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왕의 명령을 받은 전령은 서둘러서 말을 달려갔다.
이틀을 달려서 마침 사절단이 머물고 있는 통현군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오, 자네는 왕도 금군의 재림이 아닌가?”
“이곽 장군을 뵙습니다.”
그는 자신과 안면이 있는 이곽을 마주하고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여기는 어쩐 일인가?”
“예. 전하의 어명을 받아서 사절단의 행보가 늦은 이유를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뜻하지 않은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니라면 곤란하실 듯합니다.”
전령의 말에 이곽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고는 아닐세. 하지만…….”
말을 흐리는 이곽을 보고 재림이라는 전령이 말했다.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후우, 그저 내가 부끄러워서 그러네.”
“…….”
점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이곽을 보고 재림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곽은 재림에게 말했다.
“직접 가서 보는 게 빠르겠지. 화이트 공과 그 일행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네.”
그리고 재림이 안내된 곳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줄을 서세요, 줄을!”
“구호 물품은 여기서 받아 가시면 됩니다. 아직 많으니까 밀지 말고 줄을 서세요.”
거기서는 머리가 노랗고 붉은 이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며 무언가를 나눠 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복 받으실 겁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눠 주는 자루를 받은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로 노인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해주고 있는 듯했다.
“장군, 이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보다시피 구호(救護)활동이네.”
“구호? 저들이 말입니까? 우리 백성들을 대상으로 말입니까?”
“그렇다네. 오는 길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가지고 온 식량과 물품을 나눠 주기 시작하더니, 현과 군을 지나칠 때마다 이러고 있더군. 아낌없이 베풀고 물자가 또 떨어지니 중간에 고창항으로 사람을 보내서 저들의 배에서 모자란 물자를 가져오게 하고…….”
“…….”
“그렇게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에게 식량과 피복을 나눠 주는 활동을 하다 보니 결국 이리 늦고 말았네.”
“아…….”
재림은 크게 감탄했다.
사절단이 늦장을 부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감히 북방의 야만인들이 조나라의 왕권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이것은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헌신적인 이유가 아닌가?
그런 재림에게 이곽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조나라의 군관으로서 녹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나라의 백성들이 배고프고 헐벗은 것을 외면했네. 그런데 저들은…….”
“장군.”
“부끄럽네. 장부로 태어나서 이제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했건만, 오늘처럼 나 자신이 부끄러운 적은 없었네.”
이곽의 말에 재림 역시 마찬가지로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재림은 전령으로 온 이상 자신이 맡을 일을 다 해야 했다.
정말로 사절단이 순수한 선의를 목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특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를 확실하게 조사해야 했다.
“저 하얀 옷을 입은 이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북방에서는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병자를 치료한다고 하더군.”
“저들이 말입니까?”
“그래. 저 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병자들을 쓰다듬으니 환자들의 상태가 아주 좋아졌어?”
“호오……. 혹시 기공 치료는 아닙니까?”
“아닐세. 나도 명색이 무인인데 그걸 몰라볼 리가 있는가? 저건 무인의 기(氣)와는 완전히 다른 힘이야.”
“음, 저기 저것은 무엇입니까?”
“비누라고 하더군. 기름으로 만드는 물건인데 빨래에도 사용할 수 있고, 몸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다네.”
“장군께서도 써보셨습니까?”
“화이트 공이 호의로 내 몫을 몇 개 주길래 써봤네. 사실 나보다 아내가 몹시 좋아하더군.”
“음…….”
재림은 그 후에도 이런저런 조사를 해봤지만 카일의 일행에게서 사특한 이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수상했던 건 여자들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혹시 사람을 홀리는 요괴가 아닐까?’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재림은 이곽에게 말했다
“일단 전하에게 보고를 하기 전에 이곳의 책임자분을 만나서 말씀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그럼 화이트 공을 부르지. 음, 리오나 경. 그대들의 주군은 지금 어디 계시오?”
이곽은 눈에 익은 장미 기사단의 여기사를 불러서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군께서는 저기 안쪽에 식량을 배포하는 뒤편에 계십니다.”
“그렇군. 가세나.”
그리고 목적지로 가면서 재림이 이곽에게 말했다.
“여자들은 왜 저렇게 예쁜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북대륙의 여인들이 모두 저렇다면 죽기 전에는 꼭 가보고 싶군.”
