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빅토르가 카일에게 말했다.
루마니스 제국에 위험 요소가 있다면 뒤에서 공작을 하는 것만으로는 무리가 있다.
뱀을 꺼내기 위해서는 결국 풀숲을 헤집어야 하는 법.
빅토르는 자신들이 먼저 루마니스 제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일은 너무 과격한 주장에 일단 망설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전쟁을 먼저 시작하기에는 명분이 없지 않은가?
명분 없이 무작정 일으키는 전쟁은 그 승산이 희박하다.
세상 어느 나라가 명분 없는 침략자의 전쟁을 돕겠는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키면 사방에 적을 만들어 다구리 맞기 딱 좋다.
그러나 그런 카일의 염려에 빅토르는 웃으면서 말했다
명분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으며 아군이 되어 줄 나라도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얼마 후 빅토르가 루마니스 제국에 선포했다.
[나의 부친이자 한때 루마니스 제국에 충성을 바쳤던 안토르 루이드 고르시파 후작의 죽음에 대해서 루마니스 제국의 해명을 요구한다.
당시 부친께서는 무고한 모함을 당하셔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나의 모친과 형제 사촌들까지 루마니스 제국의 병사들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나 빅토르 폰 고르시파.
일국의 왕이 되어 일가를 이루었으나 부친의 억울함을 밝히지 못하여서야 어찌 가문이 명예를 되찾았다고 하겠는가?
루마니스 제국은 나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납득할 수 있는 답을 해 주기 바란다.
그 답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나는 자력으로 선친의 억울함을 갚을 것이다.]
라는 내용의 선포였다.
이 선포는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에게 직접 보내졌으며 그 내용을 필사해서 전 대륙에 퍼트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루마니스 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이건 시비나 다름없습니다.”
“감히 우리 루마니스 제국을 어찌 보고 이런 무도한 짓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들은 일제히 들고 있어 났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빅토르의 선포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고르시파 후작가의 몰락은 사실 누명이 맞다.
정치적인 정쟁에서 밀려서 힘을 잃어버린 고르시파 후작가를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해서 당시 귀족들이 황제의 묵인하에 모반의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 결과, 고르시파 후작가는 멸문당했고 그들의 재산과 영지는 당시 음모를 꾸민 귀족들이 나눠서 가졌다.
하지만 말이다.
진실이 뭐든 간에 루마니스 제국의 입장에서.
[그래. 과거에 우리가 잘못한 게 맞다. 사과를 표하며 원한다면 어떠한 보상이라도 해 주겠다.]
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막말로 빅토르가 과거 후작가의 영지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타국의 귀족이 된 고르시파 후작가에 영지를 돌려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 나가서 빅토르가 과거 음모를 꾸민 귀족들에게 피의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 사건에 연루된 귀족들은 백작 이상의 굵직한 귀족들만 해도 열 명이 넘고 자잘한 귀족들까지 합치면 백 명은 넘을 것이다.
그 귀족들 전부 목을 쳐서 빅토르에게 넘기는 것은 제국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이건 억지입니다. 전대 고르시파 후작은 모반을 꾸민 반역자였소.”
“감히 반역자의 후예가 살아남아서 제국에 이빨을 보이다니…….”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싱카라 연합 제국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합시다.”
배 째, 우리는 몰라.
이게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들이 보이는 태도였다.
그리고 제국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는 이해가 일치한 황제 역시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빅토르 폰 고르시파 국왕은 들어라.
짐은 모험가로서 그대가 이룬 찬란한 업적을 존중하며 현재 싱카라 연합 제국에서 그대가 받고 있는 국왕의 직위 역시 인정한다.
하나, 나의 신하였던 그대의 부친에 대한 처우를 이제 루마니스 제국의 소속도 아닌 그대가 따지고 든다는 것은 엄연한 내정 간섭이다.
그 사건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진실이 밝혀진 사실이며 당시 고르시파 후작은 감히 욕심내서는 안 될 과욕을 부렸다.
그 대가로 그대의 가족들이 형벌을 받은 것이니 여기에 관해서 억울함을 표하지 말지어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짐과 제국을 향한 무례에 대한 사과를 한다면 양국은 지난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향해서 손을 잡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
아지무트 시비르 갈프슈타인 루마니스.]
짧게 말하면 과거는 잊어라. 그럼 이번의 무례는 잊어 주겠다, 라는 황제의 의지 표명이었다.
여기에 빅토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전쟁이다!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예. 전하!”
빅토르 폰 고르시파는 바로 군사를 일으켰고, 과거 스톰 클랜 시절부터 빅토르를 섬겼던 고위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전쟁에 맞춰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고르시파 후작 가문의 가신 출신이었던 만큼 전대 가주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빅토르는 바로 7만의 군대를 일으켜서 루마니스 제국으로 진격했다.
이 급진적인 군사 행동에 루마니스 제국은 경악했지만 그들은 일단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움직였다.
고르시파 왕국은 결국 싱카라 연합 제국이라는 거대한 연합체의 일각에 불과하며 심지어 루마니스 제국과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도 않다.
그런 나라에서 단독으로 군사 행동을 해 봤자 싱카라 연합 제국의 다른 아홉 명의 군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전쟁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빅토르에게 이 전쟁의 계기는 카일이 가져온 원 어스에 대한 정보 때문이었지만… 루마니스 제국에 대한 증오와 원망은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었다.
당연히 이 전쟁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이다.
고르시파 왕국에서 루마니스 제국으로 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지나야 하는 엘파소 왕국.
