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2부】
모험가들이 주로 애용하는 여관 겸 술집.
그곳에서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논쟁이 무엇이냐 하면…….
“카일 화이트지. 가장 출세한 모험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카일 화이트야.”
“아니지. 던전 공략자이자 고르시파 왕국의 건국 왕인 빅토르 전하야.”
“카일 화이트 전하도 공국의 왕이거든.”
“공국하고 왕국이 같냐? 그리고 카일 화이트는 빅토르 전하의 사위잖아? 누가 더 위인데?”
“그렇게 따질 일이 아니지. 사실 고르시파 왕국이 말만 왕국이지, 화이트 공국보다 잘 사는 나라는 아니잖아? 화이트 공국이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큰데.”
“돈 많다고 성공한 모험가냐?”
“당연하지. 돈이 최고야. 그것도 모르냐?”
모험가들은 마치 자기 일인 것 마냥 핏대를 세우면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반쯤은 술기운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들의 논쟁은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카일 화이트 공왕.
빅토르 폰 고르시파 국왕.
둘 다 모험가의 신분으로 왕족으로까지 출세한 걸출한 영웅들로 모험가들에게 있어서는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이기도 한 인물들이었다.
그만큼 그 둘이 남긴 업적은 대단했다.
앞으로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이런 업적을 이룬 모험가가 또 나온다고 확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는 전설의 존재는 동시대의 모험가들을 들뜨게 하는 법이다.
무수하게 많은 이들이 제2의 카일 화이트와 빅토르 폰 고르시파가 되기 위해서 모험가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선망하는 카일 화이트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 여기야. 여기.”
카일은 눈앞의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일국의 왕으로 등극했으며 이 세상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위대한 영웅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비난할 것은 아니다.
어떻게 안 그러겠는가?
“아빠한테 와. 리스야, 아빠 여기 있어.”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자신의 자식 앞에서 이런 법 아니겠는가?
카일은 열심히 장난감을 흔들면서 아직 걸음마도 못 뗀 딸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 아이가 카일의 하나뿐인 딸인 아이리스 화이트다.
이 화이트 공국에 하나뿐인 귀하디귀한 공주님.
그리고 그 공주님의 선택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
“아우우우.”
“컹컹.”
자기 몸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백색의 털 뭉치였다.
“큭, 스노우도 못 이기다니.”
그 털 뭉치는 한때 카일과 함께 던전에서 활동하며 우수한 탐색견으로 활동했던 스노우였다.
은퇴하고 먹고 암컷하고 새끼 만드는 것밖에 안 하다 보니 이제는 뒤룩뒤룩 살이 쪄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의 딸인 아이리스는 그런 스노우를 무척 좋아했다.
덕분에 이제는 보모견이라는 새로운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스노우였다.
“꺄하하하하.”
스노우의 푹신푹신한 몸을 꼭 끌어안은 아이리스는 천진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하아아, 그래. 네가 좋다면야.”
카일은 자신을 선택해 주지 않은 딸에게 서운하면서도 딸의 미소만 보면 모든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곤 했다.
“또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요?”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상의 미녀였다.
몸에 걸치고 있는 이브닝 드레스가 우아한 굴곡을 드러내는 그녀는 카일의 정처이자 영웅 왕 빅토르의 딸인 클레어 폰 고르시파다.
“아이리스, 이리 오렴.”
그녀가 딸을 부르자 딸은 스노우의 푹신한 몸에서 떨어져서 엄마에게로 아장아장 기어갔다.
클레어는 쪼그려 앉아서 자신에게 다가온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래. 잘했어요. 아빠하고 잘 놀고 있었니?”
“아부부부.”
클레어는 딸의 옹알이에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랬어? 그랬구나.”
“알아들은 거야? 어떻게?”
카일의 물음에 클레어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요.’
그냥 적당히 대답한 모양이다.
클레어는 카일의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의 딸인 아이리스를 안은 채 말했다.
“아가씨가 찾고 있던데, 이래도 돼요?”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아가씨는 에이라다.
에이라 수 레드로즈였던 그녀는 이제 정식으로 에이라 수 화이트가 되었다. 카일의 의동생으로 정식으로 결의 남매를 맺은 것이다.
그리고 카일은 의동생으로 받아들인 그녀를 화이트 공국의 재상으로 삼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여자인 그녀를 재상으로 삼는 것에 관해서 우려를 나타내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카일은 그녀를 믿었다. 21세기 지구의 지식을 가진 채 이 세계로 오면서 천재적인 지능 지수까지 갖춘 그녀보다 더 우수한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일의 기대대로 에이라는 정말 우수했다.
카일이 만든 화이트 공국의 국책 사업과 현대화 발전 사업을 모두 훌륭하게 지휘했고 남방대륙의 조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빈틈없이 진행해 갔다.
