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전후 사정을 다 따져 보면 이렇다.
우선 해적들이 재앙의 섬이라고 불리는 이 섬에는 던전이 존재했다.
다만, 이 던전은 인간의 문명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장소에서 탄생한 던전이기에 그 어떠한 관리도 받지 않았다. 관리받지 못한 던전은 당연히 끓어 넘쳤고, 섬의 지상에는 몬스터가 흘러넘쳤다.
다행히도 던전이 생성된 지형이 섬이었기 때문에 몬스터가 흘러넘친다고 해봐야 주변에 피해가 가지는 않았다. 그저 지상으로 흘러넘친 몬스터들이 자연적으로 가혹한 생태계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는 물론이고, 원래는 던전의 깊숙한 심처에 머물고 있어야 할 히드라 같은 괴물까지 나온 것이다.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던전의 내부를 짧게나마 탐색했고. 그것이 던전임을 확신했다.
던전을 방치한 지 너무 오래 되어서 1층부터 오크 무리와 트롤들이 넘쳐 나는 고난이도의 던전이 탄생한 것이다.
이 보고는 조나라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고 귀환한 카일에게 직접 전해졌다.
“아주 잘했다. 아리시아, 검은 바람.”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주인님. 하아아아…….”
검은 바람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카일의 칭찬을 받았고, 아리시아는 마치 강력한 마약에 취한 것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주 잘했대. 아주. 그냥도 아니고, 아주.’
그냥 두 글자가 덧붙었을 뿐이지만 아리시아에게는 세상에 다시없을 행복이었다.
카일은 보고서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 섬의 몬스터 상태는 어떻지?”
“끓어 넘친 지 꽤 되었기 때문에 대형종 몬스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도 오크나 고블린 같은 하위종 몬스터가 바글거리는 건 아니니, 정상화하는 것은 가능할 듯합니다.”
“좋군. 발레리아, 호크.”
“예, 주군.”
“예, 주인님.”
“전 병력을 동원해서 그 섬의 몬스터들을 일소해라. 검은 바람은 투란 전사들을 이끌고 던전의 저층을 돌면서 던전을 틀어막아라.”
“예, 주인님.”
“그리고 아리시아는 던전 저층의 지도를 작성…….”
“싫어요!!”
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리시아는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그 말에 카일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아리시아가 싫다고 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리시아가?’
‘설마… 노 페이스가 변신한 건가?’
그리고 아리시아 본인도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주인님……. 이게, 싫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따를 거예요. 그, 그런데, 그…….”
횡설수설 하는 아리시아를 보고 카일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침착하게 말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니?”
“그게…….”
아리시아는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주인님하고 같이 있고 싶어요.”
그렇다. 이게 문제였다.
카일하고 한 번 떨어져 지내본 아리시아는 그게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인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다시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자신도 모르게 카일의 명령에 거부의 말을 해버린 것이다.
카일은 아리시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걱정 없잖니? 어차피 나도 당분간 그 섬에 머물 텐데.”
“예? 주인님도요?”
“조나라와의 중계 무역을 위한 항구와 도시 건설도 지휘해야 하고,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지휘도 해야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섬에는 내가 직접 가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영지는 에이라, 네가 맡아도 되잖아?”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니에요? 멜로나도 안 사왔으면서?”
“나도 혹시 몰라서 멜론은 찾아봤다. 그런데 없더라.”
“하아아……. 동생에 대한 애정이 식었어.”
카일은 에이라의 푸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나도 던전에 들어갈 거다. 그때 나하고 같이 움직이면 될 테니, 별문제는 없겠지?”
“예, 주인님!”
“그래. 그럼 됐다.”
카일은 좋아하는 아리시아를 보고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많이 외로웠나? 여전히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 * *
카일이 건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고르시파 왕국은 던전 공략을 국책 사업으로 밀며 진행하고 있는 나라다.
처음에는 귀족이 되고 나서도 ‘왜 던전에 들어가야 하지?’라고 하며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결국 자신들이 잘하는 일을 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다 보니 돈이 많이 되는 던전은 인기가 있었고, 귀족들 중에는 던전이 나오는 지역을 영지로 가지기를 원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미 바이에른이라는 룰 모델을 알고 있어, 던전을 중심으로 도시의 상권을 발달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일이 발견한 던전은 여러 가지로 호재였다.
던전 자체가 발견된 것만 해도 좋았는데, 심지어 그 던전이 중계지로 사용할 수 있는 섬에 있었다.
즉, 이 섬에서 던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대륙 간 해양 무역의 중심 지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에이라는 이 상황을 접하고.
“석유가 나오는 홍콩을 발견한 기분인데요?”
그런 표현을 했을 정도다.
그만큼 훌륭한 섬이라는 말이다.
카일은 직접 가서 섬을 둘러본 후 이 섬을 조나라와의 중계 무역을 위한 지역으로 선정했다.
아리시아가 발견한 다른 후보지도 훌륭했지만 여기만큼은 아니었다.
섬 자체의 크기가 가장 컸고, 수원이 풍부하고, 항구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한 지역적 여건도 충분했다.
