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새벽 한 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카일은 혼자 잠들지 않고 방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자는 걸 싫어하는 카일은 항상 클레어나 다른 애인들과 함께 잠자리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카일의 뒤편에 한 명의 남자가 슬쩍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어둠 속에서 홀연하게 나타난 갈색 피부의 미남자는 카일의 측근 중에서도 비장의 칼날 중에 하나인 레이븐이었다.
다크 엘프라는 특이한 종족. 거기다 투명화라는 초능력까지 각성한 레이븐은 은밀한 행동에 있어서는 따를 자가 없다.
카일은 레이븐의 그런 능력을 살리기 위해서 그를 비롯한 몇몇 인물을 특수 부대로 돌렸고 오직 카일의 명령만 듣는 직속 측근으로 삼았다.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 아리시아 등과는 달리 세상에 드러나 있지 않은 카일의 숨겨진 비수와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 특수 부대를 이끄는 레이븐을 카일이 부른다는 것은 중요한 명령이 있다는 것이다.
“원 어스라는 클랜에 관해서 들어봤나?”
“예. 루마니스 제국을 근거지로 해서 활동하고 있는 모험가 클랜으로 알고 있습니다.”
“놈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최대한 상세하게 조사해서 보고해라.”
“예. 주군.”
레이븐은 왜냐고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고 스르륵 사라졌다.
카일이 하라면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레이븐이 물러난 후, 카일은 자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세상의 영화를 모두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남자는 과연 무엇을 경계하는 것일까?
루마니스 제국.
중앙 대륙을 양분하는 두 개의 제국 중에 하나이며 사실상 대륙 최강국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같은 제국인 싱카라 연합 제국이 여러 왕국의 연합 체인 것에 비해서 루마니스 제국은 완벽한 단일 제국이 아닌가?
거기다 율리우스 왕국이나 레드로즈 왕국을 비롯해서 여러 왕국을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고 있는 입장이기도 했으니, 그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10년 전까지는 말이다.
최근 10년 사이 대륙 최강국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루마니스 제국에서 싱카라 연합 제국으로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놀랍게도 단 두 명의 모험가들이 거둔 성공 때문이었다.
던전 공략자 빅토르 폰 고르시파.
은총을 뿌리는 자 카일 화이트.
이 두 명의 성공과 영향력이 양대 제국의 패권 구도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특히 카일의 영향은 지대했다.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던 싱카라 연합 제국의 남부를 완벽하게 다스리며 치안과 민심을 회복했다.
거기다 잇따른 국책의 성공으로 어마어마하게 발전과 성공을 이룩했으며, 결정적으로 남방대륙의 조나라와 외교 무역을 성공시키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카일이 다스리는 화이트 공국은 싱카라 연합 제국 안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였고 연합회의에서 발언권도 없었지만 제국 내의 경제에 끼치는 영향력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빅토르가 국왕으로서 거둔 평가에서 가장 높은 부분은 카일 화이트를 전폭적으로 영입했다는 것이었을 정도다.
루마니스 왕국은 원래 정통 기사와 마법사가 우대를 받는 나라다. 그래서 모험가나 용병은 어딘지 모르게 천한 존재라고 차별하는 풍조가 알게 모르게 존재했다.
하지만 카일과 빅토르라는 모험가들이 거둔 거대한 성공과 그 영향력을 본 이후에는 많이 변했다.
루마니스 제국에서도 모험가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많이 도입했고 특히 던전 공략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들이 보기에 이 모든 시발점은 빅토르가 거둔 던전 공략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모험가를 양성하고 그들의 처우를 우대한다고 해도 바로 카일이나 빅토르 같은 이들이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루마니스 제국의 입장에서는 멀고 먼 미래. 최소한 100년 후의 미래를 바라보며 추진하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기쁜 오산이 벌어졌다
루마니스 제국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 중 몇몇 이들이 경이적인 속도로 성장하더니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던전을 공략하는 모험가들의 등장에 세상은 또 다른 영웅의 탄생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이 모여서 하나의 클랜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원 어스(One Earth)라는 클랜이었다.
원 어스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루마니스 제국에서는 원 어스의 클랜장에게 작위를 내리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들은 철저한 비밀주의를 관철했고 외부인의 클랜 가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원 어스의 모습에 몇몇 모험가들은 과거 카일 화이트의 사례를 들어서 원 어스의 클랜장이 특출난 능력을 가진 인물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과거 카일도 유명해지기 전에 자신의 능력을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루마니스 제국은 원 어스의 활동을 돕기 위해서 기밀 유지에 최대한 협조를 했다. 그렇다 보니 원 어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이렇게 되면 우리 둘의 능력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봐야 하나?”
레이븐과 마주하고 있는 이는 붉은색 벨벳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숨 막히는 몸매의 여인이었다.
금발에 하얀 피부의 이 미인은 레이븐과 더불어서 카일 직속의 특수 부대원이다.
그녀의 능력은 테이밍, 거기다 본래 뱀파이어 종족이 타고난 챠밍의 능력까지 더해져서 마음만 먹으면 이성을 노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자였다.
은밀 행동에 관해서는 투명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레이븐이 더 우수하지만 정보 수집 능력에서는 그녀가 더 유리하다.
