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카일은 동맹에 대한 조인식을 마치고 성대한 대접을 받으면서 조나라에 한 달이 넘게 머물렀다.
본심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일을 진행하고 싶었지만, 세부 조항의 조율과 동맹이 될 조나라 내부의 인맥 관리 등을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조나라에 머물러야 했다.
‘뭐, 내가 없어도 모두 잘해 주겠지. 큰 틀은 다 지시하고 왔으니까.’
한동안은 조나라에서 머물기로 마음을 먹은 카일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 * *
검은 바람과 호크는 해역을 완전히 휘저으면서 해적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카일이 마법사들을 갈아서 만들어 낸 각종 장비로 중무장을 한 화이트 영지의 해군 전력은 거의 사기나 다름없었다.
스크류 엔진을 이용한 기동력.
대포로 인한 원거리에서의 파괴력.
거기다 백병전이 되면 검은 바람을 비롯한 투란의 전사들이 나서서 해적들이 불쌍하다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준다.
이런 전력을 가지고 해적들을 상대로 고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해적들을 찾아내는 과정이 더 난이도가 높았지만, 그마저도 게오르그 왕국과의 동맹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반쯤은 동업자나 마찬가지인 게오르그 왕국의 해군은 곳곳에 숨어서 암약하는 해적들을 색출해 냈고, 덕분에 해적들로 악명이 높았던 남서쪽의 해역은 빠르게 정리가 되고 있었다.
화이트 영지 역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카일이 없다고 해도 에이라는 유능한 모습으로 영지를 이끌었고, 오히려 카일보다 더 나은 면도 있었다.
에이라는 남방 대륙과의 무역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시작했을 때를 대비한 무역로 개척을 위해 투자자를 모집하여 막대한 돈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중계지에 필요한 건축 자재를 저렴한 가격에 미리 구입했다.
그렇게 카일의 믿음직한 부하들은 착실하게 자기 몫을 다하고 있었다.
한 명만 빼고 말이다.
“…시아 님? 아리시아 님.”
“왜?”
“지도에 나오지 않는 섬을 찾았습니다. 식수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해 볼까요?”
“어.”
“…저희끼리 갔다 옵니까?”
“어.”
“…보고서도 제가 쓰고요?”
“어.”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겁니까?”
“어.”
현재 아리시아는 압도적으로 무기력했다.
배 위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서 얼굴에는 수면 안대를 끼고 그냥 반쯤 졸고 있었다.
카일의 밑으로 들어온 후 항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사실 그녀가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카일은 조나라로 떠나기 전, 그녀에게 임무를 맡겼고, 아리시아는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결과…….
“아리시아 님. 이번 섬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식수원도 풍부하고 지반도 안정적이라서 건축물을 짓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렇군. 이걸로 적합한 섬을 열 개 찾았군.”
“예. 그렇습니다.”
그녀는 조금 찝찝했다.
최선을 다해서 임무에 임한 결과, 카일이 맡긴 임무를 벌써 완벽하게 수행해 버린 것이다.
해적 군도를 샅샅이 탐색해서 이미 중계 지역으로 삼기에 적합한 섬을 열 개나 찾아버렸다.
그렇게 빠르게 임무를 달성한 그녀였지만 달성감보다는 허무함이 더 컸다.
“하아아……. 주인님이 안 계시니.”
그렇다. 그녀의 허무함의 원인은 카일의 부재였다.
보통 카일이 맡긴 일을 완벽하게 완수하면 그녀는 그것을 카일에게 보고하고, 카일은 그런 그녀에게 웃으면서 말한다.
“잘했다.”
그 짧은 한마디를 위해서 그녀는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그녀에게 카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했다.
“하아아아……. 주인님이 안 계셔. 안 계시다고…….”
하지만 그 한마디를 해줄 카일이 없다.
아리시아는 점점 초조해졌고 주변에 짜증을 내는 일도 많아졌다.
급기야는…….
“대장님, 섬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갔다 와서 살펴보고 보고해.”
“어? 저희끼리 가는 겁니까?”
“그래. 충분하잖아?”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태업하기 시작했다.
이미 임무는 완벽하게 성공했고, 거기다 카일도 주변에 없으니까 의욕이 안 생기는 것이다.
그녀는 나태함에 젖어 들어갔다.
그렇게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고 아리시아는 완전히 축 늘어져 버렸다.
카일이 없으면 의욕도 없는 그녀는 부하들에게 계속 탐색 임무를 맡긴 채 자신은 여전히 배 위에 선 베드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말을 걸지 않는 한 꼼짝도 안 하는 그녀의 모습에 부하들은 낯설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하아아……. 주인님 보고 싶다. 빨리 주인님, 빨리 보고 싶어요. 주인님.”
이건 거의 금단 증상이었다.
금단 증상 수준으로 축 늘어진 아리시아를 본 그녀의 부하들 중에는 카일이 없으면 아리시아가 어떻게 망가지느냐에 관한 의문이 풀렸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아리시아 님, 구조 요청입니다. 구조 요청의 신호가 올라왔습니다.”
부하 중에 한 명이 아리시아에게 보고했다.
그 순간 아리시아는 제 눈가에 걸친 안대를 치우고 전방을 바라봤다.
아리시아의 시선이 닿은 곳은 부하들이 탐색을 위해 찾아간 섬이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야 할 섬이었건만, 그곳에선 진한 붉은색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연금술사 길드를 통해서 만들어 낸 비상 신호용 연막탄이었다.
“뭔가 큰일이……. 엇?”
부하는 말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늘어져 있던 아리시아가 그대로 선 베드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배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다.
타타타타탓!
아리시아는 바다의 수면을 박차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뛰어나갔다.
