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화이트 영지에서의 첫날밤.
클레어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의 침실에서 기다렸다.
“후우우……. 가슴이 진정되지를 않네.”
거칠게 수련하며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을 때처럼 가슴이 계속 콩닥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도 이 밤이 처음이었다.
결혼은 킹스 캐슬에서 했고 결혼식 날 밤에 두 사람이 같은 침실을 쓰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날 카일은 그녀를 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결혼은 거래입니다. 저는 공주님에게 자유를 주고, 공주님은 저에게 왕실과의 연결 고리가 되어주는 거죠. 그 이외의 부분에 관해서는 모두 공주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내키지 않는다면 부부 관계는 행하지 않아도 좋고, 따로 애인을 만들어도 좋습니다.”
그때 카인은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카일로서는 클레어가 결혼 후 아리시아나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간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시한 조건이었다.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고 대신 의무도 지워 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클레어는 이 제시에 좋다, 싫다를 말하지도 않았지만 우선은 카일을 좀 더 지켜보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카일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해 준 고마운 은인이었지만, 고마움은 상대방에 대한 이성적 매력과 호감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결혼 후 좀 더 카일 화이트라는 인간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카일은 돈만 밝히는 수전노도 아니었고, 인간을 믿지 못해서 노예들로 주변을 가득 채운 사회 부적응자도 아니었다. 아름다운 미녀들을 자기 성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난폭한 남자는 더욱더 아니었다.
‘사실, 그런 남자라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클레어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 봤다.
하늘하늘한 순백의 네글리제만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각성한 후에 변한 자신의 모습에 경악했고, 매일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스스로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우스웠지만, 지금 클레어는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거울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신화 속의 인물처럼 자기 스스로와 사랑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여자가 아내가 되었는데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배려부터 먼저 한 이가 카일이었다.
결국 안 좋은 소문은 모두 오해였다.
그 후 영지에 와서 영지민들에게 진심으로 환영받는 모습과 가신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클레어는 마음을 정했다.
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카일에게는 미리 오늘 밤 자기 침실로 들어와 달라고 언질을 했고, 현재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똑똑.
노크와 함께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레어?”
“들… 들어가세요.”
당황해서 대답도 잘못한 클레어였지만 카일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에 들어온 카일은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클레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안녕. 들어갔어.”
“놀리지 마세요.”
클레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고 카일은 문을 닫고 클레어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곧바로 손을 뻗어 클레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많이 긴장했나?’
그냥 팔을 두르기만 했는데도 그녀의 몸이 쉬지 않고 떨리는 것을 느껴졌다.
카일은 클레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이 아니라도 괜찮아.”
“아니요. 괜찮아요. 여자가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뭐라도 해야죠.”
“그래? 용감하네.”
카일은 웃으면서 클레어의 허세를 넘겼다. 그리고 클레어의 턱을 손으로 잡고 살며시 들어 올리곤 시선을 맞췄다.
“내 여자가 되는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줄게.”
“당신을 믿어요, 카일.”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는 클레어의 입술에 카일은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둘의 키스가 이어지고 클레어는 카일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카일이 클레어를 침대로 쓰러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본능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 * *
“…….”
카일과 클레어가 둘만의 밤을 보내고 있을 때, 아리시아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인님 제발…….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아리시아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카일이 자신을 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카일을 독점하고자 하는 바람도 접었다. 하지만 카일에게 버림받는다는 생각은 하기만 해도 심장이 차가워졌다.
카일에게 버려지게 되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 이외에도 카일에게 여자가 생긴 적은 많았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한 아내는 처음이다.
만약 클레어가 자신을 없애라고 한다면?
카일의 곁에서 떠나라고 한다면?
그냥 일개 노예일 뿐인 자신이 카일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때가 되면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불길한 상상을 거듭하며 그녀의 눈에 살기가 깃들려고 하는 순간.
“거봐요. 내가 얘 이러고 있을 거라고 했죠?”
“설마 진짜일 줄은…….”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아리시아의 시선에는 양손에 술과 술잔을 들고 있는 발레리아와 레이나가 보였다.
“발레리아, 레이나.”
“뭘 혼자 마시고 있어? 같은 처지끼리.”
“안주로 치즈를 좀 가지고 왔어요. 같이 들어요.”
발레리아와 레이나는 자연스럽게 아리시아의 앞에 마주 앉아서 자신들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아리시아는 그런 둘을 보고 말했다.
“왜 왔어요?”
“네가 청승맞게 이러고 있을 거 뻔히 보이니까 왔지?”
“저는 그런 발레리아 씨 말을 듣고 왔어요.”
그런 둘에게 아리시아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마시고 싶었어요.”
“그러지 마. 걱정되잖아?”
“하하……. 걱정요? 저를 왜요?”
허탈하다는 듯이 대꾸하는 아리시아에게 발레리아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같은 처지잖아?”
“같은 처지라고요?”
“그래. 그리고 네가 뭘 걱정하는지도 알아.”
“…….”
침묵하는 아리시아에게 발레리아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주인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아.”
그러자 아리시아는 정곡을 찔린 표정을 했고, 그걸 보고 있던 레이나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진짜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이 당신을… 우리를 버릴 리가 없잖아요?”
아리시아는 그 말에 술잔의 술을 단번에 들이켜 비우고 말했다.
“글쎄요……. 모르죠. 주인님의 능력이라면 노예 시장에서 나 같은 잡종이 아니라 진짜 엘프를 사서 데리고 올 수도 있고…….”
“아리시아.”
발레리아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리시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주인님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자 노예를 각성시켜 유능하고 아름다운 노예로 만들어서 데리고 있을 수도 있죠.”
