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빌어 처먹을.”
AP―55248의 설명.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를 카피한 노 페이스의 설명을 다 들은 카일은 입에서 욕이 저절로 나왔다.
전생에 끝났다고 생각했던 악연이 이렇게 다시 이어질지는 몰랐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와도 좋다.”
카일의 명령에 노 페이스는 카피했던 인물에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일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 말했다
“노 페이스. 오늘 네가 알게 된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알겠나?”
노 페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명령인 이상 그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비밀을 지킬 것이다.
신전을 나온 카일은 호위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후드까지 깊게 눌러쓴 상태였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냥 걸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도망가는 것처럼 말이다.
천하의 카일 화이트가 이렇게 현실 도피를 하듯이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고 하면 과연 누가 믿을까?
카일이 도착한 곳은 화이트 공국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였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고 노을이 감싸 안은 화이트 공국은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카일이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참 오래도 걸렸지.”
이 세계에 전생하고 나서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서자로 자라다가 모험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던전이 있는 대도시로 향했다.
당시 카일의 손에 있는 건 13골드 80실버가 다였다.
“그 액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도 참 웃긴 놈이지.”
카일은 피식 웃어 버렸다.
13골드 80실버.
지금 카일의 입장에서는 작디작은 금액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서 십수 년에 걸쳐서 눈치를 보며 훔치고, 모으고 수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 그 돈이 카일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만약 도적이라도 만나서 그 돈을 빼앗겼다면 카일은 상실감에 목이라도 매달았을지 모를 정도로 소중한 돈이었다.
그 후에 검은 바람을 만나서 각성시켜서 전력으로 삼고, 그 후에는 아리시아, 발레리아, 레이나, 호크 등등 점점 부하들을 늘려갔다.
그렇게 해서 클랜을 만들고 바이에른에서 상당히 잘나가는 모험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성공했다는 성취감과 풍족한 삶을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
“그때는 참 좋았지.”
이제 남은 평생을 성공한 모험가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빅토르가 그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바이에른 최고의 모험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빅토르가 기어코 던전을 공략해 버렸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던전 공략자로 인해서 바이에른에는 던전이 사라졌고 카일은 순식간에 수입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가 그런 사태를 예상했겠는가?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카일은 과감하게 빅토르와 손을 잡고 그와 한배를 타기로 했다.
그 후에 고르시파 왕국에 오고 나서 카일은 열심히 노력했다.
도적을 토벌하고 해적을 토벌하며 치안을 안정시키고 사이펀 왕국과의 전쟁, 게오르그 왕국과의 협상까지 이루어 냈다.
마침내 해적을 토벌하고, 해역을 장악한 이후 군도에 헤븐 랜드를 만들고, 조나라와의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나라는 발전했고 더 이상 위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다. 이제 남은 인생을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계정부라…….”
카일은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두려움. 혹은 트라우마라고 해도 좋다.
카일은 세계정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KA―98746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 카일은 세계정부에서 철저하게 관리되는 노예, 아니, 노예 이하의 도구였다.
일거수일투족을 제한당했으며 반항하려는 기색이 보이기만 해도 강한 제재를 당했다.
그때의 기억만 생각해도 이가 오만가지 악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분노, 굴욕, 공포.
그 세계정부가 다시 카일의 인생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싸워야 하나?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
카일은 싸우기 싫었다. 싸우기보다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대 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게 카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때 카일의 뒤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해요?”
거기에는 어린아이가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누구니?”
“난 볼고프예요.”
아이는 이 근처의 주민인 듯했다.
“곧 어두워질 시간인데 집에 가렴. 부모님이 걱정하실라.”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까워요. 그런데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하세요?”
“나는…….”
순간 카일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걸까?”
자조감에 헛웃음이 나오는 카일이었다. 그런 카일에게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말했는데, 어른들도 고민이 있을 때가 있데요. 그럴 때는 좋은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니?”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일은 이 아이의 말대로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이었다.
“우리나라의 왕인 카일 화이트 대공님이 해결해 준다고 했어요.”
“뭐? 대공이?”
“예. 엄마가 그랬는데 우리나라의 왕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도적도 막 해치우고, 해적도 막 해치우고. 엄마가 예전에는 먹을 게 없어서 배고팠다고 했는데 지금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것도 대공 전하가 해 주신 거라고 했어요.”
“…….”
“아저씨도 고민이 있으면 대공 전하한테 말씀해 보세요. 그럼 해결해 주실 거예요.”
“대공도 못 하는 게 있단다.”
카일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대공 전하께서는 못 하는 게 없다고 했어요. 그분은 위대한 왕이라고 엄마가 말했어요.”
“…….”
아이의 말에 카일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위대한 왕이라고? 내가?’
카일의 모든 노력은 자신이 잘살기 위해서 한 일들이었다. 더 큰 성공을 손에 넣기 위해서 했던 일들이었고 이 화이트 공국 역시 그런 과정에서 태어난 나라일 뿐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카일이 위대한 영웅이고 든든한 왕이었던 것이다.
카일은 다시 한번 자신의 도시를 자신의 나라를 바라봤다.
눈앞에 보이는 이 거대한 도시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눈빛이 선명해지고 이가 악물렸다.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으로 외쳤다.
‘나는 더 이상 KA―98746이 아니다. 나는 카일 화이트다.’
카일은 과거의 두려움을 이겨내기로 결심했다.
세계정부가 상대라고 해도 이겨내야 한다.