“어……. 어어?”
“방금 뭐였지?”
보고를 하던 부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은 그제야 떠올렸다.
간부들 중에 가장 강한 것은 검은 바람 아니면 발레리아 둘 중에 한 명일 것이다다. 하지만 가장 빠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
시간 가속을 이용한 아리시아의 이동 속도는 압도적이었다.
* * *
‘저쪽인가?’
섬에 도착한 아리시아는 바로 연기가 보이는 곳으로 달렸고 10초도 되지 않아서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기가 올라오는 그곳에 도착하자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트롤? 세 마리나?”
실로 오랜만에 보는 트롤이었다.
한때 저 녀석을 잡는 것을 목적으로 카일을 비롯한 동료들과 던전을 탐험했던 추억이 있는 몬스터였다.
바이에른을 떠난 이후로는 볼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그 추억의 몬스터를 보게 된 것이다.
부하들은 세 마리의 트롤에게 둘러싸여 긴 창으로 적들을 엄호하며 버티고 있었다.
‘용케 사망자가 안 나왔군.’
장미 기사단이나 투란 전사단과 달리 아리시아의 부하들은 전투 능력이 높은 편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저들 중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건 정말 운이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아리시아는 바로 움직였다.
‘트롤이 상대라면 활은 쓸모가 없어.’
그녀는 활 대신에 양손에 짧은 단도 두 자루를 들었다.
사람의 팔 길이보다 짧은 두 자루의 단도는 미스릴 함유량이 높은 특제품으로 카일이 그녀를 위해서 제작한 물건이다.
카일은 아리시아의 장점인 압도적인 속도를 살리고자 했고, 그리하여 강도와 절삭력이 중점을 준 이 소도를 만들어 냈다.
아리시아는 두 자루의 소도를 가지고 주저 없이 트롤들에게 덤벼들었다.
“쿠워어어?”
트롤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아리시아를 보고 그게 뭔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빠른 무언가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 트롤이 느낀 건 자신의 양 눈에 찾아온 뜨거운 통증이었다.
스팟!
“크워어어어엉.”
예리하게 트롤의 눈을 베고 지나간 아리시아의 일격에 트롤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트롤은 뒤늦게 손에 들고 있는 돌도끼를 휘둘렀지만, 아리시아는 이미 그 트롤을 피해서 다른 두 마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크워엉!”
“커헝!”
동료의 비명 소리 덕분에 남은 두 마리는 아리시아를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했다. 하지만 휘둘러진 놈들의 돌도끼는 당연하다는 듯이 빗나갔고, 아리시아의 소도가 나란히 놈들의 눈을 그었다.
“카하앙!”
“크어엉!”
눈을 베인 놈들은 본능적으로 양손으로 눈을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아리시아는 그 틈을 타서 부하들에게 외쳤다.
“배로 돌아가!”
“예? 예. 알겠습니다!”
“후퇴! 서둘러!”
부하들은 자신들이 있어 봐야 아리시아의 방해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빠르게 배로 돌아갔고 아리시아는 홀로 남아서 세 마리의 트롤을 막았다.
눈을 베기는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고, 트롤의 재생 능력이라면 그 작은 상처는 금방 회복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놈들은 그새 눈을 회복하고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아리시아는 그런 세 마리의 트롤은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이 뒤로는 통행금지다.”
“크허어어엉!”
당연히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 트롤들은 아리시아에게 달려들었다.
* * *
“트롤? 그것도 세 마리나?”
“미친, 그런 게 여기 왜 있어?!”
“아리시아 님이 막고 있다. 빨리 장비 챙겨서 튀어 가. 투창이랑 쇠그물 그리고 화포도 이쪽으로 조준해 놔. 유인해 오면 바로 쏠 수 있게.”
탐색대의 부대장 하워드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서둘러서 움직였다.
‘괜찮을까? 검은 바람 님이나 발레리아 님이라면 걱정도 안 하겠지만, 우리 대장은…….’
아리시아는 빠르고 훌륭한 활 솜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대형종 몬스터인 트롤. 아리시아와는 상성이 너무 좋지 않다.
그녀의 공격은 트롤에게 치명타가 될 수 없으며, 트롤의 재생 능력을 생각하면 사실상 대미지를 줄 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에 비해서 그녀는 트롤의 공격에 한 방만 맞아도 사망인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해.’
그는 이를 악물고 부대원들에게 외쳤다.
“선발대가 먼저 간다. 나하고 같이 1조는 투창을 챙겨서 따라와.”
하워드는 열 명 정도의 부하들만 데리고 서둘러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워드는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면서도 불길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너무 조용해. 설마 벌써 전투가 끝났단 말인가?’
세 마리나 되는 트롤이 날뛰고 있다면 상당히 시끄러워야 정상이다.
하지만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제길.”
굉장히 불길한 상상을 하며 하워드는 달렸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현장에서 보인 것은…….
“아, 잘 왔어. 해체하는 것 좀 도와줘. 오랜만에 하니까 영 되지를 않네.”
찢어진 걸레짝처럼 엉망이 된 트롤의 시체 세 구와 피범벅이 되어 있지만, 정작 본인은 상처 하나 없이 쌩쌩한 아리시아였다.
“아… 아리시아 님, 괜찮으십니까?”
“당연하지. 설마 무슨 일이라도 당할 것 같았어?”
“…….”
대답 없는 부하를 보고 아리시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우습게 보였나?”
“아, 아닙니다.”
당황해서 황급하게 대답하는 하워드에게 아리시아가 단도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해체나 도와줘.”
하워드가 데리고 온 부하들은 아리시아의 지시대로 세 구의 트롤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