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중간중간에 자선 사업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들이긴 했지만, 결국 카일이 이끄는 사절단은 조나라의 수도 연주에 도착했다.
성문에서 간단한 검문을 거친 후 카일의 사절단은 조나라 군인의 호위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향했다.
커다란 대로를 마차로 이동하며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카일의 눈이 신기한 풍경에 반짝였다.
“꽤 멋진 풍경이군.”
“그러게요. 건축물의 양식이 우리하고 완전히 달라요.”
“그래도 수도 특유의 화려함은 잘 드러나 있어. 나쁘지 않은 도시군.”
카일은 발레리아와 함께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감탄했다.
이국의 정취라는 것은 항상 보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러니 사람들은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멀고 먼 타국으로 여행을 가기도 하는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이국의 거리를 구경하다 보니 도착한 곳은 조나라의 왕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야 합니다.”
“알겠소.”
안내역을 맞은 관료의 말에 카일을 마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발레리아가 한발 먼저 내려서 마차의 문을 열어 줬다.
카일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녀는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장미 기사단 일동! 호위 대열로 정열!”
“옛!”
“옛!”
그녀의 한마디에 100명에 달하는 장미 기사단 전원이 카일의 앞뒤로 쭉 정렬했다. 그리고 카일은 그녀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으면서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
“허어? 저 사람들이 그 소문의…….”
“듣던 대로 대단하군.”
“세상에 저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
왕궁의 관리와 시녀들은 그런 카일의 등장에 눈을 떼지 못하고 주목했다.
장미 기사단은 윤기가 흐를 정도로 반짝이는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그 표면에는 화려한 붉은 장미를 장식해 두고 있었다.
하나 그들이 장미 기사단에게서 눈을 못 떼는 이유는 낯선 차림새 때문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들 한 명 한 명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장미 기사단은 전원 카일의 능력으로 각성했다. 각성 덕분에 최적화된 육체를 갖게 된 그녀들이 100명이나 모여서 호위 대형을 갖추고 있는 광경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허어……. 장관이군.”
“북대륙의 여인들은 모두 저렇게 아름다운가?”
“꼭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듯하군.”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카일은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대전 안에는 무장이 불가능합니다. 인원도 전원은 곤란합니다.”
대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장의 말에 카일이 말했다.
“몇 명이면 되겠습니까?”
“화이트 공 본인을 포함해서 세 명까지만 허용 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발레리아.”
“예, 주군.”
카일이 지시를 내리자 발레리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니아. 네가 나와 함께 간다.”
“예, 단장님.”
둘은 순순히 무장을 해제했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렸다.
카일은 무장이 해제된 발레리아와 제니아를 거느리고 이동했다.
‘좋은 인선이네.’
제니아의 능력인 단거리 순간 이동은 설령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카일을 도피시킬 수 있다.
카일은 그 둘을 데리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고, 많은 신료들을 거느린 채 옥좌에 앉아 있는 조나라의 국왕을 볼 수 있었다.
카일은 정중앙으로 걸어가서 왕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고르시파 왕국의 카일 화이트 백작이라고 합니다.”
카일의 인사에 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왕 고경이다. 짐의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국의 사신이여.”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만 고개를 들어도 좋네.”
조왕의 허락을 받은 카일은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어차피 문화권이 다르니 예의를 차려 봐야 서로 간에 알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최대한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나는 적의가 없고 당신들을 존중하고 있다’라는 의사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다행히 그런 카일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조왕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대가 했던 선행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네. 설마 머나먼 타국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선행을 베풀 줄은 몰랐네.”
“제가 멋대로 한 일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자네가 있는 나라에는 그런 법도가 있는가?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보면 도우라는?”
“예. 고귀한 자들의 의무라고 하여 지위가 높은 이는 낮은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호오오… 그렇군. 역시 어디를 가도 의로운 이들의 생각은 비슷하게 합치하는 면이 있는 듯하군.”
“조나라에도 비슷한 의무가 있습니까?”
“유자께서 말하기를 궁곤한 이를 보고도 돕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하셨지.”
“제가 당연한 일을 했으니 다행입니다.”
“그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게 문제지만 말이야.”
‘그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올시다.’
뒤에 말은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는 카일이었다.
그렇게 좋은 말이 몇 마디 오간 후 조나라의 왕이 말했다.
“크흠, 그런데 멀고 먼 땅에서 우리 나라까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슬슬 본론을 꺼내라는 조왕의 말에 카일이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고르시파 왕국의 국왕 빅토르 폰 고르시파의 전권을 위임받은 이로서 남방 대륙의 조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고 동맹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래. 그렇군.”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다만 정식으로 카일의 입에서 다시 듣는다는 절차가 중요했을 뿐.
