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카일이 말했다
“정리하자면… 적의 목적은 던전에서 확보한 코어와 전송 장치로 더 많은 전력과 물자를 이 세계로 전송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검은 바람의 질문에 카일이 대답했다.
“놈들의 목적을 철저하게 방해하면 된다. 던전 활동을 방해하고 몬스터의 코어를 채취하는 것을 방해해야겠지. 그리고 더 나가서 전송 장치를 찾아서 파괴한다. 만약 전송 장치를 전부 파괴할 수 있다면 양쪽 세계의 연결을 분단시켜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던전의 몬스터 코어. 그리고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전송 장치.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공략하자는 게 카일의 작전이었다.
“레이븐.”
“예. 주군.”
“원 어스와 그에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라. 놈들의 뒤를 봐주는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이 누구인지, 거래를 하는 상단이 어디인지까지 모두 조사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송 장치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게 된다면 바로 보고해라.”
“예, 알겠습니다.”
“발레리아. 검은 바람.”
“예, 주군.”
“말씀하십시오.”
“너희 둘은 기사단과 병사들의 조련에 박차를 가해라. 이번 사태가 매끄럽게 풀리지 않을 경우…….”
카일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군사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려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주군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카일은 아리시아를 불렀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그녀 역시 탐색대라는 전속 부하들이 있고 자신의 전투력도 만만치 않은 존재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훈련에서 뺀 이유는 그녀가 부하를 훈련시키는 것에 너무나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일이 ‘부하들을 강하게 만들어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순간 그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하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하들이 죽거나 망가진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카일의 명령이 최우선이기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관직에 안 맞는 것이다.
카일도 그런 아리시아의 성격을 알기에 다른 임무를 맡겼다.
“루마니스 제국 안에서 활동하는 아국의 상단들 전원에게 말을 넣어라.”
“뭐라고 전하면 될까요?”
“코어의 가격을 기존의 두 배로 매입하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몬스터의 코어를 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던전에 들어가서 직접 얻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렇게 채취한 코어를 돈 주고 사들이는 것이다.
과거에는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 코어를 오직 모험가 길드에서 독점적으로 처리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코어에 대한 모험가들의 자율적인 권리를 우선시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상단에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모험가들의 권리가 높아진 것은 카일과 빅토르의 성공 때문이지만 말이다.
“원 어스에서 아무리 코어 채굴에 열을 올린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 물량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거다. 일반 모험가들이 채집하는 코어를 최대한 매집해 버려라.”
“예, 주인님.”
루마니스 제국의 던전에서 나오는 코어를 두 배 가격으로 사들이는 것은 상당한 돈이 필요하겠지만 화이트 공국이 남방대륙의 조나라와 무역으로 얻어내는 막대한 자금을 생각하면 감당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지시를 내린 후 카일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두겠는데, 이것은 미증유의 위기다. 가능하면 최소한의 조치만으로 이 위기를 피해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모두들 만반의 준비를 하기 바란다.”
“주군께서 생각하시는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카일은 조금 눈을 감고 생각하다 말했다.
“루마니스 제국과의 전쟁까지 번질 수도 있다.”
그 말에 모두의 표정에 긴장하는 기색에 역력해졌다.
루마니스 제국과의 전쟁이라면 제국을 따르는 제후국도 참전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싱카라 연합 제국에서도 대응할 테고 결국은…….
“전 대륙이 전화에 휩싸이겠군요.”
레이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카일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카일은 아내인 클레어만을 남긴 후 다른 심복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만약 내가 루마니스 제국과의 전쟁을 주장한다면 장인어른은 내 편이 되어 주실까?”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 다른 심복들을 내보낸 것이다. 클레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아버지의 입장이 있을 테니까.”
“역시 그렇겠지.”
빅토르는 고르시파 왕국의 국왕이자 싱카라 연합 제국을 이끌어가는 10인의 왕 중에 한 명이다.
그가 카일과 개인적으로도 공무적으로도 돈독한 사이긴 하지만 전쟁에 관한 얘기는 또 다른 얘기다.
심지어 상대가 그 루마니스 제국이 아닌가?
‘장인어른 입장에서도 무작정 동의하기에는 힘드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카일에게 클레어가 말했다.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몰라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어요.”
“그게 뭐……?”
클레어는 카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춰서 인사를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카일을 향해서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설령 아버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저는 당신의 편에 있을 겁니다. 화이트 공국의 신하로서, 카일 화이트의 아내로서.”
이것은 그녀의 각오였다. 설령 친아버지와 맞서는 한이 있어도 카일의 편에 서겠노라고 말이다.
“고마워.”
카일은 그녀의 마음에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장인어른을 만나 봐야겠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 * *
킹스 캐슬.
고르시파 왕국의 수도에 직접 발걸음을 한 카일은 바로 빅토르와 독대를 신청했다.
