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비토는 게오르그 왕국의 제3왕자다.
충분히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서열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3왕자였던 것은 아니다. 순수하게 타고난 순서로만 본다면 그는 마흔두 번째 왕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면서 그 위에 있는 형제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고, 그러다 보니 비토의 서열은 3왕자로 당겨진 것이다.
죽은 형제들 모두가 비토의 손에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 열 명 이상은 비토가 손을 써서 죽인 것이었다.
42왕자라는 낮은 위치에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냉철한 판단력과 부하들을 다루는 단호함, 그리고 적을 처리하는 잔인함 덕분이다.
돈과 무력으로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이는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그것이 통하지 않는 인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암살, 독살. 심지어는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죽인 적도 있었다.
수단 방법 따위는 가리지 않았다.
비토 자신도 몇 번이고 비슷한 방식으로 죽을 뻔했는데,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골육상쟁의 인생을 걸어서 이제 손에 넣은 위치가 3왕자였다.
앞으로 두 명.
지금 비토의 위에 있는 두 명의 형들만 재낄 수 있다면 이제 비토는 게오르그 왕국의 국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직 자신의 위에 남아 있는 두 명의 형들은 결코 만만한 인간들이 아니었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동생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형제들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이 필요했지만, 이미 게오르그 왕국의 내부에서는 모든 군벌과 귀족들이 각자의 파벌을 정해 둔 상태였다. 권력의 이동 구조가 고착화되었다는 말이었다.
더 큰 힘이 필요한 비토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내부가 아닌 외부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눈을 돌렸다.
그러던 차에 마침 자신에게 접선해 온 카일 화이트의 제의는 무척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카일 화이트는 남방 대륙과의 국제 무역을 진행하기 위해서 게오르그 왕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원했다. 그 제안은 비토 왕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해외까지 발걸음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카일 화이트가 어떤 인물인지도 충분히 조사했다.
피바다 라킨을 죽이고, 게오르그 왕국의 북쪽 해역을 장악한 남자.
거기다 싱카라 연합 제국 소속의 귀족.
‘거래 대상으로는 충분하지.’
그는 카일과의 거래를 통해 자신이 게오르그 왕국의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카일 화이트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작업을 해둔다. 내가 유리하게 회담의 자리를 주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 왕자님.”
오로지 그 사전 작업을 하기 위해서 그는 카일과 약속한 날보다 먼저 찾아온 것이다.
* * *
일주일 후.
“…….”
아르트라의 호화 호텔에 자리를 잡은 비토는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약속 시간이 사흘이나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카일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시간을 내서 형제들 몰래 나라 밖으로 나온 비토의 입장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손실은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비토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지금 이렇게 늦는 것이 상대방의 고의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확신은 없다. 하지만 첫 만남을 앞에 두고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미묘한 신경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 음흉한 인물이군, 카일 화이트.’
예정에 없던 시간 낭비로 인해서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에 경각심이 들기도 했다.
“왕자님,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떠나버리시죠?”
부하들이 하는 말에 비토는 순간 그럴까 싶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직 기다린다. 여기서 돌아가면 정말로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아.”
“하지만 왕자님, 이대로는…….”
“그만, 이미 결정한 일이다.”
비토는 확고하게 자기 의사를 밝힌 후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은 인내심이 필요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드디어 비토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들려왔다.
“왕자님. 카일 화이트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지금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부하 중에 한 명이 일어나서 카일의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오겠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비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됐다. 그보다 놈들이 오면 말해라.”
“무슨 말을 말입니까?”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회담을 이틀 후로 미뤘으면 한다고 말이다.”
비토의 말에 부하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과연, 똑같이 갚아 주자는 것이군요.”
“역시 왕자님이십니다.”
카일 화이트가 일부러 약속 날짜에 늦게 도착한 것을 되갚아 주기 위해서 이쪽에서도 상대를 기다리게 하겠다는 의사였다.
“놈들도 며칠이나 늦은 것을 생각하면 다른 말을 하지는 못할 거다.”
“예. 알겠습니다. 왕자님.”
그렇게 부하에게 지시를 내린 후 비토는 입꼬리를 미묘하게 올리며 생각했다.
‘신경전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카일 화이트.’
그는 이미 회담은 시작되었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었다.
잠시 후.
퍽! 콰직!
혼자 방 안에서 쉬고 있던 비토의 귓가에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술렁거리는 소란은 자기 부하들의 목소리였다.
“지금 안 계신다고 하잖아!”
“이 자식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 커억!”
부하들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비명이 섞여 있었다. 비토는 직감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피하…….’
콰직!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비토가 머물고 있는 호텔의 문이 박살 나면서 누군가가 등장했다.
“여기 있었군.”
“누구냐?”
비토는 순간 당황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날카롭게 상대방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상대방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카일 화이트다.”
어쨌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난 것이다.
* * *
‘이해를 할 수 없군.’
비토는 카일과 마주 앉아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카일이 회담의 장소에 늦게 나타나면서 신경전을 걸어올 때부터 속으로 카일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치적 감각이 좋고, 상대방과의 회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세세한 부분을 신경 쓰는 모략가였다.
하지만 정작 눈앞에 나타난 카일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도 있었다.
