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어느 정도 통한 것 같군.’
연신 감탄하며 홍차를 마시는 상대를 보고 카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남대륙에는 없는 문화를 과시하면서 상대방을 감탄시키겠다는 전략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았다.
상대는 홍차를 충분히 즐겼는지 카일을 보고 말했다.
“그대가 적의를 가지고 우리 바다를 침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소.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우리 나라에 찾아온 것이오?”
카일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본론을 꺼냈다.
“고르시파 왕국의 백작으로서 남방 대륙의 조나라와 국교를 수립하고 동맹을 맺기 위해서 찾았습니다.”
“흐음, 동맹이라…….”
이곽은 자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말하기를.
“본관은 그저 나라의 바다를 지키는 무장일 뿐이오. 그대가 말한 것에 대한 권한은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나라의 상층부에 가장 먼저 보고를 하는 건 장군이시겠죠?”
“그건 그렇소만…….”
“부디 우리 뜻을 최대한 좋게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전달했다.
중앙 대륙의 술, 보석, 드레스, 예술품 등등.
거기다 무역이 성공할 시 도입할 카일의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아티팩트까지 포함이었다.
“오오, 이런 보물들을…….”
이곽은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물건들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여기 있는 물건들은 조나라와 무역 조약이 체결되면 모두 조나라를 통해서 판매될 물건들입니다.”
“과연, 훌륭하오.”
이곽은 카일이 보여 주는 물건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는 카일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카일 공의 호의에 크게 감탄했소. 조정에는 본관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고를 하겠소.”
“감사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장군에게도 섭섭지 않게 답례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카일은 이곽에게 선물을 잔뜩 쥐여 줘서 돌려보냈다.
‘일단 첫 단추는 끼웠군. 잘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앞으로 보면 알겠지.’
* * *
조나라의 대전.
붉게 칠을 한 기둥에 화려한 황금 장식이 더해진 이곳의 건축 양식과 대신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 등등 모든 것이 중앙 대륙과는 달랐다.
다만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는 국가의 기조를 흐릴 셈인가?”
“그게 아니지 않소. 저들이 원하는 건 그저 무역일 뿐이라고 했소.”
“어허어! 나라에 망조가 들었구나? 어찌 이런 무도한 이들이 국가의 대전에서 정사를 논한단 말인가?”
“바로 옆의 이웃 국가인 연나라가 북방 대륙과의 무역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는지 모두 알지 않소?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란 말이오?”
“전하! 이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간신들의 목을 치시옵소서.”
“지금 말 다 했소?!”
조나라의 국왕은 대전에서 대신들이 싸우는 꼴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나라냐?’
공통점이라면 이거다.
정치판은 어디를 가도 개판이었다.
이래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를 가도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 모양이다.
원래 조나라는 오랜 세월 동안 강경한 쇄국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하고 자국에서 나는 물산으로 자급자족을 하며 국가를 운영해 갔다.
수백 년 전에 남방 대륙인들이 말하는 천하(天下)가 전란에 휩싸여 있었을 때, 조나라는 이 쇄국 정책으로 국경을 굳건하게 잠그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적을 틀어막아 국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후로 ‘조나라의 외교 기조는 간섭하지 않으며 간섭받지 않는다.’라는 것을 일관되게 지켜 왔다.
당시에는 그게 좀 통하긴 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것은 시대에 맞춰서 변화하는 법이다.
조나라가 쇄국 정책으로 문을 닫고 있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점점 발전하면서 조나라와의 국력 차이를 벌려 가기 시작했다.
특히 연나라.
조나라와 서쪽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연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북방의 색목인들의 국가와 교류를 하기 시작하더니 어마어마한 부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를 기반으로 해서 점점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건 조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각하게 와닿는 문제였다.
원래 조나라 사람들은 연나라를 동생 국가라고 생각했다. 원래 조나라의 왕족이 독립을 하면서 서쪽에 만들어진 나라가 연나라였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에는 연나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조나라에 조공을 바쳤을 정도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일이 틀어지면서 몇 번의 전쟁도 했지만, 그 전쟁은 대부분 조나라의 승리로 끝났었다. 하지만 북방과 대륙 간 해양 무역을 기반으로 점점 국력을 키워 간 연나라는 이제 조나라가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가장 마지막에 벌어졌던 조나라와 연나라의 국지전에서 연나라는 조나라에 압승을 거두었고, 더 이상 조나라에 조공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조나라는 여기에 크게 자존심이 상해서 몇 번이고 반격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연나라의 국력은 조나라의 것보다 훨씬 앞서고 있었다.
그제야 조나라의 몇몇 사람들은 깨달았다. 쇄국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수백 년간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 실수였다고 말이다.
그들은 뒤늦게라도 국경을 열고 외부와 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연나라처럼 북방의 색목인들과 대륙 간 해양 무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주장할 때는 항상 거기에 반대하고, 지금까지의 정책 노선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나오는 법이다.
그들은 쇄국 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오히려 국경을 더 단단하게 걸어 잠그고 나라의 내부에서 힘을 축적하면 다시 연나라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양쪽의 주장은 치열하게 대립했고 지난 100년간 조나라 국정을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끄럽게 했던 주제였다.
그러던 중, 카일이 나타나서 예물을 보내고 국가 간의 무역을 원한다고 말한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과 같았다.
“전하, 이들이 보낸 예물을 보십시오. 무엇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특히 마법이라는 이물로 만들어 낸 기물은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옵니다. 이번 기회에 그들과 통교를 하시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시옵소서.”
조나라 국왕이 보기에도 카일이 보내 준 물건은 귀하게 보였다.
예술품이나 보석류의 보물도 귀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매료시킨 것은 아티팩트라는 물품이었다.
