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빅토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라면 난 절대로 그 마수를 이길 수 없었네.”
“이겼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합격했다는 게 맞겠지.”
“합격이라고요?”
“그래. 왜냐하면 그 마수는…….”
빅토르는 그 순간을 다시 설명했다.
* * *
꼬박 하루 이상 걸린 전투에서 빅토르의 검이 마침내 펜닐의 몸을 꿰뚫었다.
거대한 오러 소드가 펜닐의 심장을 꿰뚫었고 마침내 거대한 마수는 몸을 바닥에 뉘었다.
쓰러진 펜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하구나. 이 몸이 글레이프닐에 봉인되어 있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설마 인간의 몸으로 나를 이길 정도의 힘을 쌓아 올렸다니.
빅토르는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며 되물었다.
“힘이 봉인된 상태라고? 지금 이 상태가?”
―후후후, 그렇다. 아쉬운가?
“아쉽다기보다는 끔찍하군. 괴물 같은 놈.”
빅토르는 질려 버렸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자신이 있었다.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 그 너머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이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던전의 최하층의 문을 용감하게 두들겼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그런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서 싸운 상대가 힘을 봉인당한 상태였다니.
‘힘이 쭉 빠지는군.’
그런 빅토르에게 펜닐이 말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인간에게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 빅토르. 그대는 영웅이다
“…….”
대답 없는 빅토르에게 펜닐이 말했다.
―영웅이여. 그대는 시련을 이겨냈다. 그 보상으로 던전의 보물과 영광은 모두 그대의 것이 되었다.
“그거 고맙군.”
―그리고 나를 이긴 남자에게 보상으로 하나의 예언을 해 주지.
“예언이라고?”
펜닐은 빅토르에게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너의 야망을 이뤄줄 존재가 너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를 우대한다면 너의 야망은 순풍에 돛을 단 범선처럼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다.
“그건 반가운 예언이군.”
―하지만 그 존재는 훗날 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때 그 시련을 외면한다면 너와 너를 둘러싼 모든 것에 파멸이 찾아올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봐!”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정해진 운명에 마음껏 저항해 봐라. 인간. 그게 너희들의 특권이니까.
그리고 펜닐의 몸은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 * *
빅토르의 설명을 다 들은 카일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혹시, 그래서였습니까? 장인어른께서 저를 철저하게 믿어 주신 이유가 그 예언 때문이었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런 것도 있지. 사실 처음에는 그 마물이 말한 예언의 대상이 자네라고 확신하지도 않았네. 알다시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자네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지 않나?”
그 말은 사실이다.
카일과 빅토르가 처음 만났던 시점 빅토르는 이미 던전 공략자의 칭호를 받은 영웅이었고 카일은 그냥 돈 좀 잘 버는 사업가에 모험가 클랜장일 뿐이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격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확신하게 됐지. 자네가 바로 예언의 주인공이라고 말이야.”
“…….”
카일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고르시파 왕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카일은 빅토르가 나라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게 큰 역할을 했다.
지금 당장만 해도 화이트 공국이 고르시파 왕국과의 중계 무역을 끊어 버리면 고르시파 왕국의 재정이 파탄 날 지경이니 말이다.
빅토르는 말을 이었다.
“예언에 따르면 자네가 나에게 시련을 가져온다고 했지? 그리고 그 시련을 거부하면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고 했어. 지금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나?”
“그건 그렇군요.”
세게 정부를 그냥 내버려 두면 그때는 고르시파 왕국이나 화이트 공국이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끝장날 것이다.
카일은 세계정부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다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세계정부가 이쪽 세계를 점령한다면 기존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과연 인간으로 취급할지도 의문이다.
초능력자조차도 인간이 아닌 도구로 취급하는 그들이 이세계의 사람들의 인권을 인정할까?
역사적으로 봐도 신천지의 개발은 막대한 성공과 재화를 보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대량 학살을 당한 원주민들의 죽음도 있었다.
애당초 빅토르의 입장에서 이 시련을 거부하고 말 것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나는 자네에게 협력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하겠나?”
