메로 후작은 일단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병력을 뒤로 물린다는 것으로 7할 정도 마음이 기울었지만 그냥 독단으로 저지선을 뒤로 물리기 전에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려는 것이다.
작전상 스스로 전선을 뒤로 물리는 것임을 황제에게 밝힌다면 후방의 혼란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통신구를 가져와라.”
“예. 후작님.”
잠시 후.
마법사가 와서 통신구를 연결하고 케메로 후작은 황제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연유로 후방으로 저지선을 물려서 적의 교란책에 대응하고자 합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옵소서.”
그 말에 통신구 너머의 황제가 말했다.
―정녕 그 방법밖에 없겠나?
황제로서는 가능하면 전선을 뒤로 물리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저지선을 뒤로 물린다는 말은 그만큼 영토를 많이 침략당한다는 것 아닌가?
특히 중앙의 귀족들 중에는 남부지역에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는 귀족들도 많다.
그들은 이번 전쟁에 큰 불안을 보이고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전쟁터가 된 그들의 영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테니 말이다.
거기다 남부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세비아 왕국이나 율리우스 왕국 같은 부유한 왕국과의 교역이 활발해 수입도 많았다.
수입이 많다는 것은 정치적인 영향력이 크다는 말이었고 자연스럽게 중앙 정계에서 그들의 존재감도 컸다.
저지선을 물리겠다고 황제가 허락하는 순간 그들이 불만을 털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황제는 정치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그들을 달래야 할 것이다.
황제의 입장이 그러하기에, 저지선의 후퇴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하, 신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전쟁의 승패에만 집중해야지 다른 외부 요소를 일일이 신경 쓰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케메로 후작이 하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케메로 후작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쟁의 승리다.
중앙 정치의 미묘한 권력 구도까지 신경 쓰면서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황제 역시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일단 전쟁의 승패가 무엇보다 중요하니…….’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남부지역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중앙 귀족들을 불러서 대화를 통해서 설득해 보겠네. 어느 정도까지 물러나도 되는지 합의를 해야겠어.
“감사합니다. 폐하. 부디 빠른 성단(聖斷)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지.
황제의 마지막 말과 함께 통신은 끊어졌다.
“후우우… 피곤하군.”
루마니스 제국의 젊은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케메로 후작의 요청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의 영지에 피해를 입을 귀족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은 꽤 골치 아픈 일이다.
‘피해 보상금 지불 정도로 막을 수 있을까? 가능하면 세금 감면까지는 안 가고 싶은데…….’
황제는 남부지역의 귀족들을 어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자리는 의외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 피곤했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황제는 시종을 불러서 말했다.
“후궁으로 가자.”
“예, 폐하.”
* * *
황제의 후궁.
제국 각지, 아니, 전 대륙에서 루마니스 고르고 고른 미녀들을 모아서 아름답게 꾸미고 오직 황제의 총애만을 받기 위해서 모여 있는 장소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상상해 보고, 황제를 부러워할 만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아 놓은 수많은 미녀들이 모두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몇몇 여인들이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황제는 새로운 애첩에게 푹 빠져서 다른 여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황제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연 곳에 기다리고 있는 여인은 바로…….
“내가 왔다. 혜정.”
“폐하.”
검은 머리에 연한 갈색의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반할 것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청순하면서도 화사한 미모의 얼굴에 가녀린 몸매.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미모의 여인은 황제가 오자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하며 그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셔요. 폐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혜정. 남방대륙의 연나라 출신으로, 최근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황제의 앞에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늘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시녀들이 있음에도 스스로 황제의 겉옷을 받아주며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데도 그대는 내가 반가운가?”
“매일, 매시, 매분, 폐하를 뵙지 못하는 모든 순간 소첩은 폐하를 그리워하고 있사옵니다.”
“하하하. 그대는 참으로 사랑스럽구나.”
“부끄럽사옵니다.”
혜정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대의 오라버니는 어떤가? 최근 좀 안 좋은 일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황제의 물음에 혜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소첩은 오라버니께서 하시는 일에 관해서는 잘 모르옵니다. 이제 출가외인이니 그저 폐하께 정성을 다할 뿐이라서…….”
“후후후. 그런가?”
황제는 혜정을 더 기특하게 바라봤다.
보통 황제의 여자들이 가장 많이 앞장세우는 건 자신의 친가의 위세다.
