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이, 이게 무슨?”
비토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데드가 카일에게 가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충성 어린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진심으로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일은 그런 비토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용의주도한 사전 준비를 해두면 회담이 참 편리해지지.”
“…….”
“알았으면 앉아라.”
“읏…….”
비토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무언가에 부딪혀서 멈췄다.
돌아본 그곳에는 검은 바람이 싸늘한 눈으로 비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 데드가 그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내며 압박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당했다.’
그 순간 비토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사방에는 적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망연자실한 비토를 보고 카일이 검은 바람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주인님의 명에 따라라.”
검은 바람은 그대로 비토의 어깨를 잡고 강하게 눌렀고 비토는 그대로 카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버렸다.
“큭…….”
무릎을 꿇은 비토는 분한 표정으로 카일을 노려보려고 했지만 그마저 이루지 못했다. 검은 바람이 비토의 머리를 내리눌러서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비토는 그 상태로 카일에게 말했다.
“데드를 언제부터 자기 사람으로 만든 거지?”
“피바다 라킨을 죽인 직후.”
“그, 그렇다면…….”
비토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아르트라를 데드가 장악하고 있는 결과조차 카일이 뒤로 손을 써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 그 누구도 몰랐다.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환락의 도시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싱카라 연합 제국의 귀족.
자수성가로 성공한 초일류 모험가.
카일에 대해서 뒷조사를 한 비토도 이 정도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비토도 카일이 아르트라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거물이었단 말인가?’
비토는 카일에 대한 분노보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더 크게 들었다.
카일은 그런 비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내게 절대 복종하겠나? 아니면 주겠나?”
카일의 말에 비토가 말했다.
“복종한다고 하면 내가 얻는 게 뭐지?”
“너를 게오르그 왕국의 왕으로 만들어 주마.”
“…….”
남의 나라 왕위를 당연하다는 듯이 장담하는 카일이었다.
그런 카일의 모습에 비토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인가?’
카일이 한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비토는 모든 인간관계를 위아래로만 인식하는 인물이다. 결코 대등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상대를 자기 아래로 내리눌러서 거느리는 것이 좋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인물도 있는 법이다. 지금 비토에게 있어서는 카일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는 반항이 수그러진 목소리로 자기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놔라.”
검은 바람은 카일에게 눈빛으로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카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구속이 풀린 비토는 자기 의지로 카일에게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충성을 맹세합니다.”
“좋다.”
“약속은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대신 너는 종속 계약을 맺어야겠다.”
카일의 말에 비토는 화를 내기보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철저하시군요.”
“그런 편이지.”
카일을 윗사람으로 인정한 이상 거기에 종속되는 것조차 받아들이는 비토였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특수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인식한 것이다.
그렇게 카일은 게오르그 왕국의 3왕자 비토 루드 게오르그를 자기 부하로 만들었다.
‘이제, 포석은 다 깔렸다.’
진짜로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위한 사전 준비에 들어갈 때가 온 것이다.
* * *
카일의 장점은 일을 준비할 때 굉장히 철두철미한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모험가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독립을 결심했을 때도 열여섯이 될 때까지는 오만 가지 구박을 받고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았다.
모험가로 독립한 후에도 자신의 힘이 외부로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고, 반드시 필요한 인간관계가 아니라면 자제했다.
덕분에 인간 불신의 이상한 놈으로 찍히기도 했지만 말이다.
남방 대륙과의 무역.
이것은 카일이 빅토르와 첫 만남을 얘기했을 때부터 꺼내 든 공약이었다. 그것이 벌써 5년 전의 일이었지만 카일은 섣불리 진행하지 않고 꾸준하게 준비만을 거듭 해왔다. 철두철미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번에 게오르그 왕국의 3왕자인 비토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계획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우선 비토를 통해서 게오르그 왕국의 해군을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서 움직였다.
“군사 동맹이라……. 이게 네가 말한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얘기라는 것이냐?”
비토와 카일이 체결한 조약서를 눈앞에서 팔랑팔랑 흔들면서 심드렁하게 말하는 중장년의 남자. 이 남자가 발로 비토의 아버지이자 현 게오르그 왕국의 국왕인 루시드 판 게오르그였다.