그녀의 능력은 정말 우수했고 그 결과…….
“에이라가 알아서 다 할 거야. 나는 정말 급한 일 아니면 부르지 말라고 그래.”
카일이 이렇게 업무시간에 딸내미의 방에 찾아와서 땡땡이를 쳐도 될 정도가 된 것이다.
클레어는 그런 남편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한다. 그래도 당신이 공국의 왕이잖아요?”
“왕이 할 일은 우수한 인재를 뽑아서 그 인재를 갈아, 아니, 잘 부려 먹는 거야.”
“에이라 아가씨가 그 말 듣더니 ‘내가 황희야? 지가 세종이야? 노조 오라고 그래.’라고 하던데?”
“노조가 어디 있어?”
카일의 비웃음에 클레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예요? 또 둘만 아는 얘기?”
“뭐, 비슷한 거지. 어쨌든 그냥 하라고 해. 왕인 나는 바빠.”
너무 바빠서 자기 딸내미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면서 귀찮아하는 반응 하나하나를 헤벌쭉 웃으면서 보고 있다.
‘부드러워진 걸 넘어서 몰랑몰랑해진 것 같아.’
클레어는 그런 남편을 보고 피식 웃었다.
둘의 결혼은 정략적인 의미가 강한 결혼이었지만 이제는 자신도 이 남자에게 많은 마음을 허락했다.
자신의 딸을 저렇게 귀여워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이 들 만도 했다.
클레어는 그런 남편에게 아주 간단한 보고 사항 몇 가지만 알려 주었다.
“검은 바람이 투란에서 돌아오고 있다고 해요.”
“벌써? 고향 땅에 아주 자리 잡아도 된다고 했는데?”
“당신 곁이 좋은가 보죠.”
“하여튼 충성심하고는…….”
카일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는 딱히 비밀도 아니지만 카일에게는 사람의 이능력을 각성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 신비로운 능력을 화이트 공국에서는 ‘은총’이라고 불렀는데 그 은총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이 바로 검은 바람이었다.
검은 바람은 카일과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한 측근 중에 최측근이고, 카일을 향한 흔들림 없는 충성심과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화이트 공국의 이인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카일은 그런 검은 바람의 충성심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고향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과 함께 충분한 돈과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검은 바람 혼자서 이동하는 게 아니라 그를 따르는 투란의 전사들도 함께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일은 떠나기 전, 검은 바람을 불러서 남몰래 얘기했다.
이제까지 수고 많았으며 고향에 가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도 좋다고 말이다.
그런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알겠다고 선선히 대답하고 먼 고향의 초원으로 향했었다.
그때 카일은 내심 섭섭했지만 검은 바람이라면 이제 자신을 등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일을 해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검은 바람은 카일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초원에서 1년도 보내지 않고 다시 귀환을 결정했다.
“그럴 거면 고향에는 왜 갔는지?”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카일에게 클레어가 대신 대답했다.
“투란의 대초원으로 가서 자신의 입김이 닿는 부족들과 대화를 해서 설득했나 봐요?”
“설득? 무슨 설득을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투란인 5만을 데리고 온다고 하던데요?”
“하아…….”
검은 바람이 떠날 때 데리고 갔던 투란의 전사단이 3,000명이었다. 그런데 그게 열 배 이상으로 늘어서 돌아온 것이다.
“당신의 대업에 힘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니 부디 받아 달라고 하네요.”
카일은 검은 바람의 보고를 전해 듣고 피식 웃었다.
“에이라에게 말해서 새롭게 유입되는 투란인들을 향한 지원 준비를 확실하게 하라고 해줘.”
“알았어요.”
카일은 검은 바람의 근황을 들은 김에 다른 측근들의 정보도 알고 싶어졌다.
“레이나는 뭐 하고 있어?”
자애와 조화의 여신 레테를 섬기는 수녀인 레이나는 카일의 직속 부하 중 한 명이자 반쯤 공인받은 첩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주로 하는 행동은…….
“여전히 봉사 활동에 여념이 없죠. 고아원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문자와 산수 같은 기초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여념이 없죠.”
“예산은 부족하지 않다고 하던가?”
“예. 사실 우리가 주는 예산 말고 신도들에게 받는 성금이 꽤 많아서 충분한가 봐요.”
“설마하니 강제로 걷는 건 아니지?”
“절대 아니죠. 에이라 아가씨가 그런 쪽으로는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어요.”
이 세계에서 신전은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에게 돈을 걷어간다. 말만 기부금이지 사실상 강제로 걷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카일은 그걸 엄하게 단속했다.