그 나라에서 먼저 의지를 표했다.
[싱카라 연합 제국의 일원으로서 억울한 부친과 가족의 죽음을 위해서 군사를 일으킨 빅토르 폰 고르시파 국왕의 행위를 적극 지지한다.
또한 본국은 연합의 일원으로서 이 정의로운 전쟁에 참전해서 대륙의 정의를 바로 세울 것이다.]
라는 선포를 하더니 동시에 5만의 지원군을 움직여서 빅토르를 지원했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고르시파 왕국의 북쪽, 엘파소 왕국의 동쪽에 위치한 미들랜드 왕국. 그 나라 역시 똑같은 시기에 참전 의지를 밝혔다.
[우리 미들랜드 왕국 역시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선포한다.
크게는 대륙의 정의와 연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며 작게는 빅토르 폰 고르시파 국왕의 명예를 위해서 싸울 것이다.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는 정의를 외면하고 스스로의 양심을 속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7만의 군사를 모집해서 보냈다. 이로써…….
고르시파 왕국 7만.
엘파소 왕국 5만.
미들랜드 왕국 7만.
총 19만의 대군이 루마니스 제국의 남쪽 영토를 향해서 진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야 루마니스 제국은 황급하게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외교적인 행동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싱카라 연합 제국의 국가 중에 흔히 남부 3국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국가가 참전했다.
나머지 일곱 개의 나라들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지만 그들도 상황이 자국에게 유리해진다면 서둘러서 참전할 것이 뻔했다.
“폐하. 불길이 커지기 전에 적국을 눌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강건함을 보여주시옵소서.”
신하들의 성토에 제국의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은 전쟁이란 말인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거늘…….”
현 황제의 한탄에 신하들 중에 절반은 고개를 숙였고 절반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 황제 아지무트는 아직 젊은 황제다. 황위에 오르고 3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나이도 이제 20대 중반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다기보단 신중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 황제였다.
자신이 제국의 황제라는 자각을 잘 가지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결정할 때도 독단으로 하기보다는 신하들을 모아서 의견을 구하는 것을 우선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한 것이다.
이번에 빅토르가 군사를 움직였을 때도 황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선 싱카라 연합의 다른 국왕들에게 외교사절을 파견해서 전쟁을 무마하는 쪽으로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외교적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이제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폐하, 신에게 맡겨 주신다면 싱카라 연합의 침략자들을 일거에 쓸어 버리겠습니다.”
황제의 앞에 나서서 자신감 넘치게 외친 인물은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 있는 중장년의 남자로, 주름진 얼굴과 달리 온몸의 근육에는 탄력이 가득해서 제복 사이로도 찢어질 것처럼 부풀어 있는 것이 드러나는 인물이었다.
척 봐도 강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바라빈 케메로 후작.
루마니스 제국이 자랑하는 강자다.
마스터 최상급의 경지로 알려진 그는 겉으로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120세가 넘은 노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루마니스 제국 군부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등장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작이라면 믿을 수 있소. 하지만 적인 빅토르는 던전 공략자로 이름난 강자이거늘, 괜찮겠소?”
“폐하. 빅토르가 개인적인 경지로는 저보다 강자일지 모르나 전쟁의 승패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살면서 진정한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애송이에게 진짜 전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말에 황제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후작을 믿고 전군의 병권을 맡기겠소. 그대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병력을 구성해서 적들을 맞아 싸우시오.”
“예, 폐하.”
그렇게 해서 루마니스 제국의 바라빈 케메로 후작이 총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적을 맞이해서 싸우러 나갔다.
* * *
“돌아왔군. 드디어 돌아왔어.”
루마니스 제국의 국경을 넘은 순간 빅토르는 감개가 무량한 느낌을 받았다.
어린 시절, 가문이 누명을 쓰고 멸망했을 때 어린 빅토르는 가신들의 품에 안겨서 도망치듯이 루마니스 제국을 떠나야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장성하고 일국의 국왕이 되어서 이 나라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보고 있는가? 나의 벗들이여…….”
빅토르는 하늘을 보고 중얼거렸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정말 수많은 충신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빅토르는 그들을 벗이라 부르고 가족처럼 여겼다.
단순하게 가신이라고 칭하기에는 그들이 보여준 헌신과 충성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보고 있게. 반드시 가문의 치욕을 씻어서 그대들의 충성에 보답할 것이야.’
그렇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빅토르는 군사를 이끌고 첫 번째 관문 요새로 향했다.
“저기가 보고톨 요새인가?”
“예, 전하. 평소에는 2만가량의 병사들이 상주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음, 전략은?”
빅토르의 질문에 참모를 맞은 젊은 귀족이 말했다.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는 저희들 입장에서는 정공법이 최고입니다. 병사들을 시켜서 요새를 포위하고 전투 마법사들에게 성문을 파괴하게 한 후 기마를 돌입시키면 반나절 안에 요새를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바로 전투에 돌입하라. 휴식은 저 요새를 무너뜨린 후에 하겠다.”
“예, 전하.”
곧 빅토르가 이끌고 있는 7만의 대군이 루마니스 제국의 국경 요새 보고톨을 포위했다.
그리고 포위망을 마치기 무섭게…….
“공격하라!”
“오오오오오!”
사방에서 고르시파 왕국의 병사들이 성벽을 향해서 달리고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도 화살이 날아와서 저항을 했지만 성벽 아래에서 날리는 화살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성벽이 가져 주는 고저 차의 이득이 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