비토는 주변을 물리고 단둘이서 만난 자리에서 루시드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진행하는 카일 화이트 자작과 함께 저희도 남방 대륙과의 무역에 동참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멀고 먼 바다까지 가서 베르나도 왕국의 무역선을 상대로 해적질이나 할 수는 없습니다.”
비토의 말에 루시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략 해적은 우리 국가의 중요한 기반 산업이다.”
“덕분에 전 대륙에서는 우리를 해적 국가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우냐? 네가 먹고 자라면서 들어간 빵 한 조각부터 입고 있는 옷 한 벌까지 모두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다.”
“아버지는 앞으로도 평생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버릇이 없구나.”
카일과의 동맹에 대해서 루시드 국왕은 회의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부자지간의 모습일 수도 있다.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미래를 바라는 아들.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현재를 관철하려는 아버지.
가업을 대대로 이어가는 집안에서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그 가업이 해적질이라는 게 좀 그렇지만 말이다.
루시드가 비토에게 말했다.
“카일 화이트라는 놈이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성공시킨다는 보장은 있느냐?”
“제가 만나 본 결과, 충분했습니다.”
“네 판단을 믿고 동맹을 덜컥 받아들일 수는 없다. 너는 아직 국왕이 아니야.”
“…….”
“놈을 내 앞에 데리고 와봐라.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루시드가 거만하게 하는 말을 듣고 비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쉽지만 그는 오지 않을 겁니다.”
“왜지? 무섭기라도 한가?”
“그보다 자신이 오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시간을 쪼개 여기까지 와서 해결할 리가 없지요.”
“…뭐라고?”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긴 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내 아버지였으니까요.”
비토의 말을 끝으로 루시드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불쑥하고 튀어나왔다.
푸우욱!
“커어억…….”
루시드의 등에서부터 가슴까지 뚫고 나온 것은 누군가의 칼날이었다.
“누, 누…구……?”
고개를 돌린 루시드의 눈에 보인 것은 허공에서 서서히 나타난 한 명의 다크 엘프, 카일의 직속 특수 부대의 장 레이븐이다.
그가 직접 나서서 투명화 능력으로 루시드를 암살한 것이다.
쓰러지는 루시드는 비토를 보며 피거품을 물고 말했다.
“너… 러고… 도…….”
죽는 와중에도 협박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비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는 와중에 걱정도 많으십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만 가십시오.”
“크… 크그르르…….”
루시드는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더 이상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핏발이 선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며 그는 숨을 거둬 갈 뿐이었다.
“…….”
비토는 쓰러진 아버지에게 가서 눈을 감겨 주고 무언가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끔하게 털어 낸 모습을 하고 레이븐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소.”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다음의 뒤처리를 못 하면 골치 아파질 텐데? 왕실 근위군은 오직 국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군이오.”
게오르그 왕국의 골육상쟁은 유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제끼리다.
국왕을 향해서 칼을 겨누는 경우는 극단적으로 적다. 게오르그 왕국의 왕실 근위군을 국왕이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시죠. 우리에게 다 수가 있으니.”
그리고 레이븐이 한쪽을 바라보니 그곳에서 한 명의 병사가 들어왔다.
평범한 왕국의 병사로 보이는 남자였지만, 그는 레이븐에게 다가오더니 이목구비의 형체가 완전히 흐물흐물해 지면서 날달걀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에 비토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플갱어?”
“그중에서도 이 친구는 특별하죠. 노 페이스.”
“…….”
레이븐의 명령에 노 페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루시드 국왕의 시체에 다가가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쓰러진 루시드의 몸이 그대로 노 페이스의 몸에 흡수되듯이 사라져 갔다.
“호오? 도플갱어가 아니었던 건가? 저런 건 처음 보는군.”
“아뇨, 도플갱어는 맞습니다. 다만 저 친구는 좀 더 특별하죠.”
보통의 도플갱어는 상대방의 모습을 훔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노 페이스는 카일에게 사이코 메트리라는 능력을 부여받아서 상대방의 기억이나 습관도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능력이 더 강력해지며 최근 들어서는 노 페이스 본인조차도 자신이 흡수한 상대라고 착각할 정도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윽고 그 자리에는 완벽하게 루시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노 페이스가 있었다.
“대장님, 이제 됐습니까?”