처음에 레이븐은 자신이 직접 잠입해서 원 어스의 내부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갑자기 맹렬한 경계음이 울리며 원 어스의 클랜원 전부가 기민하게 움직여 침입자를 찾으려고 했다.
레이븐이 더 깊게 들어갔다면 그대로 적에게 잡혔을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수단으로 자신을 색적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같은 잠입을 또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대신 세피로스가 시도했다.
그녀의 능력으로 원 어스의 클랜원 중에 적당한 인물을 유혹해서 노예로 만든 다음 내부 정보를 캐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새끼들은 고자만 클랜원으로 받는 건가?”
서른 번이 넘는 시도를 했지만 단 한 명도 세피로스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다.
세피로스는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받았다.
그녀의 능력은 굉장히 강력해서 일국의 왕도 유혹해서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물론 대외기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일개 클랜원들에게 자신의 유혹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는 기색이 있는 인물조차 없었다.
“이 새끼들 전원 고자야. 분명 고자야. 확실해.”
세피로스와 사이가 나쁜 아리시아가 그 말을 들었다면 대놓고 비웃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둘이 잠입에 실패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수단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수 부대에는 또 한 명의 인재가 있었으니 말이다.
“노 페이스, 네가 나서야 할 것 같다.”
레이븐의 말에 얼굴이 없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 직속의 특수 부대원.
이름은 노 페이스.
말 그대로 얼굴이 없는 이 남자의 종족은 도플갱어다.
카일의 은총으로 각성한 능력을 사이코메트리.
원래 도플갱어는 상대방의 외견만 흉내 낼 뿐이다. 하지만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각성한 노 페이스는 상대방의 인격과 기억까지 완벽하게 흡수한다.
“원 어스의 클랜원 중에 누군가를 카피해서 내부에 잠입하는 거야. 할 수 있겠지?”
“…….”
노 페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레이븐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원 어스의 클랜원은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클랜 본부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극도로 드물어서 밖으로 술 한잔하러 나오는 인물도 없었다.
그런 원 어스의 클랜원들과 접선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장소에서 대기해야 했다.
레이븐이 선택한 것은 던전이었다.
원 어스는 무엇보다 던전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던전에는 꾸준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던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목격자가 없으니 여차하면 입을 막는 것도 쉬웠다.
레이븐은 동료들을 데리고 던전 입구가 보이는 여관에서 꾸준하게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저 파티가 좋을 듯하군.”
레이븐이 발견한 것은 5인 파티를 구성해서 던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원 어스의 클랜원들이었다.
저 정도 소수의 인원이라면 던전의 깊은 심층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추적해서 뒤를 잡기에 딱 안성맞춤이라는 말이다.
“세피로스.”
“알고 있어. 뒤를 붙이면 되는 거지.”
세피로스는 손끝에서 작은 벌 한 마리를 날려 보냈다.
그녀의 테이밍 능력으로 종속시킨 이 벌을 시켜서 목표의 뒤를 따라가게 한 것이다.
“우리도 준비하고 들어가자.”
“알고 있어. 노 페이스. 너도 얼굴 바꿔 둬.”
“…알겠다.”
노 페이스는 정체불명의 모험가의 얼굴을 사용했고 그제야 입이 생긴 그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셋은 카일이 시킨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던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특수 부대원의 주 임무는 정보 수집과 암살 등이 주 업무였지 던전 공략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약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크엘프, 뱀파이어. 도플갱어.
이 희귀한 종족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통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 거기다 카일에게 능력을 각성하면서 전투력이 더 올라갔다.
즉, 무슨 말이냐 하면…….
“꿰에엑!”
“죽어라.”
던전의 저층에 나오는 오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가볍게 몬스터를 정리한 레이븐은 자신의 무기를 거두며 세피로스에게 말했다.
“목표와의 거리를 어때?”
“조금씩 좁혀지고 있어.”
“아까부터 그 말을 반복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이놈들 이상하다고. 진행 속도가 왜 이렇게 빠른 거야?”
레이븐의 파티가 목표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던전에 돌입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시간 차이는 금방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써 던전의 4층에 내려오도록 목표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오는 던전이라서 길을 좀 헤맨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상대방의 던전 공략 속도가 너무 빨랐다.
레이븐과 그 동료들도 최고 속도로 공략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상해.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지?”
세피로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레이븐이 말했다.
“강하다는 거겠지. 확실히 세간의 이목을 모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세피로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레이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놈들, 말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붙인 벌을 통해서 놈들의 대화를 계속 도청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놈들 아무런 대화가 없어. 잡담은 고사하고 전투 중에 서로에게 내리는 지시조차 없어.”
“…그게 가능한가?”
“나도 몰라. 가끔 커다란 굉음에 묻혀서 전투 중의 지시가 안 들리는 걸지도……. 하지만 어떻게 잡담 한 마디 없지? 다 벙어리인가?”
세피로스의 의문에 레이븐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간에 5인 파티가 던전의 4층까지 내려오면서 대화 한 마디 없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벌이 목표를 따라가고 있는 건 확실한가?”
“그건 확실해. 이따금씩 시야도 공유하고 있으니까.”
“알았다. 일단 추적을 계속하지. 더 신중하게 움직인다.”
“알았어.”
“알겠다.”
레이븐의 지시에 세피로스와 노 페이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