조왕은 주변의 신료들을 슬쩍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의 그 제의에는 많은 신료들의 의견이 나뉘고 있다네. 찬성하는 자도 있지만 반대하는 자들도 있지.”
“국가의 중대사이니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럼 이 자리를 들어서 자네가 양국 동맹의 필요성에 관해 설명을 해보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고르시파 왕국의 카일 화이트 백작입니다. 화이트가 가문명이며 카일이 저의 이름입니다.”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카일이 차분하게 말문을 열어 갔다.
“저는 본국의 전하에게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여 왔으며, 수년간의 준비 끝에 이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멀고 먼 남방 대륙까지 찾아왔습니다.”
카일은 말을 하면서 주변의 반응을 계속 살폈다. 누가 자신의 말에 호의적이고 누가 자신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지 차분하게 살피며 얘기를 이어갔다.
“조나라에 처음 와서 느낀 감정은 다양했습니다. 새로운 풍경, 모르는 문화, 전혀 다른 인종.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닌, 알면 알수록 조나라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 우리 나라가 아름답기는 하지.”
“훗, 천하팔경(天下八景) 중에 세 곳을 보유한 것이 우리 조나라니까요.”
“이방인들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하죠.”
카일이 자신들의 나라를 칭찬하자 조나라의 신하들은 몹시 흐뭇해했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를 칭찬하고 좋은 점을 알아줄 때 기분 좋아지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가깝다.
카일은 되도록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우리 고르시파 왕국은 아직 생기고 100년도 되지 않은 젊은 왕국입니다. 오랜 전통이 있는 조나라와 젊고 새로운 시각을 가진 우리 고르시파 왕국이 국교를 만든다면 서로 간에 나눌 수 있는 장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대륙의 베르나도 왕국과 남방 대륙의 연나라는 서로 간에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고르시파 왕국과 조나라에도 그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디 양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대륙 간 무역 조약에 동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일의 말이 끝나자 대신들 중에 몇 명이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계획이 어디 있겠소.”
“서로 간에 이득이 되는 일이니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이미 연나라가 대륙 간 해양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지 않소? 우리 나라도 여기에 동참해야 하오.”
그렇게 카일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은 애당초 대륙 간 무역에 동의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동의는 고마운 일이었지만, 카일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다.
“모두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깨며 끼어든 것은 수염이 성성한 노신이었다.
‘저 사람은…….’
카일과 눈을 마주한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말했다.
“본인은 조나라의 사마직을 맞고 있는 조표라고 하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 사마는 카일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는 정녕 사특한 뜻이 없이 오직 선의만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찾아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천지신명에게 맹세할 수 있겠소?”
“저희가 믿는 신에게 맹세하겠습니다.”
“그렇군.”
조 사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일을 보고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어? 이렇게 쉽게 풀린다고?’
카일은 순간 맥이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대는 이제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 보시오. 정녕 사특한 뜻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오.”
‘그럼 그렇지.’
역시 일은 순순히 풀리지 않았다.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카일은 미소를 머금고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그런 카일을 향해 조 사마가 보고 말하는 것이…….
“그대에게 우리 나라에 해를 끼칠 의도는 없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물러가야지. 지금 그대는 존재 자체로 우리 조나라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고 있소.”
“저의 어떤 부분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국교를 트고 무역을 시작하면 우리 조나라에는 그대들의 나라에서 만들어 낸 잡다한 물건들이 범람하듯이 들어오지 않겠소?”
“…….”
“그런 물건들 하나하나가 우리 조나라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문화적 순수성을 어지럽히는 법이오.”
“…….”
“자고로 국가라는 것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품고 발전해야만 고유의 문화와 풍속이라는 것이 발달하는 법이오. 그것은 곧 국가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
카일은 일단 입을 다물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었다.
‘어차피 이런 억지를 부릴 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조 사마는 자기 말에 도취되었는지 주저리주저리 국가의 고유문화의 중요성과 양국의 문화가 섞이면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에 관해서 열변을 토했다. 심지어는…….
“내 말이 옳다는 예로써 준비한 것이 있소. 이것을 보시오.”
말을 하던 중간에 그가 가져온 것은 카일이 예물로 바쳤던 물건 중에 하나인 여성용 드레스였다.
그는 그 드레스를 가져와 카일에게 보이며 말했다.
“도대체 이 망측한 물건은 무엇이오? 이래서는 가슴이 다 드러나지 않소? 홍등가의 창기들도 이것보다는 얌전하게 옷을 입을 것이오.”
‘호오,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카일은 조나라의 문화를 최대한 존중해 주었는데, 상대편에서는 오히려 중앙 대륙의 고유문화를 폄하하고 모독했다.
이건 거의 도발이다.
여기에 넘어오라는 도발.
‘이 도발에 내가 발끈해 받아치고, 그러다 격렬한 논쟁이라도 벌인다면… 그야말로 상대가 바라는 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