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화살 싸움에서 수성하는 쪽이 위축되면 공성하는 입장에서는 핵심 병력을 성벽 가까이에 접근시킬 수 있다.
“마법 전단 사정거리 안에 접근했습니다.”
“좋다. 시작하라.”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성벽 위에서도 마법사들이 캐스팅에 집중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화살과 투석 공격을 집중했고 몇 발의 마법도 날아왔다.
퍼엉! 쾅!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마법사들이 준비한 실드에 막혀 버렸다.
마법 전단의 병력을 둘로 나눠서 절반은 공격 마법을 영창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이 방어 마법으로 보호하는 것은 정석 중에 정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파이어 볼!”
“파이어 애로우!”
“멀티 붐!”
마법사들의 공격이 일제히 성문을 향해서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여러 개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성문에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이런 요새의 성문에는 대마 방어 결계가 인챈트되어 있는 게 보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만능은 아니다.
너덜너덜해진 성문이 그대로 박살이 나면서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자 고르시파 왕국군은 최강의 카드를 꺼냈다.
“기사단 돌입! 나를 따르라!”
“우오오오오오!”
던전 공략자 빅토르 폰 고르시파. 그리고 그가 직접 양성한 왕실 근위 기사단이 뻥 뚫린 성문을 통해서 요새 안으로 진입하였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빅토르가 앞장서서 성내로 돌입한 순간, 이미 성내의 수비 병력은 그 의미를 상실했다.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려라!”
빅토르는 큰 목소리로 외쳤고 결국 보고톨 요새는 버티지 못하고 고르시파 왕국군의 손에 떨어졌다.
단 하루의 공성으로 바로 요새를 함락시킨 고르시파 왕국군은 단번에 사기가 올랐다.
원래 병사들 중에는 루마니스 제국이라는 이름 앞에 알게 모르게 겁을 먹고 위축된 이들도 있었다. 그런 병사들이 압도적인 승리 한 번에 고취된 것이다.
빅토르는 그런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술을 풀고 사냥을 해서 고기를 굽게 했다.
덕분에 병사들은 이미 전쟁에서 이긴 거나 다름없는 것처럼 사기가 올라가 버렸다.
자신감은 좋은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일의 결과가 달라질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만감이라는 선을 넘지 않을 때의 일이다.
첫 전투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두고 빅토르는 생각했다.
‘루마니스 제국군이 이 정도로 약하다면 좀 더 과감하게 공격을 해도 좋지 않을까?’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요새를 점령했으니 이후에 합류하는 원군을 기다려야 했다.
엘파소 왕국과 미들랜드 왕국의 원군을 기다려서 그들과 합류한 다음 대군을 편성해서 루마니스 제국의 남부를 넓은 범위에서 차근차근 압박하려고 했다.
하지만 빅토르는 그전에 자신들이 먼저 치고 나가서 제국에 공격의 쐐기를 박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고 루마니스 제국을 상대해 보니 생각보다 약했기에 이런 판단이 든 것이다.
그런 빅토르의 판단에 자신감이 넘치는 가신들도 찬성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전하.”
“전쟁은 기세가 중요한 법이죠. 지금 아군의 사기가 최대치로 올라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군을 몰아서 유간스크 요새를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킬 수 있을 겁니다.”
신하들도 자신의 의견에 찬동을 하자 빅토르는 망설이지 않고 군을 움직였다.
“야밤을 틈타서 군을 움직인다. 혹시라도 적이 대응하지 못 하게 하라.”
“예, 전하.”
그렇게 빅토르의 군세는 야심한 시간을 틈타서 다음 관문인 유간스크 요새로 진군을 시작했다.
혹시라도 적의 정찰 부대에 이목을 끌까 봐 무기에는 잿가루를 바르고 횃불도 밝히지 않은 상태로 은밀하게 이동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훤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놀랍군. 이건 정말 놀라운 아티팩트야.”
바라빈 케메로 후작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야심한 시각에 은밀하게 이동하는 빅토르의 군세를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심지어 빅토르가 그 군세의 어디에 위치해서 이동하고 있는지도 선명하게 말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손에 있는 작은 도구 때문이다. 두꺼운 안경처럼 생긴 이 도구의 이름은 적외선 투시경이라는 도구였다.
원 어스 클랜이 제국의 황제에게 진상한 도구 중에 하나로, 그들은 이것을 던전에서 발굴한 보물이라고 했다.
이 도구를 사용하면 칠흑처럼 어두운 야밤에도 적의 모습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처럼 달빛 하나 없는 밤에서조차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말이다.
‘잘하면 빅토르가 뭐라고 말하는지 입 모양도 읽을 수 있겠군.’
바라빈 케메로 후작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충분한 전력의 군을 편성하고 오느라고 군의 출발이 조금 늦었고, 그로 인해서 제국의 관문 요새라고 할 수 있는 보고톨 요새가 함락당했다.
하지만 전쟁에 경험이 풍부한 케메로 후작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멀리 군을 숨긴 채로 다가와서 적의 행적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빅토르가 성급하게 군을 움직인 지금, 그는 이 순간이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마법사.”
“예, 후작님.”
“지금 당장 아군에게 연락해서 작전을 지시해라. 고기가 그물에 걸렸다. 포인트 A에서 작전을 진행한다.”