그게 한 나라의 왕으로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 * *
사람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카일의 경우는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깨달음으로 인해서 과거와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로 우선 부하들을 모두 소집했다.
화이트 공국의 재상 에이라 수 화이트.
레테 여신의 수녀인 동시에 복지 관련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레이나.
투란 전사단의 대장이자 카일의 오른팔 검은 바람.
레인저 부대를 이끌고 있는 아리시아.
장미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발레리아 드 스콧.
특수 부대를 이끌고 있는 레이븐.
해븐 랜드의 던전 공략자이자 국가 내의 모험가들을 관리하고 있는 클레어 폰 화이트.
화이트 공국의 사실상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카일은 그들을 모아두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우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최고 중요 기밀 사항이다. 그 점을 명심하고 듣도록.”
카일의 진지한 표정을 본 이들은 모두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카일은 우선 다른 차원의 존재와 그곳에 존재하는 세계정부라는 곳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세계를 침략하려고 하는 이유와 목적까지 모두 차분하게 설명을 마쳤다.
사실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최대한 좋게 봐도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말을 꺼낸 사람이 카일 화이트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해도 카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즉, 다른 차원의 존재도 그 차원을 다스리는 거대한 국가의 침략도 모두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분연하게 일어난 것은…….
“주군, 저에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 원 어스라는 클랜을 싹 쓸어 버리겠습니다.”
카일의 충직한 기사 발레리아였다.
개인적으로는 카일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허락한 애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카일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기도 하다.
주군의 위협이 되는 존재라면 그게 무엇이든 맞서 싸우는 기사의 혼이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 못지않게 전의를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놈들인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는 건데.”
“실수하셨어요. 오라버니. 주인님의 적을 놓치다니 답지 않은 실수를 하셨네요.”
카일이 맞서기로 마음먹은 이상 망설일 이는 여기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전의를 무작정 불태운다고 그게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정확하게 어떻게 싸워서 이길지 방향을 정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중에서 상황을 가장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은 카일의 의동생인 에이라였다.
“일단, 오빠가 하는 말은 믿어요. 그런데 이거 은근히 까다로운 상황인 건 알고 있죠?”
“그래.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카일의 말에 발레리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라 님. 적의 사특한 의도를 알아낸 지금 적을 공격해서 격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망설일 것이 무엇입니까?”
“공격이라……. 어떻게 공격할 건데요?”
“제 장미 기사단에게 맡겨 주신다면 지금 당장 그리폰을 타고 날아가서 원 어스 클랜을 쓸어 버리겠습니다.”
“그 원 어스 클랜은 루마니스 제국에 있어요. 그런데 타국의 영토로 넘어가서 그 나라에 소속된 모험가 클랜을 공격하겠다고요?”
“루마니스 제국도 원 어스 클랜의 사악한 야욕을 말한다면 협력할 것입니다. 다른 세계의 침공이라니, 범국가적인 협력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루마니스 제국에서 우리말을 순순히 믿고 협조를 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믿을까요?”
“…….”
“당신들이 최근 육성하고 있는 원 어스라는 클랜은 이세계에서 온 사악한 침략자들의 첨병입니다. 그러니 공격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고 그들이 믿을까요?”
당연하지만 안 믿을 것이다.
가뜩이나 루마니스 제국과 카일이 소속되어 있는 싱카라 연합 제국은 경쟁 관계다.
적대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륙의 패권을 두고 이런저런 분야에서 경쟁을 하는 사이며 국경 지대에는 항시 군대를 주둔해 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싱카라 연합 제국 소속인 카일이 하는 말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오히려 모함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 세계정부라는 곳은 루마니스 제국의 정계 귀족들에게 상당한 로비를 해서 자기편으로 확보해 두었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원 어스가 루마니스 제국에서 순조롭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권력자들의 협조와 비호도 필요할 테니까요. 최근 모험가를 적극 양성하자는 루마니스 제국의 국가 정책을 고려한다고 해도 원 어스의 성장은 심상치가 않아요.”
에이라는 세계정부가 원 어스의 순조로운 활동을 위해서 여러 가지 수를 써 두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중에서 권력자들을 황금으로 녹여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세계정부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설령 기적적으로 루마니스 제국을 설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설마 원 어스라는 클랜을 쓸어 버리면 세계정부의 침략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란 말입니까?”
“제가 세계정부의 입장이라면 결코 모든 전력을 하나에 집중시키지 않을 거예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듯이, 여러 분야에 전력을 분산시켜 두고 있겠죠. 모험가뿐만 아니라 용병이나 군인, 상인 등에도 사람을 심어두고 적극적으로 자기 세력을 양성하고 있을 거예요. 잘못하면 원 어스를 격멸해 봤자 적들에게 경계심만을 심어줄 뿐이에요.”
에이라의 말에 발레리아는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고 해도 그 적의 전모가 다 드러나 있으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 방향을 정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 세계정부는 그 전모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
카일의 말에 에이라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레이븐과 특수 부대원들이 적들의 정보를 캐온 덕분에 적의 급소를 알게 되었지. 그것도 두 개나 말이야.”
카일의 말에 에이라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몬스터 코어와 그 전송 장치 말하는 거죠?”
“그래.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카일의 말에 에이라는 자기 옆머리를 귀 옆으로 넘기면서 말했다.
“뭐, 미소녀니까요.”
‘그건 상관없지 않나?’
‘그건 상관없지 않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