“오랜만이군. 사위.”
“오랜만입니다. 장인어른.”
둘은 서로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사적인 호칭을 사용한 것은 지금 이 자리가 비공식적인 자리라는 둘만의 신호 같은 것이었다.
“앉게. 자네가 찾아왔다고 해서 다소 놀랐네. 내 딸과 손녀는 잘 지내고 있나?”
“예. 클레어는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아이리스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기죠.”
“언제 한 번 데리고 오게. 외할아버지가 되어서 손녀 얼굴 좀 보겠다는데 야박하게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다음에는 꼭 데리고 오겠습니다.”
둘은 그렇게 서로 웃으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빅토르가 먼저 이번 만남의 목적을 물었다.
“이제 슬슬 이 갑작스러운 방문의 목적을 듣고 싶군.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그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몹시 나쁜 소식입니다.”
“흐으음, 조나라와의 외교 무역에 문제라도 생겼나?”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죠.”
“…무슨 일인가?”
빅토르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표정을 진중하게 가다듬었다.
카일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최근 루마니스 제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원 어스라는 클랜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 내 귀에도 소식은 들려오더군. 잘하면 그 클랜에서 던전 공략자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어.”
“놈들에 관한 얘기입니다. 믿기 힘든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일단 들어 주시겠습니까?”
“말해 보게.”
그리고 카일은 이세계의 존재와 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세계정부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목적과 지금 원 어스 클랜의 위험성까지 모두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빅토르는 그 설명을 다 듣더니 자신의 앞에 있는 차를 한입에 들이켰다.
“다 식어 버렸군.”
“제 말이 믿기 힘든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빅토르는 손을 들어서 카일의 말을 제지하며 말했다.
“자네, 우리가 사는 세상 말고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고, 그들이 우리 세계를 침공하려고 하고 있으며 원 어스 클랜은 침략의 첨병이라는 말 아닌가?”
‘역시 못 믿는 건가?’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카일이 생각해도 빅토르가 쉽게 믿기에는 어려운 얘기였다. 말하는 인물이 카일이 아니었다면 일국의 왕을 거짓으로 희롱하려는 미친놈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그때 빅토르가 카일에게 말했다.
“자네 말대로라면 이건 보통 위급한 상황이 아니군. 말 그대로 우리 세계 전체의 위기야.‘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믿네.”
카일은 빅토르의 단호한 대답에 오히려 놀랐다.
카일의 심복들의 경우 카일의 말이라면 흰 것을 검다고 해도 믿을 이들이다. 그러니 그들을 믿고 말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빅토르가 자신의 말을 이렇게 선뜻 믿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의외인가?”
“예. 솔직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딸이 선택한 남자를 믿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내가 자네 말을 믿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네.”
빅토르는 쓰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말넹씀이십니까?”
“그래.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던전 공략자인 건 알고 있지?”
“그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훗,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내가 던전을 공략하고 나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봤는지를 아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지.”
“…….”
“자네한테 가르쳐 주지. 던전 공략자가 짊어진 숙명을 말이야.”
그리고 빅토르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과거를 얘기해 주었다.
* * *
바이에른의 던전 최하층.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도달한 적이 없는 그전인 미답의 마경에 빅토르는 도달했다.
“주군, 가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그 과정은 처절했다.
고르시파 가문이 사라진 후에도 충성을 다 해 준 충신들이 목숨을 바쳐서 빅토르를 위한 길을 열어 주었고, 빅토르는 그들의 목숨을 대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최하층에 도달한 빅토르를 막아선 것은 거대한 검은 늑대였다.
그 늑대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도전자를 보고 말했다.
―내 이름은 펜닐. 사신 로키와 거인 앙그르보다 사이에서 태어난 재앙의 아들이다. 나에게 맞서는 이여. 이름을 밝혀라.
“고르시파 가문의 빅토르 폰 고르시파다.”
―빅토르여. 그대는 나에게 도전한다는 의미를 아는가? 그 숙명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겠는가?
“그딴 건 알 바 아니지. 내 목적은 단 하나다.”
빅토르는 거대한 마수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가문의 재건을 위해서 나를 믿고 목숨을 바쳐 준 충신들에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르시파 가문의 영광을 되찾는 것뿐. 네놈은 그러기 위한 제물이다.”
―영광, 명예, 성공. 그런 부질없는 허상에 혼을 불태우는 게 너희들 인간의 본질이지. 세상이 달라진다고 해도 그건 바뀌지 않으니 신기한 일이야.
“무슨 개소리냐?”
―대화는 이제 됐다. 서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 답은 하나뿐.
펜닐의 거대한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펜닐은 검은 눈동자로 빅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전투의 시작이다. 빅토르.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정면으로 맞으며 빅토르는 검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외쳤다.
“와라!”
그리고 마수와 전사가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