“예, 후작님.”
그렇게 지시를 내린 케메로 후작은 다시 적외선 망원경으로 빅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는 던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 주마.”
* * *
고르시파 왕국이 이동하는 경로에는 좌우에 무성한 갈대밭이 자라 있는 늪지대가 있었다.
이 늪지대는 시야의 확보가 어렵고, 발밑이 질척거려서 병사들이 이동하기가 까다로웠다.
“제길, 신발이 다 젖었네.”
“그러게 말이야. 안에 양말까지 푹 젖었어.”
“쯧, 말 타고 있는 기병들이 부럽네.”
병사들이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행군을 하는 도중 그들의 앞에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마치 아침 해가 떠오른 것처럼 갑자기 밝아진 그것은 태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습이다!”
적의 마법사들이 발사한 공격 마법이었다.
콰콰콰콰쾅!
시작부터 거창하게 터진 공격 마법에 고르시파 왕국군의 전방의 병력들은 크게 피해를 입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무방비로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길, 기습이다.”
“대응하라. 전열을 갖추고 공격하라.”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을 캐스팅해라. 서둘러!”
고르시파 왕국군의 지휘관들을 서둘러서 명령을 내리며 군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늪지대에서 병사들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굼떴고 그 와중에 적의 공격까지 더해지니 지휘관의 지시가 먹힐 리가 없었다.
그들이 전열을 갖추지도 못하는 사이 적의 공격은 제2파가 날아왔다.
“제길, 마법사!”
지휘관은 날아오는 마법을 보며 다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다시 폭발하는 마법…….
콰아아앙!
첫 번째 공격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 터진 공격에 고르시파 왕국군의 병사들은 다시 한번 엉망으로 당하고 말았다.
몇몇 마법사들이 급하게 캐스팅을 해서 실드를 쳤지만 전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펼친 실드를 군을 넓게 보호하지 못했고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방어 막 사이로 적의 공격 마법이 작렬한 것이다.
“제길…….”
지휘관은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때…….
“모두 비켜라!”
그 난감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영웅이 치고 나갔다.
바로 빅토르였다.
그는 단신으로 검에 찬란한 오러를 두르고 적들이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질척거리는 늪지대의 환경 따위는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가 적에게 도착해서 길게 검을 휘두른 순간…….
콰차아앙!
커다란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마법사들의 실드가 일순간에 박살 나 버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설치느냐!”
빅토르는 바로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서 자신의 군에 기습을 가한 루마니스 제국의 마법사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용감무쌍하게 검을 휘두르는 빅토르를 누가 막겠는가?
못 막는다.
그래서…….
“전원 후퇴하라!”
“산개! 흩어져라!”
“각자 후퇴해서 정해진 포인트에 재집결한다.”
그래서 루마니스 제국군의 마법사들은 사방으로 날아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쥐들 같으니라고!”
빅토르는 노성을 터트리며 그런 마법사들 몇몇을 쫓아가서 베어 버렸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흩어져서 도주하는 마법사들을 모두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
빅토르는 그 와중에 최선을 다해서 적 마법사단을 쫓아갔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케메로 후작이 바라던 바였다.
빅토르가 마법사들을 쫓아서 멀리 추적하고 그런 빅토르를 호위하는 근위 기사단도 그런 빅토르와 함께 추적에 합류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고르시파 왕국의 핵심 전력이 본진의 정방으로 집중되는 것이다.
그 틈을 노리고 케메로 후작이 이끄는 루마니스 제국의 본군이 고르시파 왕국군의 배후를 쳤다.
“지금이다. 공격하라!”
“침략자들을 물리쳐라!”
“와아아아아아!”
고르시파 왕국군의 배후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난 루마니스 제국군의 주력 부대는 전열도 갖추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의 고르시파 왕국군의 후방을 몰아쳤다.
고르시파 왕국군의 일선 지휘관들은 그런 적들의 공격에 저항해서 어떻게든 군을 정비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루마니스 제국군의 매복은 그 정밀도가 너무 높아서 마치 아군의 상황을 훤하게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고르시파 왕국군은 가장 당해서는 안 되는 일격을 당하고 만다.
“군량을 태워라!”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라.”
고르시파 왕국군의 군량 수송 마차를 정확하게 찾아낸 루마니스 제국군은 망설이지 않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고르시파 왕국군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어떻게든 군량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후작님, 대성공입니다.”
“좋다. 그럼 우리는 이만 후퇴한다. 무서운 호랑이가 오고 있으니 말이야.”
“예, 후작님.”
케메로 후작의 명령에 부관은 피리를 불어 후퇴 신호를 보냈고, 루마니스 제국군은 썰물 빠지듯이 그대로 물러나 버렸다.
빅토르가 서둘러서 돌아왔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그저 막심한 타격을 받은 아군을 멍하니 바라볼 뿐인 빅토르에게 근위 기사 한 명이 다가와서 말했다.
“전하, 이대로는…….”
“알고 있다.”
빅토르는 침통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물러나도록 하자. 일단 대열을 정비해야 한다.”
“예, 전하.”
그렇게 빅토르가 이끄는 군세는 발을 돌려 보고톨 요새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