강경 수단으로 비토의 부하들을 모두 두들겨 패고 강제로 들어와 자신의 앞에 선 카일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모략가가 아닌 저돌적인 전사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카일과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느낄 수 있었다.
검을 거의 잡아 본 적도 없는 자신에 비해서 카일의 몸에는 단련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원래 모험가라고 했었지.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했던 거야.’
비토는 자신의 잘못을 속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침착하게 현 상황을 파악했다.
아마도 카일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모가지 정도는 순식간에 부러트릴 것이다. 실제로 지금은 이 호텔도 카일의 부하들이 강제로 난입하면서 제압한 상태가 아닌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비토는 알고 있었다. 상대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때 겁을 먹고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끝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힘이 없다고 해도 깡을 보여 줘야 할 순간이었다.
결론을 내린 비토는 태연하게 카일에게 말했다.
“너무 늦게 왔군.”
“오기 전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그래? 시골 촌구석의 영주라도 나름 바쁘기는 한 모양이군.”
비토의 도발에 카일의 뒤편에 있던 검은 바람이 발끈하며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카일은 피식 웃으며 비토에게 말했다.
“돌려 말하며 질질 끄는 취미는 없다. 바로 본론을 꺼내지.”
“좋다.”
“나에게 복종해라, 비토 루드 게오르그.”
“…뭐?”
카일의 제안은 비토가 생각하던 범위를 아득하게 벗어나 있었다. 애당초 이것은 서로 간에 도움이 되기 위해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였다.
남방 대륙과의 무역을 위해서 바닷길의 안전을 필요로 하는 카일을 알았기에 비토는 그런 카일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나름의 대가를 얻어 내려고 했다.
분명, 그러기 위해서 모인 자리였다.
“너라는 인간을 좀 조사해 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하나 있지.”
“…….”
대답이 없는 비토를 보고 카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라는 놈은 들개와 같다. 인간관계를 자신보다 위 혹은 아래, 두 가지로밖에 나누지 못하는 놈이지. 대등한 동맹 같은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심하게 말하는군. 나에 관해서 얼마나 알아봤다고 그런 결론을 내린 거지?”
비토의 말에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말했다.
“직접 죽인 형제가 열셋. 그중에 왕자가 열, 공주가 셋이었지. 그리고 복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그들의 가족까지 통째로 몰살했더군. 아주 깔끔하게 말이야.”
“…….”
“동맹이라는 것은 서로 간에 신뢰를 기반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카일은 비토를 바라보고 불쌍하다는 듯이 연민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사람을 믿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살아왔다. 주변에 믿을 이는 하나도 없었고, 피붙이인 형제들을 죽이고 살아남는 게 당연하게 성장했지. 네 옆자리에 누군가를 두고 대등한 관계를 지속한다? 네놈한테는 절대 무리다.”
“…….”
여전히 대답 없는 비토를 향해서 카일이 단정 짓듯이 말했다.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따라라. 그렇게 하면 네가 원하는 게오르그 왕국의 왕위를 안겨 주겠다.”
여기까지 카일의 말을 끝까지 들은 비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내 옆에 대등한 누군가를 두고 사는 법을 알지 못한다.”
“자아 성찰이 빠르군.”
“하지만 말이다.”
비토는 카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왜 네놈의 아래로 들어가야 할까? 네놈이 내 밑으로 들어온다는 선택지도 있는데 말이야.”
“호오오……. 이 상황에서 호기를 부려 보겠다 이거냐?”
“못 할 것도 없지.”
비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오만한 시선으로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불리한 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카일은 그런 비토에게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거군.”
“당연하지.”
“그럼 어디 보여 봐라.”
“그럴 생각이다.”
비토의 말이 끝나갈 무렵 호텔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호텔 안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듯했고, 그걸 카일의 부하들이 제지하며 생긴 소란이었다.
“무슨 소란이냐?”
“확인해 보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은 직접 나가서 밖의 상황을 확인하러 나갔다.
비토는 더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협상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건 하수지. 주도면밀한 사전 준비를 해서 상대를 옭아매는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인 법.”
“네가 했다는 거냐?”
카일의 말에 비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누군가가 늦게 온 바람에 시간은 충분했거든.”
“…….”
비토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아르트라는 무법과 환락의 도시라고 불리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 만큼 나름의 질서가 있는 법이지. 네가 없는 동안 이 도시의 유력자를 포섭해서 내 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압박할 생각이었다, 이건가?”
“수단의 하나로 고려한 정도였지. 뭐, 네가 하는 짓을 보이 잘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비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바람이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비토는 함께 등장한 남자를 보고 말했다.
“와줘서 고맙소, 데드. 약속대로 대가는 섭섭지 않게 지불하도록 하겠소.”
데드. 피바다 라킨의 사후 아르트라를 한 손에 휘어잡은 남자.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비토는 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뭐, 결과적으로 돈이 아깝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야.’
카일이 병력을 얼마나 데리고 왔는지 몰라도, 아르트라 도시 전체를 한 손에 휘어잡고 있는 데드가 자신의 편이라면 여기서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고 갈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비토였다.
확실히 용의주도한 준비를 동반한 좋은 한 수였다.
다만 문제는…….
“주인님, 아르트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래, 수고가 많다.”
문제는 카일이 그보다 몇 수는 위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