어떤 종교가 어디서 포교를 하든 막지 않았지만 기부금을 강제로 걷거나 신도를 강경한 수단으로 모집하는 경우엔 그대로 잡아서 감옥에 가둬 버렸다.
신관이든 성기사든 상관없이 전부 동일하게 말이다.
덕분에 종교계에서 화이트 공국이 포교하기에 까다로운 나라로 찍혀 버렸지만 상관없었다. 레이나를 비롯해서 그녀를 따르는 양심 있는 신관들이 남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위한 지원 정책은 아끼지 않고 있었다.
카일 개인적으로 종교에 기대서 마음에 위안을 삼는 사람들의 심정은 잘 이해가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라의 범죄율이 많이 내려갔으니 잘된 거지. 발레리아는 어때?”
발레리아 드 스콧.
크로노스 왕국 출신의 여기사로 한때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인생을 카일에 의해서 구원받고 검은 바람과 더불어서 화이트 공국 최강의 전투력으로 평가되는 그녀였다.
그녀는 최근…….
“발레리아 경은 여전히 기사단을 양성하는 데 여념이 없죠. 최근에는 그리폰을 길들이는 데 성공해서 번식과 관리를 위한 예산을 배분해 달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지? 테이밍 스킬을 각성한 능력자가 있다고 했던가?”
“예.”
카일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능력을 각성할지는 카일 자신도 알 수 없는 완전한 랜덤이다.
원래는 인간이 절대 길들일 수 없는 몬스터 중에 하나인 그리폰을 무리를 길들인 것도 그 능력 덕분이다.
사나운 그리핀을 생포한 테이밍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길들인 결과, 그리폰을 타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발레리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카일에게 와서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창공 기사단을 만들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녀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카일은 창공 기사단을 만드는 걸을 허락했고 그 결과 그녀가 이끄는 장미 기사단의 여기사들은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누빌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영토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카일의 입장에서는 기사단이 기동성을 손에 넣은 것 자체가 큰 메리트였다.
창공 기사단이 인근 해역을 꾸준하게 정찰하는 덕분에 화이트 공국의 영역 안에서는 해적들은 완전히 박멸되었다. 발레리아와 그녀가 이끄는 장미 기사단의 성과였다.
“아리시아는?”
“그녀 말이죠?”
클레어는 쓰게 웃었다.
카일의 측근들은 모두 카일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한 인물들이다. 죽으라고 하면 죽고 싸우라고 하면 설령 드래곤이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고 덤벼들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충성심만 놓고 평가했을 때 가장 강력한 인물을 꼽으라면 아리시아가 유력할 것이다.
그녀의 충성심은… 아니, 그걸 충성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있어서 카일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카일을 위해서’라는 단어만 붙으면 이 세상에 그녀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거의 광신도를 방불케 할 정도의 신앙심이다.
설령, 친남매처럼 지내고 있는 검은 바람의 목을 치라고 해도 그게 카일의 명령이라면 그녀는 1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리시아이다 보니…….
“그녀는 계속 대기 중이에요. 당신 곁을 떠나기 싫다고 하네요.”
“좀 아깝네. 아리시아도 제법 명성이 쌓여서 외부 활동을 하면 큰 활약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외부에서 평가받는 명성보다 당신이 잘했다고 한마디 해 주는 게 더 좋을걸요? 밤에 침대로 불러주면 더 좋아할 테고.”
“그거야 뭐…….”
레이나, 발레리아, 아리시아.
그녀들 전원 카일의 애첩이나 다름없다.
본처인 클레어도 카일에게 그녀들과 거리를 두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사실 그 세 명이 클레어보다 훨씬 전부터 카일을 섬겨 왔으니 말이다.
아버지인 빅토르와 카일의 관계 때문에 본처의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굴러온 돌이다. 최근 들어서 딸인 아이리스를 낳고 그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했지만 말이다.
카일은 측근들의 근황 보고를 받고 나서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어쨌든 나 없어도 잘 돌아가네.”
“그게 좋아요?”
“당연하지. 그동안 열심히 일한 이유는 지금 같은 세월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카일의 나이는 아직 29세.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은퇴자나 다름없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걸 보고 에이라가 또 무슨 파이어족인 줄 아냐고 항의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전생부터 따져보면 수십 년 넘게 혹사당하고 고생했던 카일이 아닌가?
지금 은퇴한다고 해도 양심에 받을 가책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고 보니 원 어스(One Earth)라는 클랜 얘기는 보고 했었나요?”
클레어의 말에 카일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 버렸다.
“뭐라고?”
“음, 원 어스라고요. 최근 모험가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클랜인데. 들어본 적 없어요.”
“…원 어스? 진짜 그런 이름이야?”
“예. 왜 그러세요?”
“…….”
카일의 표정은 다시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