내 가문이 황권에 큰 도움이 되는 가문이니 부디 나를 섭섭하게 하지 말아 달라, 라는 식의 요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혹은 노골적으로 말하는 여인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혜정은 친가의 위세 따위는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 그녀의 친가가 어지간한 귀족 가문보다 더 위세가 대단한데도 말이다.
혜정은 대외적으로 연나라 출신의 상인의 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다.
최근 루마니스 제국에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원 어스 클랜. 그 클랜장의 여동생이 바로 그녀였다.
루마니스 제국의 모험가 우대 정책과 맞물려서 급성장 한 원 어스 클랜은 어쩌면 새로운 던전 공략자를 배출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원 어스 클랜은 루마니스 전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던전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었다.
그런 클랜장 제이의 여동생이 바로 혜정인 것이다.
황제가 루마니스 제국에서 원 어스 클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면서 한 편으로는 그들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 중에 하나로 클랜장의 여동생을 자신의 후궁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정략적인 이유로 맞이하긴 했지만, 황제는 그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차를 우리겠습니다.”
혜정은 자리에 앉은 황제에게 직접 차를 우려서 따라 주며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혹시 힘든 고민이라도 있으신지요?”
“음, 제국의 정사를 다스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황제는 혜정이 직접 따라준 차를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후우우… 좋군.”
차의 향기에 취한 황제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황제에게 혜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다. 본래 남방대륙의 차는 그리 즐기지 않았지만 혜정 그대가 직접 우려 주는 차는 다르다. 혹시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황제의 물음에 혜정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정성껏 우려낼 뿐이랍니다.”
“하하하…….”
황제는 그런 혜정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끌어당겨서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혜정은 황제의 품에 안겨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폐하. 무슨 고민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정 답답하시다면 소첩에게 털어놔 보시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건…….”
황제는 망설였다. 설사 자신의 후궁이라고 해도 국사를 함부로 유출하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어리석은 소첩 따위가 감히 국사를 논하는 데 도움이 될 리야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민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털어놓음으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혜정이 이렇게 말하자 황제의 마음도 흔들렸다.
“소첩은 그저 폐하의 마음을 위하고 싶을 뿐입니다. 혹시 주제가 넘었다면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내가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아끼는 애첩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결국 황제는 입을 열고 말았다.
“사실은…….”
그리고 황제는 현재 남부의 전황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전쟁의 상황에 대한 기밀 정보를 루마니스 제국의 어떤 귀족이나 신하들보다 황제의 애첩이 먼저 접한 것이다.
혜정은 황제의 말을 다 듣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신하들도 문제네요. 제국의 지존이신 폐하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챙기다니…….”
“으음…….”
혜정의 말을 들은 황제는 머릿속으로 ‘듣고 보니 그렇군.’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황만 보면 제국의 황제인 자신이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그게 정치의 본질이자 생리라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혜정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신하들에게 너무 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황제에게 혜정이 말했다.
“폐하, 혹시…….”
말을 하다가 흐리던 혜정에게 황제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거냐?”
“아니어요. 생각하니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아요. 고작 여인일 뿐인 제가 무슨…….”
“뭔가 생각이 있다면 말하여라. 어떤 말을 하든 나무라지 않으마.”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혜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의 말대로라면 일선 지휘관인 케메로 후작이 후방의 보급선을 지키지 못하는 게 원인이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생각하니 괘씸하긴 하군. 적지도 아니고 어찌 제국의 영토 안에서 하는 수비전에서 보급 하나 제대로 못 하는지…….”
혀를 차며 한탄하는 황제에게 혜정이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오라버니에게 맡겨 보시면 어떨까요?”
“오라버니? 원 어스 클랜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이냐?”
“폐하를 위해서라면 제가 오라버니에게 어떤 부탁을 해서라도 움직여 보겠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원 어스 클랜의 모험가들이라면 후방을 교란하고 있는 적에게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혜정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황제가 말했다.
“아주 좋군. 하지만 모험가인 원 어스 클랜을 전쟁에 동원해도 괜찮겠나?”
“예. 그게, 폐하를 위해서라면…….”
“하하하. 네가 나의 행운의 여신이구나.”
황제는 혜정을 품에 안으며 밝게 웃었다.
어쩌면 저지선을 물리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