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조나라.
남방 대륙의 국가 중 하나이며 그 성향은 폐쇄적이고 군사력 증강에 많은 힘을 기울이는 나라다.
국경을 이웃하고 있는 연나라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해온 관계이다.
그리고 이 정도가 카일이 알고 있는 조나라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후우……. 정보가 적어도 너무 극단적으로 적군.”
카일은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읽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카일의 옆에는 발레리아가 손수 드립한 커피를 내주며 말했다.
“주인님답지 않게 많이 긴장하시네요.”
카일은 피식 웃고 커피를 받으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조나라와의 외교는 내 계획 중에서도 가장 많은 변수가 작용할 수 있는 분야니까 말이야.”
“그런가요?”
“음, 서로 아는 게 너무 없어.”
사전에 준비를 하여 대처하기에는 조나라는 너무 미지의 상대였다. 가능한 만반의 준비를 해서 대처하기는 하겠지만, 언제까지 잘 통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카일은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덕분에 가장 운이 좋은 것은 한동안 카일을 독차지하게 된 발레리아였다.
“커피 향이 좋은데? 실력이 늘었구나.”
카일이 감탄하는 말을 듣고 발레리아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좋은 건 커피 향뿐인가요?”
발레리아는 카일의 뒤편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어깨 너머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소에는 당당하고 절도 있는 기사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카일과 단둘이 되었을 때의 발레리아는 여자로서 유혹적인 모습을 마음껏 어필했다.
막 결혼한 클레어는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고, 아리시아와 레이나도 카일이 맡긴 임무에 집중하고 있다.
장미 기사단의 여기사들도 카일에게 귀여움을 받은 적이 몇 번은 있었지만 그건 그저 짧은 밤의 유희였을 뿐었다.
고로 현재 카일의 여자로서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자신뿐인 것이다.
그녀는 그 달콤한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둘은 시도 때도 없이 서로를 갈구했고 어떨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침실에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기도 했다.
배 안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 또한 두 사람이 욕정을 불태울 수 있는 좋은 이유였다.
카일은 고개를 돌려 발레리아의 촉촉한 뺨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커피보다 네 향기가 훨씬 매혹적이지.”
“그럼…….”
발레리아는 카일의 귓불에 살짝 키스를 하더니 자기 몸을 카일의 등에 밀착시키며 아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드시겠어요?”
“안 그럴 이유가 없지.”
그리고 카일은 그대로 발레리아를 끌어안고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서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아아…….”
카일의 손길에 발레리아의 입에서는 애절한 한숨이 흘러나왔고 둘은 자연스럽게 격정적인 키스로 서로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주군, 조나라의 해군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
멈춰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크흠, 발레리아. 유감이지만…….”
“예, 어쩔 수 없죠.”
“나머지는 오늘 밤에 하자고.”
“기다릴게요. 주.인.님.”
그리고 두 사람은 아쉬움에 짧게 입맞춤을 한 후에 서로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어느새 깔끔한 귀족과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 *
“장군, 적들이 대화에 응할 생각인가 봅니다.”
“아직 적이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장군.”
조나라의 해군 병력을 거느리고 해안선을 순찰하던 남자는 눈앞의 거선을 보고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하들은 그런 상관의 모습에 믿음직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역시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 적이라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거지?’
지금 그의 눈앞에는 자신이 타고 있는 군선보다 족히 열 배는 더 커다란 모습의 거대한 철선(鐵船)이 보였다.
소속 불명의 배이기에 일단 정지를 명령했고, 대화를 하기 위해서 책임자를 호출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만약 이것이 적으로 돌변해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내린 결론은 제발 저 철선이 적의 함선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이었다.
단 한 척일 뿐이지만, 아군의 배보다 열 배는 더 커다란 검은색의 철선은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있는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부하에게 함부로 적으로 단정 짓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도 그래서였다.
다행히 상대는 대화에 응할 것 같았고, 잠시 후 철선의 위에서는 커다란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대표자분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십시오. 안쪽에 대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상대의 말에 그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 혼자서 정체도 알 수 없는 배에 올라탈 수는 없다.”
“호위를 위한 병력을 대동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따르는 군관들을 데리고 하나둘씩 줄사다리를 타고 철선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철선의 위에 올라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본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장미 기사단의 단원 제니아라고 합니다.”
“선녀?”
“예?”
“아… 아니, 아니오.”
그는 순간적으로 제니아의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에 넋을 잃어버릴 뻔했다.
제니아가 선녀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그냥 넘어간 듯했지만 그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애써 굳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본관은 조나라의 장군직을 맡고 있는 이곽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니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내했다.