“그때는 저도 꼭 데리고 가주십시오.”
그렇게 사소한 오해가 꽃피는 와중에 재림은 카일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빨리빨리 던져.”
“예. 주군. 알겠습니다.”
거기에는 식량을 마차에서 내리는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눈에 띄는 한 명의 남자는 다른 일꾼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주변의 일꾼들은 그를 주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재림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옆에 있는 이곽에게 말했다.
“이곽 장군.”
“말하게.”
“설마 저 사람이……. 아니죠? 아닌 거죠?”
“저기 식량 자루를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젊은 남자가 바로 카일 화이트 백작이네.”
“그 백작이라는 작위가 혹시 낮은 직위인 겁니까?”
“우리 조나라로 치면 삼공 바로 아래의 구경 정도 되는 위치라고 하더군.”
“그런 고위 관료가 저런……. 혹시 작위만 높은 명예직인 겁니까?”
“그런 자가 외교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아서 머나먼 남쪽의 타지까지 오겠는가?”
“그건…….”
“심지어 이건들은 얘기지만 저 화이트 공은 저쪽 나라에서는 왕의 딸과 결혼한 부마라고 들었네. 그야말로 실세 중에 실세라는 말이지.”
“허어…….”
재림은 이제 허탈할 정도였다.
그가 알고 있는 고위 관료, 흔히 말하는 높은 사람들과 카일의 행동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재림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갔다. 더 이상 이곳을 조사하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럼 장군, 저는 왕도로 돌아가서 이 사실을 본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게. 왕도의 권력 싸움에 눈이 먼 대신들도 양심이 있다면 뭔가 느끼는 게 있겠지.”
그렇게 해서 재림은 왕도로 돌아갔고 정말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그 결과…….
“…….”
“…….”
“…….”
항상 시장판처럼 시끄러웠던 대신들이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특히 카일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 사마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조나라의 국왕은 그런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 가뭄에 홍수가 겹쳐서 대흉작이 겹쳤고, 백성들 중에 상당수가 굶어 죽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하지만…….”
왕은 중간에 말을 끊고 대전 안의 대신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이 중에 그 누구도 백성들을 위해서 재산을 내놓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었다.”
“전하 그것은…….”
“그 입 다물라!”
변명하려는 신하에게 왕은 성난 목소리로 일갈하며 입을 다물게 했다.
“대신들 중에 오히려 백성들의 위기를 틈타서 그들이 살고자 내놓은 땅을 사들여서 재산을 늘린 이들이 있음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는가?”
왕의 말에 상당수의 신하들이 급격하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송구하옵니다. 전하.”
“자국의 대신이라는 자들은 백성들의 궁핍함을 틈타서 자기 재산을 불리고, 먼 타 대륙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이 오히려 내 백성들을 도와주니, 짐은 기쁘면서도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가 없도다. 신들은 아니 그런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송구하옵니다. 전하.”
대신들은 그저 넙죽 엎드리며 사과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들로서는 카일이 그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 괜한 짓을 해가지고…….’
‘아니 사절단이 왔으면 사절로서의 업무에 집중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망할 놈들 같으니라고.’
대신들은 속으로 카일을 욕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유 대사농은 들으라.”
“예. 전하.”
조왕은 대륙 간 해양 무역에 호의적인 대신의 필두격인 유 대사농을 불러서 말했다.
“청도 궁을 비워서 사절단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그들이 짐의 백성들에게 보여 준 후의에 부끄럽지 않도록 극진하게 대우하여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조왕은 왕궁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청도 궁을 비우고 거기에서 사절단을 맞이하기로 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조 사마가 말했다.
“전하, 청도국의 사신들 중에서도 왕족에 준하는 이들이 왔을 때만 그곳에 기거함을 허하는 법도가 있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국왕이 나서기도 전에 유 대사농이 먼저 말했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 없지 않습니까? 전령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사절단의 대표는 왕의 부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왕족의 일원이라고 칭해도 다를 게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는 천하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북방의 야만인일세. 유자의 도리도 모르는 그런 나라를 어찌…….”
“그만! 조 사마는 그 입을 다물라.”