빅토르의 말에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싱카라 연합 제국 전체를 움직이는 건 나중에라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가능하면 루마니스 제국과의 전쟁 자체는 피하고 싶으니까요.”
“너무 소극적이군.”
“예?”
“전쟁을 피하고 싶다고? 자네, 이 위기가 우리 세계 전체의 위기라는 자각은 가지고 있나?”
“어… 예. 그건…….”
“너무 소극적이야. 이니 루마니스 제국 안에 그 세게 정부라는 놈들이 어디까지 손을 뻗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 이 무슨 소극적인 대처란 말인가?”
“…….”
“이건 전쟁이야.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미래가 걸린 전쟁. 그런데 그렇게 안일한 대처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빅토르의 꾸중에 카일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인어른께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걸 해야지.”
“가장 중요한 것요? 그게 뭡니까?”
카일의 물음에 빅토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선빵.”
* * *
루마니스 제국의 어느 심처.
그곳에서 세 명의 남자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썩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말이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지?”
“무능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능할 줄은 몰랐군.”
지금 이 자리는 세 명 중에 두 명이 다른 한 명을 일방적으로 갈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갈굼을 당하는 남자의 이름은 제이.
세간에는 원 어스라는 유망한 클랜을 이끌고 있는 클랜장으로 알려진 남자다.
그 실상은 전송 장치의 기동을 위한 에너지 확보를 위해서 이 세계로 파견된 세계정부의 인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두 명을 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별것 아닌 일이야. 그냥 쥐새끼 몇 마리 놓친 것 가지고 네놈들에게 이렇게 갈굼받아야 하나?”
“그 말, 대령님 앞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나?”
그 말에 제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움찔했다.
세계정부에서 이 세계로 파견한 간부들은 네 명.
그중에 세 명은 자신을 포함한 소령 직급의 실무진이고 그런 자신들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대령급 한 명을 보냈다.
같은 임무를 맡아서 이세계로 부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얼굴도 본 적이 없고 이름도 모른다. 그저 간접적으로 지시만 받았을 분.
하지만 그에 관해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부하의 실패를 용인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제이 자신이 이 세계로 부임한 것도 전임자가 실수를 책임지고 경질되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정부에서 말하는 경질이라는 단어는 그 대부분이 처분을 뜻하는 것이다.
세계정부는 능력이 부족한 인재를 용서하고 품어주며 성장하기를 기다려 줄 정도로 인내심이 깊은 단체가 아니다.
‘제길, 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에……. 이게 다 그 무능한 놈들 때문이야. 임무가 끝나면 전부 다 처분해 버리겠어.’
제이는 AP―55248을 비롯해서 자신이 내린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초능력자들을 탓했다.
그때 밀실에 있는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면서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는 남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모두들 모여 있나?
“충성!”
“충성!”
“충성!”
세 명의 소령들은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군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쉬어.
모니터의 목소리가 대답을 하자 세 명은 경례를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정기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제이.
“예. 대령님.”
―죽고 싶나?
무심한 한 마디에 제이의 비대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죄송합니다. 제 밑에 녀석들이 큰 실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반드시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이라…….
모니터 속의 인물은 피식 웃더니 제이 옆에 있는 다른 두 명에게 말했다.
―케이, 제트, 최근 근황을 보고 해 봐라.
“예. 화이트 공국에서 던전에서 나오는 코어의 매입 가격을 두 바로 올렸습니다. 그래서 당초보다 에너지원 확보가 크게 느려졌습니다.”
“원 어스 클랜에 물품을 납품하는 상인이나 거래하던 귀족들을 대상으로 뒤에서 은밀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상으로 흔적을 찾으려고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둘의 말을 들은 모니터 속의 존재가 말했다.
―보다시피 이렇게 됐군. 제이, 네놈의 어설픈 일 처리 때문에 적들이 우리를 방해하고 나섰다.
“그… 그건…….”
