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주군,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기사가 닦달을 하자 그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큭, 병사들은 어쩐단 말인가? 이대로 두면 전멸이다.”
“방법이 없습니다. 각자 후퇴 명령을 내리고 주군도 피하셔야 합… 크으윽!”
콰아아앙!
말을 하던 기사는 황급하게 검을 휘둘러서 자신의 주군을 노리고 날아온 공격을 쳐냈다.
‘무슨 공격이…….’
그는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이른 기사로 나름 강자였다. 그런데 방금 전의 공격은 그런 자신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공격을 가한 여기사 한 명이 하늘에서 그리폰을 타고 천천히 하강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군. 맞나?”
“너는 누구냐?”
“장미 기사단의 평기사 제일라 베라니모다.”
“장미 기사단……. 화이트 공국이냐?”
화이트 공국의 장미 기사단은 대륙에서 꽤 유명한 기사단이다.
기사단 전원이 카일의 은총을 받은 능력자라는 것과 그녀들의 범상치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등으로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이렇게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줄은 몰랐다.
“바톨리아 자작령의 기사단장 도토르 바가체프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리고 그녀는 그리폰에서 내려섰다.
“뀌이이익.”
그리폰은 그녀에게 왜 내리느냐고 투덜거렸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제 파트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잠시 기다려다오.”
“꾸이이.”
그리고 그녀는 검을 뽑아서 상대에게 겨누며 말했다.
“기사 대 기사로서 응해 주지. 와라.”
일대일로 맞서는 그녀를 보고 도토르라는 기사가 말했다.
“말은 잘하는군. 노예로 떨어져서 창녀로 굴러먹던 년이 말이야.”
“…….”
상대의 모독에도 제일라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장미 기사단은 모두 카일이 노예 출신을 거둬서 구해 준 후 구성한 기사단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노예로 신분이 떨어진 후 어떻게 되는지 뻔한 이 세상에서 장미 기사단의 과거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롱에 흥분해서 정신을 흐트러트릴 인물은 장미 기사단에 한 명도 없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제일라가 냉정하게 말하며 자세를 취하자 도토르가 다시 한번 도발하기 위해서 말했다.
“너 같은 걸레들을 곁에 두는 걸 보면 카일 화이트의 취향도 어지간한가 보군. 아, 끼리끼리 논다고 혹시 카일 화이트도… 큭.”
쩌어어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토르의 안면이 확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도토르는 봤다.
“넌 뒤졌어. 이 XX 새끼야.”
자신이 모독당할 때는 냉철하던 제일라가 카일 화이트의 욕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을 말이다.
제일라는 검을 놔두고 강철 건틀릿을 낀 주먹을 말아 쥐고 다가오며 말했다.
“편한 죽음은 꿈에도 바라지 마라!”
도발은 잘 먹혔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싸게 치러야 했다.
* * *
바톨리아 자작은 수십 기의 기마 부대만을 데리고 미친 듯이 도주했다. 기사단이 후방에서 막아 주는 사이에 발 빠르게 발을 뺀 것이다.
덕분에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제길,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여기는 아직 우리 루마니스 제국의 영역이란 말이다! 하늘에서 적이 그리폰을 타고 나타나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그는 누구에게 따져 묻는 건지 알 수도 없는 악을 쓰면서 계속해서 도주했다. 너무 억울해서 이렇게 악이라도 쓰지 않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쏴라!”
명령과 함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퍼퍼퍼퍽!
“크으윽…….”
“아악!”
사방에서 날아온 화살에 바톨리아 자작을 호위하던 병력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갔다. 바톨리아 자작 역시 달리던 말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며 낙마해 버리고 말았다.
쓰러진 바톨리아 자작의 눈앞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엘프 여인이 한 명 나타났다.
보통의 엘프 보다 귀가 살짝 짧은 것으로 봐서는 하프 엘프 같았다.
등에 메고 있는 활과 화살, 양쪽 허벅지에 차고 있는 짧은 단검 두 자루. 최소한의 보호만을 위해서 착용한 가죽 갑옷.
옷차림만 보면 전쟁터가 아니라 사냥터에 있어야 할 듯한 여인이었다.
바톨리아 자작은 중얼거렸다.
“너는… 아리시아?”
“아는 모양이군.”
아리시아는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카일과 오랫동안 함께해 왔고 항상 그 곁을 지키고 있는 만큼 그녀의 이름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주로…….
“카일 화이트의 미친개.”
악평이었지만 말이다.
“저런. 나 따위가 주인님의 개라니…….”
정작 본인은 그걸 또 좋아한다고 한다.
얼굴을 붉히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는 그녀의 모습은 겉모습만 본다면 수줍음 타는 처녀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에 바톨리아 자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소문대로 진짜 미친년이다.’
* * *
카일 화이트의 부하들이 카일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카일이 그만큼 눈부신 업적을 세운 것도 있고 또 자기 부하들을 최우선으로 잘 챙겨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은총을 받은 각성자들은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아리시아의 충성심이 높기로 유명했다.
술집에서 어떤 모험가가 카일의 험담을 하다가 우연히 아리시아에게 걸려서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졌다거나 카일을 노려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알을 파 버리려고 했다거나 하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특히 이러한 일화도 있다.
* * *
조나라의 대상단의 자제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청혼을 했다.
“가문에서 어떤 반대를 한다고 해도 반드시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하고 말겠소. 그러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아깝지 않소.”