이곽은 그 안내를 따라가면서 예리한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했다.
‘대단하군. 배라는 것을 이렇게 크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인가? 더구나 배 위의 병사들도 모두 군기가 엄정한 것인 중예 중에 정예로구나.’
이곽은 이미 상대편이 자신과 같은 천하(天下)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먼 북쪽의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고 짐작했다. 올라탄 배의 사람들의 피부와 머리카락의 색깔이 다른 것만 봐도 그건 이미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북쪽의 색목인들과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북쪽의 색목인들은 문화적이고 야만적으로 뒤떨어진 나라의 인물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조나라는 중앙 대륙과 교역을 하지는 않지만 옆에 있는 연나라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북방의 색목인들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야만인들이라서 자신들의 예술품이나 술, 비단 등에 기꺼이 비싼 돈을 주고 사가는 이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올라탄 배의 모습은 도저히 야만적인 북방 색목인들의 배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배 위에 올라타 있으면 자신들이 더 뒤떨어진 문명의 인간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니,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사람이니 만나 봐야 알겠지.’
그렇게 판단을 하는 사이 이곽과 그 일행은 카일이 기다리고 있는 선실의 안으로 안내되었다.
“주군,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제니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환영하오. 조나라의 손님이여.”
그곳에는 깔끔한 슈트 차림을 하고 있는 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흠, 조나라의 장군직을 맡고 있는 이곽이오.”
“싱카라 연합 제국 소속의 고르시파 왕국의 백작, 카일 화이트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카일의 소개에 이곽은 마주 고개를 숙이며 카일과 인사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카일은 그를 응접실의 커다란 원탁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뭔가 마실 것을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차가 있으면 주시오.”
이괄은 거절하려고 하다가 차를 원한다고 말을 바꿨다.
‘어디 어떤 것을 내오나 보도록 하자.’
미지의 상대이니만큼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카일은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발레리아. 나는 커피를, 그리고 여기 이곽 장군에게는 홍차를 내오도록.”
“예. 주군.”
그리고 직접 차를 우려내는 발레리아의 모습에 이곽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아……. 저 여인도 무척 아름답구나. 붉은 꽃잎처럼 진한 적색의 머릿결이 저렇게 어울릴 수가 있었단 말인가? 북방 색목의 여인들은 모두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런 이곽의 모습에 카일은 피식 웃었다.
‘그래. 실컷 보고 실컷 감탄해라.’
지금 이곽의 눈에 새겨지는 것, 귀에 들어오는 것 모든 것이 카일이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한 포석이다. 커다란 철선과 그 배에 타고 있는 장미 기사단의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배 안에 마련한 호화 응접실까지 말이다.
상대방의 기를 죽이고 이쪽이 더 발전된 기술과 문화를 보유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어필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카일의 영지에서도 아직 한 척밖에 만들어지지 않은 이 거대 철선을 끌고 온 것이다.
블랙 드래곤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배는 카일이 마법사들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 낸 최신의 기술이 집약된 배로, 단순한 철선이 아니라 마석을 이용한 내연 기관을 달아서 스크류 엔진까지 탑재한 최신형의 배이다.
이 블랙 드래곤 한 척을 건조하는데 들어간 돈은 평범한 범선 100척을 건조하는 것보다 더 들어갔다.
이 크고 강력한 배를 직접 끌고 온 이유는 카일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외교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기 나왔습니다.”
발레리아는 카일과 이곽에게 음료를 내왔다.
카일은 익숙하게 커피를 받아서 마셨고 이곽은 자신에게 낯선 홍차를 받고 망설였다.
“이것은… 처음 보는 차로군요.”
“홍차라고 합니다.”
“흐음…….”
이곽은 조심스럽게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호오오?”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나왔다.
평소 자신이 마시든 은은하고 쌉쌀한 향기의 차도 좋았지만, 이 홍차라는 것도 특별한 매력의 풍미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홍차의 여운을 음미하던 이곽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훌륭하군요. 이것은 공의 고향에서 나오는 찻잎입니까?”
“예. 오래전에 남대륙에서 수출한 차나무를 우리 쪽에서 재배해서 수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그중에 한 종류죠.”
“호오, 신기하군요. 같은 차나무라고 해도 자라는 풍토가 다르면 이렇게까지 맛이 달라지는 건가?”
“그게 이국의 매력이라는 것이겠죠.”
사실 홍차와 녹차는 가공 과정이 달라서 맛이 극명하게 바뀌는 것이지만, 카일은 그걸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