조왕은 평소 신하들의 권력의 균형을 위해서 한쪽만 편드는 일은 자제했다. 보통 양쪽 다 칭찬하거나, 양쪽 다 나무라는 쪽으로 신하들의 세력 구도를 맞춰 왔다.
다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유자가 말하기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봤을 때 외면하지 않아야 의인이라고 하였다. 멀리 타국에 와서도 가난한 이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재산을 기부한 이들을 어찌 폄하하는가?”
“전하, 그들의 행동 자체는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그 내면에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는 이른 듯합니다.”
“그만하라고 했다. 어찌 그렇게 의심이 많은가?”
왕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언하듯이 말했다.
“사절단은 청도 궁에서 맞이한다. 또한 그들에 대한 대우 역시 다른 나라의 정식 사절단과 같은 대우로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어긴다면 엄중하게 벌을 줄 것이다.”
그리고 조왕은 그대로 대전을 떠나며 중얼거렸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외면하지 못한 의로운 행동에 무슨 속뜻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 * *
“내가 다 속뜻이 있어서 이런 거야.”
카일은 뜨거운 욕조에서 몸을 녹이며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속뜻이요?”
카일과 같은 욕조 안에 들어와 있는 발레리아가 말했다.
“그래. 괜히 시간과 돈을 들여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그래요? 저는 그냥 주인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런 줄 알았어요.”
“훗, 내가 레이나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은 아니야.”
카일은 발레리아의 뽀얀 피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욕조 속에서 수분을 머금어서 촉촉해진 발레리아의 피부는 카일의 손길에 환상적인 감촉을 선사해 주었다. 카일은 지극한 행복감을 느끼며 자기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발레리아를 쓰다듬었다.
카일은 차분히 발레리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조나라와 중계 무역을 해야 하잖아?”
“그렇죠.”
“하지만 조나라는 오랜 시간 동안 국경을 닫고 쇄국 정책을 일관해 왔어. 그들이 왜 그랬다고 생각해?”
“글쎄요. 외부의 침략을 두려워해서인가요?”
“맞아. 정답이지.”
카일은 발레리아가 정답을 맞힌 것을 축하라도 하는 듯이 그녀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외부의 침략에 두려워서 국경을 봉쇄하고 잔뜩 웅크린 이들의 모습은 등딱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거북이와 같아. 그렇다면 그런 거북들이 다시 머리를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아! 아이 참, 주인님.”
“아 미안, 재미있어서 그만…….”
카일이 어딘가에 짓궂은 장난을 쳤는지 발레리아가 샐쭉한 표정을 화를 냈다.
카일은 그런 발레리아의 입술에 사과의 의미를 담아 가볍게 키스를 하고 말을 이어 갔다.
“거북이가 등딱지 안에 숨은 것은 외부의 위협 때문이지. 그러니 반대로 다시 나오게 하려면 등딱지 밖도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주면 돼.”
“아, 그래서 주인님이 호의를 베푸신 거군요? 우리가 이 나라에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요.”
“맞아. 내가 아무리 많은 황금이나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와서 상업적으로 이득이 된다고 어필을 해도 쇄국을 주장하는 신하들은 그 의견을 바꾸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들이 쇄국을 주장하는 이유는 번영이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이기 때문이지.”
조나라를 설득하기 위해서 카일이 동원하는 방법은 당근과 채찍이 아니라 양손에 당근이었다.
이곽의 말에 의하면 이미 조나라 안에서도 개방을 원하는 이들은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번영과 발전이라는 당근을 내밀어 주고, 쇄국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안전과 우호라는 당근을 내밀었다.
그렇게 양쪽 모두를 설득시킬 수 있는 카드를 준비함으로써 카일은 이번 일의 성공률을 높이려고 한 것이다.
실제로 이런 카일의 전략은 상당 부분 통했다.
쇄국을 주장하는 조 사마의 일파들 중, 양심 있는 이들 상당수가 카일의 선행을 보고 감탄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카일에 대한 감정을 호의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조 사마 본인처럼 카일이 간교한 모습을 보인다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쇄국파의 내부 여론을 흔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일이 조나라의 백성들에게 자선 사업을 한 효과는 충분했다.
거기다 가장 결정적으로 조나라의 왕이 카일의 행동에 크게 감탄했다.
카일로서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왕도에 가봐야 알겠지. 그래도 마냥 헛수고는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