이렇게 절절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그 젊은이는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능력까지 갖춘, 그야말로 대다수의 여자들이 바라는 신랑감이었다.
그런 1등 신랑감의 프러포즈에 대한 아리시아의 대답은…….
어느 날, 에이라가 카일에게 와서 대뜸 말했다.
“오빠, 아리시아 씨가 조나라 벤츠를 폐차시켰어요.”
“…뭐?”
에이라는 카일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 같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딱 안 죽을 정도로 팼다고 하는데요. 지금 조나라 외교관이 정식으로 항의하고 있는데 어쩌죠?”
카일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아리시아 불러 와. 일단 사정을 들어야겠다.”
당시 카일은 아리시아에게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충성스러운 동료이자 애인이 아닌가? 우선 그녀를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왜 조나라의 젊은 상단주를 반 죽여 버린 거니?”
“아직 살아 있다니……. 오라버니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진짜 죽여 버릴 수 있었는데,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서 시간을 끈 게 문제였나?”
그녀의 살벌한 독백을 들으며 카일이 말했다.
“그놈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거냐?”
“예. 놈은 너무나 모독적인 발언을 했어요.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리시아를 이를 갈았고 그런 그녀를 보고 카일이 말했다
‘무슨 짓을 당했지? 종족 차별? 성희롱? 설마 그 새끼가 아리시아한테 손이라도 데려고 했나?’
만약 그렇다면 카일이 직접 나서서 박살 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아리시아의 말은…….
“그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 그대를 사랑하오. 나는 카일 화이트 따위와 달리 그대를 노예가 아닌 아내로… 커억.’이라고 했어요.”
“…응?”
“‘커억’은 제가 그 순간 놈의 코뼈를 부셔 버렸기에…….”
“…응?”
이해가 안 가는 카일에게 아리시아가 열변을 토했다.
“어떻게 감히 주인님에게 ‘따위’라는 말을 붙일 수 있죠. 진짜 자근자근 밟아 죽이기로 마음먹고 밟고 있었는데 하필 검은 바람 오라버니가 근처에 계셔서 저를 말렸어요. 쓸데없이 비명 소리가 크더라고요.”
“…….”
“애당초 저를 탐내는 것부터가 너무 무례해요. 저는 주인님의 것이잖아요. 즉, 저를 탐내는 건 주인님의 것을 탐내는 것이죠. 그 말은 주인님의 것을 탐낸 대역죄인은 살 가치가 없으니 당연히 죽이는 게 옳은 거죠. 그러니… 그러니… 그러니…….”
말을 하던 아리시아의 눈의 초점이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죽여야겠어요.”
“잠깐, 아리시아! 스톱! 스테이!”
그 사건으로 카일은 조나라의 외교사절을 직접 가서 위자료를 지불하고 먼저 사과를 했다.
조나라와 국제 무역을 시작한 이후 카일이 먼저 사과를 한 첫 번째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이게 아리시아의 카일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을 알 수 대표적인 일화다.
* * *
아리시아는 양손의 단검을 뽑고 바톨리아 자작에게 말했다.
“칭찬해 준 건 고맙지만 일은 일이다 보니 죽어 줘야겠어.”
“잠, 잠깐.”
핏!
자작인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얇은 선 하나가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바톨리아 자작은 누가 자신의 머리를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저건 내 몸….’
지면에 목이 떨어진 바톨리아 자작은 자신의 생의 마지막 기억으로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보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비록 목 없는 몸뚱이지만 말이다.
“발레리아 씨, 다 끝났나요?”
“여기는 끝났어. 포위망은 어때? 뚫린 곳은 없고.”
“없어요.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어요.”
아리시와 발레리아가 한 것은 완벽한 쌈 싸 먹기식 전멸이었다.
적을 발견하면 우선 바로 공격하지 않고 몰래 추적하며 적이 빈틈을 보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기회를 잡으면 우선 아리시아가 이끄는 탐색대가 주변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한 포위망을 구성한다.
아리시아가 이번 작전에 투입한 탐색대의 병력은 800명이다. 숫자는 적지만 결코 만만한 전력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800명은 전부 카일의 은총을 받고 각성한 능력자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탐색대의 능력자들 중에는 탐색이나 추적에 관련된 능력을 각성한 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 이들이 대거 투입된 포위망이니, 과장 좀 보태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포위망을 구성하고 나면 하늘에서 장미 기사단이 그리폰을 타고 강습하는 것이다.
그 숫자는 300명뿐이지만 이 전력의 실상을 알면 실로 무시무시하다.
전원 최하 익스퍼트.
전원 각성을 받은 능력자.
전원 그리폰 라이더.
거기다 이들을 이끄는 발레리아는 순수한 기사로서의 기량만 해도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고작 300명이지만 순수 전력만 보면 검은 바람이 이끄는 투란 전사단과 더불어서 화이트 공국 최대의 전투력을 보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300의 병력이 하늘에서 공격해 오면 지방 영주가 이끄는 수천 단위의 병력은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서 후퇴해 봤자 아리시아와 그 부하들이 구성한 포위망을 벗어날 수는 없고 결국 전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하면 되겠죠?”
“그렇지. 이대로 적에게 병력과 물자가 지원되지 않게 길목을 끊어 버려. 특히 물자를 대거 지참한 병력을 집중적으로 노려 줘.”
“우리 애들한테 말해서 그렇게 수색하라고 할게요.”
“좋아. 그럼 바로 또 움직이자.”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는 본격적으로 루마니스 제국의 보급선을 휘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