북방 대륙에서 마법이라는 기술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생활을 몹시 편리하게 했고 유용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연나라를 통해서 아주 소량만 구할 수 있었기에 몹시 비싼 돈을 주지 않으면 구하기도 힘들었다.
‘이번 기회에 통교를 하면 연나라를 통하지 않고서도 저 기물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나라의 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신이 나서서 일갈했다.
“유 대사농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전하, 이렇게 사특한 물건 따위에 미혹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요망한 물건 따위가 없어도 우리 조나라는 천 년을 굳건하게 존재해 왔습니다.”
“조 사마야말로 어찌 모르십니까? 이번 기회가 사실상 우리 조나라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소. 이대로 국경을 틀어막고 고립되어 봐야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망국의 운명밖에 없소!”
“어허! 감히 어디라고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야? 자고로 외부의 환란에서 거리를 두고 내부를 다스리며 백성은 부지런히 일하며 왕이 어질게 다스리면 나라의 천명은 바로 서는 법. 감히 망국이라는 망측한 말을 내뱉다니?”
“조 사마처럼 수백 년간 천명이니 뭐니 하면서 천 년 전의 유학이나 입에 담은 이들이 나라를 망쳐 왔다는 것을 왜 모르시오? 아니면 알면서 부정하는 것이오?”
“네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 사대에 걸쳐 삼공의 직을 담당한 이 ‘조’가의 장을 능멸해?”
“진짜 나라를 위한다면 공의 조상들이 지금의 당신을 보면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오?”
“네 이노오오옴!”
쾅!
“그만! 그만들 물러나라!”
양쪽의 대립이 심각해지려고 하는 찰나에 조나라의 왕이 나섰다.
그는 옥좌를 내려치며 크게 분노했고 동시에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심하군. 여기가 진정 국가의 대소사를 논하는 대전이란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송구하옵니다. 전하.”
조나라의 국왕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지금 그 카일이라는 색목인은 어디에 있다고 하는가?”
국왕의 말에 카일의 제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물이 반색하며 말했다.
“보고에 의하면 지금은 이곽 장군의 책임하에 고창항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대신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지금 외부인이 신성한 조나라의 국토에 발을 들였단 말이오? 이곽 장군은 무슨 권한으로 그런 망측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오?”
“닥치시오. 이곽 장군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예의를 아는 인물로 우리 조나라의 법률을 존중해서 배 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오.”
“뭐시라? 그렇다고 해도 우리 나라의 항구에 배가 정박한 것은 사실이 아니오? 전하, 이곽 장군을 수도로 불러 엄하게 문책해야 하옵니다.”
“그만! 이 이상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두라.”
국왕은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대신들에게 말했다.
“문제를 논하는 것에 있어서 당사자가 없으니 결론이 나지 않는다. 카일이라고 하는 북방 대륙의 색목인을 대전으로 불러라. 그와 대화를 해보겠다. 이것은 짐의 어명이니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
“예. 폐하. 참으로 영민한 판단이십니다.”
조나라 왕의 결론에 한쪽은 크게 기뻐했고 다른 한쪽은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화이트 공, 안에 있으십니까?”
“이곽 장군.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매일 오던 시간이 아니군요?”
카일은 자신의 배 위에까지 직접 올라온 이곽을 편하게 대했다.
두 달 정도 알고 지내면서 거의 매일같이 만남을 가졌기에 이제 둘은 꽤 친해졌다.
카일은 이곽과의 대화를 통해서 조나라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곽 역시 신비한 이대륙에서 온 카일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이곽이 찾아온 것이다.
카일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곽을 바라봤고, 이곽은 그런 카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드리오, 화이트 공. 왕도에서 허가가 떨어졌소.”
“허가라 하시면…….”
“왕께서 그대를 뵙고자 하시오.”
그 말에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군.’
만약 조나라의 반응이 생각보다 강경하면 꽤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이 카일을 수도로 불렀다. 이것은 대화를 해볼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이곽의 말에 따르면 조나라의 정계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고 했었지.’
이제 거기에 가서 왕을 설득하고 대륙 간 해양 무역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카일의 능력에 따라 달렸다.
그러기 위해서 카일은 몇 가지 준비를 더 했다.
* * *
카일이 머물고 있는 고창항에서 조나라의 수도인 연주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보름 정도였다. 준마를 타고 단독으로 달리면 좀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겠지만, 보통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상행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걸리는 시간은 그 정도다.
그러니 조나라의 왕도 카일이 그 정도 시간이 걸리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다 되도록 카일과 그 일행은 오지 않았다.
이에 조나라의 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안내가 붙었으니 길을 헤매는 것은 아닐 테고, 일부러 늦장을 피운다는 것인가? 감히 짐의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조나라의 왕은 내심 교역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편에서 예의를 다 하고 자국에도 이득이 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의 일이지.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교역 따위를 허락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런 왕의 불편한 마음을 눈치챈 조 사마가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북방의 색목인들은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야만인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들과 국교를 나누는 것이 가당키나 하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령을 보내서 국외로 추방하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그 말에 반대편에 있던 유 대사농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전하,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사고가 생긴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사람을 보내서 사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의견에 조나라의 왕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전령을 보내서 어떻게 된 연유로 이렇게 늦는지 알아보라고 하라. 그리고 별 이유도 없이 이렇게 늦었다면 짐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하겠다.”
“전하의 어명을 받듭니다.”
“전하의 어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조나라의 전령 하나가 발 빠른 준마를 타고 서둘러 달려갔다.
며칠 후.
전령은 급하게 수도로 귀환해서 왕을 알현했다.
“전하, 북방의 사절단이 늦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냐?”
“그게 실은…….”
그리고 전령은 자신이 봤던 것을 그대로 왕에게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