―계속 들어라. 심지어 놈들의 방해 중에 코어의 매입을 방해하는 활동이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
―적들은 우리의 목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는 말이다. 네가 놈들을 놓친 덕분에 말이다.
“…….”
제이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모니터 속의 남자가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다시 말해 봐라. 네놈이 어떻게 책임을 질 거지?
“그, 그것은…….”
제이는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런 제이의 모습에 모니터 속의 남자가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서 말했다.
―스스로 만회할 방법도 없으면서 책임 운운한 것이냐? 너희들 2급 국민은 그래서 무능하다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부들부들 떠는 제이를 향해서 모니터 속의 남자가 말했다.
―케이, 화이트 공국의 매점으로 인해서 확보에 지장이 생긴 에너지 코어는 얼마나 되지?
“자세한 것은 추산해 봐야 알겠지만 최대 30% 정도는 떨어진 것 같습니다.
―전송 장치의 수치로 변환하면 어느 정도인가?
“12만 에네르기 정도는 될 듯합니다.”
―제이, 네놈의 사재를 모두 처분해서라도 그 에너지를 메워라. 이쪽 세계에서 확보한 재산에 지구의 재산까지 모두 처분해서다.
“대령님, 그러면 전…….”
―싫으면 죽든가.
가혹한 양자택일에 제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하고 선이 닿아 있는 귀족들을 화이트 공국에서 조사한다고 했던가?
“예, 대령님. 화이트 공국의 인물로 추정되는 이들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화이트 공국이라. 미개한 놈들이 제법 눈치가 빠르군.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들 중에 자잘한 잔챙이들은 정리해 버려라.
“정리라 하심은 처분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렇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요원을 파견해서 화이트 공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라. 놈들이 우리를 적대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든 것은 위대한 하나의 세계를 위해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이 세계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예! 대령님.”
“예! 대령님.”
“예! 대령님.”
모니터가 꺼지며 그들의 회의가 끝났다.
어쨌든 세계정부는 화이트 공국이 자신들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진위를 조사하려고 했다.
과연 그들이 어디까지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 * *
빅토르와 만남을 가진 후 화이트 공국으로 돌아온 카일은 부하들에게 말해서 한층 더 군사력의 증진에 매진하게 했다.
“전쟁이 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라.”
“예, 주군.”
검은 바람은 카일의 지시에 변화가 생긴 것을 감지했다.
빅토르와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카일의 주문은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높으니 거기에 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전쟁이 멀지 않았으니 훈련에 박차를 가하라고 했다.
그리고 카일 자신도 하루에 최대한 많은 은총을 내리며 능력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화이트 공국의 최대 전력은 카일이 각성시킨 능력자들이니 말이다.
“에이라, 현재 공국 내 군사력 총 개요도를 정리해서 보고해 줘.”
“이미 했어요. 보여 드릴까요?”
카일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에이라는 서면으로 정리된 서류를 내밀었다.
[투란 전사단―대장 검은 바람.
능력자 500, 비능력자 20,000]
[장미 기사단―단장 발레리아 드 스콧.
능력자 300, 그리폰 300]
[탐색대―대장 아리시아.
능력자 800, 비능력자 2,200]
[마법 전단―대장 시드 테일러
능력자 100, 비능력자 200]
[일반 병사―총사령관 호크.
능력자 3,000, 비능력자 100,000]
“일반 병사가 10만? 우리 군사력이 이 정도로 늘었나?”
카일의 말에 에이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돈 많이 벌었잖아요? 그럼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래도 10만이라니.”
“역사적으로 봐도 국가가 뒤통수 세게 안 맞으려면 병력이 10만은 있어야 하거든요.”
국가의 대소사를 에이라에게 전담시켜 놓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렇게 예쁜 짓을 해 놓은 줄은 몰랐다.
덕분에 카일은 앞으로 있을 전쟁에 자신감이 생겼다.
빅토르의 의견이 너무 과격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준비는 만전이었다.
‘좋아. 해 보자.’
카일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모두들 준비해라. 전쟁이다.”
“예,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