“그래. 너는 별도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루시드 국왕의 모습을 하고 여기 비토 왕자를 도와라. 그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협조하고 차차 그를 다음 왕위에 올려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레이븐은 그대로 허공에서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루시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노 페이스와 단둘이 남은 비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끝까지 거부했다면 내가 아버지처럼 되었겠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르트라에서 카일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저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비토는 절대 카일에게 거역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더 굳혔다.
* * *
게오르그 왕국과 고르시파 왕국의 군사 동맹.
대외적인 동맹이 결정되었다.
체결의 협정 자리에 나온 것은 외교관을 전면적으로 이어받은 카일 화이트 백작과 게오르그 왕국의 3왕자인 비토 폰 게오르그 왕자.
그 둘이 조약서에 정식으로 사인을 함으로써 두 나라 간의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은 인근 연안에서 해적 세력의 말소를 위해서 서로 힘을 합치겠다고 천명했다.
대외적으로 밝혀진 정보는 이 정도였지만 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카일이 음지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카일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우선 회의를 모집해서 가신들을 모아서 지시를 내렸다.
“검은 바람, 호크.”
“예. 주인님.”
“예. 주인님.”
“두 사람은 아르트라의 데드와 게오르그 왕국의 해군과 연계해서 남쪽 해역의 해적들을 싹 쓸어버려라. 씨를 말려야 한다는 각오로 임해라.”
어느새 1만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호크와 강력한 투란족의 전사들을 이끌고 있는 검은 바람. 이 둘이 함께한다면 넓은 범위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해적들의 씨를 말릴 수 있을 것이다.
“예. 주인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너는 탐색대를 이끌고 해적 군도를 찾아서 중계 무역지로 쓸 만한 섬을 찾아라. 수원이 풍부하고 섬의 크기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 좋다.”
아리시아는 지금은 카일의 개인 비서 같은 위치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원래는 던전에서도 탐색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당시 아리시아가 거느리고 있던 사냥꾼 출신의 탐색대 부대도 아직 그 형태는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능력은 군도들 사이를 뒤지면서 적합한 중계지를 찾는 것에 가장 적절하다.
“예. 알겠습니다.”
아리시아는 카일과 떨어지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떨어진 명령에는 절대 순종했다.
“에이라. 레이나.”
“예. 영주님.”
“말씀하십시오.”
정식 회의장에서는 에이라도 남매의 관계에서 벗어나서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내가 없는 동안 영지의 전권을 맡긴다. 행정은 물론이고 신규 사업까지 모두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카일과 같은 현대적인 관점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더 유능한 행정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에이라는 영지를 맡기기에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거기다 영지민들에게 존경을 넘어 사랑받고 있는 레이나까지 함께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다.
“발레리아.”
“예. 주인님.”
“너는 나하고 같이 배를 이끌고 조나라로 향한다.”
“예. 알겠습니다.”
조나라와의 외교 협정은 카일이 직접 가서 해결하기로 했다.
발레리아와 그녀가 이끄는 장미 기사단은 그런 카일을 호위하는 전력인 것이다.
조나라는 낯선 땅이고 이쪽에 우호적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기에 강력한 전력이 발레리아와 장미 기사단을 이끌고 함께 가는 것이다.
“그리고 클레어.”
“예. 말씀하세요.”
카일은 클레어에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개인 수련에 집중하고 있도록 해요. 당신이 원하는 모험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좀 더 실력이 필요할 거요.”
“예. 최선을 다할게요.”
그녀는 이미 익스퍼트급의 검사에 4서클 마스터의 마법사다.
모험가로서는 차고 넘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모험가로서의 수준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부족하다.
자신이 직접 클랜을 결성해서 무리를 이끌고 던전을 돌파하는 게 그녀의 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개인의 실력을 더 증진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수련뿐만 아니라 최근 카일이 각성시켜서 활성화를 시작한 초능력을 갈고닦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신의 능력은 던전 공략에 굉장한 도움이 되는 능력이오. 잘 갈고닦으면 빅토르 전하처럼 던전 공략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최선을 다하겠어요.”
의욕적으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은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아. 앞으로 1년 후. 우리는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시작할 것이다. 올해는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 준비 단계에 들어간다. 힘들겠지만 모두 최선을 다해서 따라와 주기 바란다.”
“예. 영주님.”
대륙력 531년 1월.
카일은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위해서 조나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