재앙의 섬이라고 불리던 이유는 지상에 넘쳐 나던 몬스터들 때문이었지만, 그건 이미 부하들이 부지런히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처럼 던전의 입구를 틀어막고 꾸준하게 몬스터를 토벌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섬을 더 둘러보니 섬 자체의 자연환경도 너무나 훌륭했다.
북쪽 해안가는 투명한 에메랄드빛의 바다에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이 아름다웠고, 거기서 위쪽에 보이는 산기슭으로 이동하니 천연 온천도 있었다.
던전 없이 휴양과 관광을 목적으로 리조트를 만들기만 해도 상당한 수익이 나올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아예 이 섬으로 내 근거지를 옮기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어.”
둘러본 지 사흘 만에 카일은 이 섬에 홀딱 반했다.
“이 섬을 해적들이 재앙의 섬이라고 부른다고?”
“예, 주인님.”
“멍청한 놈들이지. 오늘부터 이 섬을 천국의 섬, ‘헤븐 랜드’라고 부른다.”
“예. 주인님.”
그렇게 재앙의 섬은 해븐 랜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 *
며칠 후, 카일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던전 안에 들어갔다. 던전의 난이도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 본인이 직접 들어가 보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물론 카일이 던전에 들어가면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 발레리아, 레이나도 함께했다. 거기다 추가적인 인력으로 부하들로 투란 전사단 20인과 장미 기사단 20인도 함께였다.
“하아아……. 오랜만이군.”
카일이 정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약간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던전의 공기와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어둠. 던전 특유의 느낌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주인님과 던전에 들어오다니! 이게 얼마 만이죠?”
“바이에른이 망하고 나서 처음이니, 거의 5년 만이군.”
“그렇군요. 5년,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는 거겠지.”
그 5년 동안 카일은 정말 충실하게 시간을 보냈다.
왕국에서 영지를 받고 그 영지를 발전시켜서 해적들을 소탕했다.
그 결과 고르시파 왕국에서 백작위를 받았고, 클레어 공주와 결혼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조나라와 동맹을 맺고 대륙 간 해양 무역도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게 되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위치가 된 카일이지만 검은 바람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오니 어쩐지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모험가로서의 정체성이 생각보다 강했나? 아니면 그냥 과거의 추억 때문인가?’
어쨌든 일행을 이끌고 오랜만에 던전을 누비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과거에 던전 활동의 목적은 몬스터를 잡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돈보다 던전의 저층을 넓게 탐색하면서 던전의 몬스터를 처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다음에 들어올 모험가들이 탐색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주인님, 오크 무리입니다.”
“투란 전사단을 보내서 쓸어버려라. 흩어지면 내버려 둬라. 깊게 추적할 필요는 없다.”
“예, 주인님.”
카일의 명령을 받은 검은 바람은 즉시 부하들과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가서 오크들을 공격했다.
“다 쓸어버려라.”
“우오오오오!”
검은 바람을 필두로 해서 달려간 투란 전사들은 자신들보다 열 배는 더 많은 오크들을 상대로 완벽하게 압도했다.
“취이익! 취익!”
“취이이익!”
오크들은 몬스터 특유의 흉포성을 터트리며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애당초 전력의 차이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주인님, 끝났습니다”
불과 5분도 되지 않아서 오크 무리 하나를 박살 내버린 검은 바람이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아리시아, 지도는 어때?”
“입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으니 진척은 상당해요. 던전 규모를 보건대, 이번 달 중으로 1층의 지도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렇군. 그럼 오늘은 이쯤 하지.”
“예, 주인님.”
가볍게 시범적으로 돌기로 한 던전이니 굳이 숙박까지 하면서 깊숙한 곳을 탐색할 이유는 없었다.
카일은 후퇴를 결정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자 던전의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는 호크가 카일을 반겨 주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수고 많다.”
카일은 호크와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들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카일 본인도 해변으로 향하더니…….
“오, 미리 준비해 뒀네?”
“이 정도는 기본이죠.”
거기에는 카일과 던전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먹고 마실 수 있을 정도의 술과 고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야외에서 오랜만의 바비큐 파티를 즐기며 카일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지금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쉬어라.”
“예, 주인님.”
던전 탐색 후 술과 고기.
이건 카일이 꾸준하게 지켜 온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부하들이 나름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일은 자신 또한 직속 부하들과 함께 대화를 하며 술을 마셨다.
“오늘 들어가 보니 던전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아 보이더군. 다만, 이미 한 번 끓어 넘친 던전이라서 저층의 수준은 조금 높아 보였어.”
“저도 동감입니다. 꾸준하게 공략을 진행하다 보면 아마 저층의 난이도는 바이에른의 던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내려갈 듯합니다”
“그래. 그러려면 얼마나 걸릴까?”
“빠르면 수년, 길면 10년 정도는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길군. 뭐, 금방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어도 나름 곤란하지만 말이야.”
카일의 입장에서는 이 헤븐 랜드의 던전이 가능한 오래 마석을 공급해 주는 것이 유리하다.
던전에서 꾸준하게 나오는 마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섬의 훌륭한 수익원이 될 테고, 그 마석을 그대로 가공해서 아티팩트로 만들어 조나라로 수출하면…….
‘유통 마진을 최소한으로 남기면서 해양 무역을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좋아. 기존에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베르나도 왕국과 비교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유리함이야.’
던전에 한 번 들어갔다 온 후 카일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이 섬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