“…….”
“그보다 클레어, 그 여자도 이미 저보다 훨씬 아름답고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걸요? 주인님이 나같이 쓸모없는 잡종 엘프를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할까요? 나같이 아무 가치 없는……. 이미 질렸을 지도 모를…….”
자기 비하에 빠진 아리시아는 누군가 자신을 꼭 끌어안는 것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아리시아를 끌어안은 이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이나였다.
“아리시아, 그러지 마요. 당신은 주인님에게도 우리에게도 소중한 사람이에요. 우리의 동료이자 가족이라고요.”
아리시아는 자신의 정수리에 뚝뚝 떨어지는 레이나의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너무 따뜻해서일까?
아니면 속상한 마음에 들어간 술 때문일까?
아리시아의 마음의 빗장이 조금이지만 벗겨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서 이제까지 숨기고 있던 얘기가 나왔다.
“사실 나는…….”
아리시아는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자신의 과거, 폐기장에 들어오기 전의 그녀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이다.
그 말을 모두 들은 발레리아와 레이나는 크게 놀랐다.
“아리시아…….”
“그래서, 그래서 너는…….”
두 사람은 아리시아의 과거를 듣고 차마 뭐라고 말도 붙일 수 없었다.
그녀들의 과거도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카일에게 구원되기 전까지 그녀들은 세상이 자신을 짓밟는 것처럼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 불행이 닥치기 전에는 행복하고 충실한 삶도 있었다.
기사로서, 수녀로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며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는 그런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아리시아는… 그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태어난 이유조차 악마의 유희였을 뿐이며, 삶의 의미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삶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구원해 준 것이 카일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카일을 향한 집착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이제는 우리가 있잖아요?”
레이나는 아리시아를 꼭 안아 주었고, 발레리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망설이다가 자신도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아리시아에게 자신들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 *
왕위를 원한다면 형제를 죽여라.
믿기 힘들겠지만 이 살벌한 가훈이 왕궁에 버젓하게 새겨 놓는 미친 나라가 있다.
바로 게오르그 왕국이다.
같은 해적질로 악명이 높은 나라라고 해도 게오르그 왕국은 사이펀 왕국과 달리 위계 서열이 엄격하게 잡혀 있다.
그 엄격한 서열은 피와 죽음의 규율로 이뤄지고 있으며, 그만큼 가혹한 규율의 정점에 존재하는 왕은 항상 강한 자여야 한다.
오직 강한 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100명이 넘는 자식을 낳아 봐야 마지막에 남는 건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피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커다란 범선의 선실 안, 평범한 선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배의 선실은 상당히 호화로운 가구와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선실에는 한 명의 남자가 아리따운 미녀를 거느리고 독점하고 있었다.
미녀는 상당히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알몸으로 남자의 품 안에 안겨서 몽롱한 시선으로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간절한 미녀의 시선에도 남자는 양손으로 뒷머리를 감싸며 그냥 무심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런 남자의 초점은 또렷했다. 이건 이 남자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그때 선실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선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토 왕자님.”
“무슨 일이냐?”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알았다. 나가도록 하지.”
그렇게 대답한 남자는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으려 했다.
“아, 제가 도와드릴게요.”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는 서둘러 일어나서 남자가 옷을 입는 것을 시중들었다.
옷을 다 입고 나자 거기에는 마른 체형에 약간 신경질적으로 생긴 장신의 남자가 서있었다.
얇은 팔다리나 호리호리한 체형은 어떻게 봐도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싸늘한 눈빛과 무심한 말투 등에서 남자가 강하지는 않아도 위험한 남자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났다.
이 남자의 이름은 비토 루드 게오르그, 현 게오르그 왕국의 3왕자다.
일국의 왕자라고 하면 옆에서 시중들던 여자의 쩔쩔매는 태도도 이해가 간다.
비토는 그런 여자를 무심하게 쳐다보다 말했다.
“너, 이름이 뭐였지?”
그러자 여자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로잔나라고 합니다.”
“그래, 그렇군.”
비토는 그냥 무심하게 답하며 여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심드렁하게 말했다.
“형님이 보낸 여자 중에서는 네가 가장 내 취향에 맞기는 했다.”
그 한마디에 여자는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바로 표정을 관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저는 그저 왕자님을 사모해서, 그래서…….”
“그만, 변명은 됐다.”
그리고 비토가 손가락을 튕기자 선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부하들이 들어왔다.
그들을 향해 비토가 말했다.
“처리해라.”
“예, 왕자님.”
그리고 부하들은 로잔나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를 그대로 잡고 끌고 갔다.
“왕자님, 왕자님! 오해입니다!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여자는 끌려가면서도 자신은 스파이가 아니라고 울부짖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말해도 스파이일 수 있다고 의심받은 시점에서 이미 그녀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었다.
여자를 보낸 후 비토는 배의 갑판으로 나갔다.
“오셨습니까, 왕자님?”
“그래. 저곳이 아르트라인가?”
“예.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환락의 도시이죠.”
“그렇군.”
확실히 어두운 밤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꺼질 줄 모르는 조명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도박, 여자, 술, 마약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모아 놓았다는 아르트라는 낮이 조용하고 밤이 시끄러운 도시였다.
옆의 선원은 비토에게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헤헤헤, 어떠십니까? 약속 시간까지는 날짜가 좀 남았는데. 왕자님도 휴가를 즐기시는 게 어떠신…….”
말을 하던 그는 비토가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자 황급히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비토는 그런 부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도시에는 놀러 온 게 아니다. 흐트러진 욕망 때문에 내 일을 방해한다면 죽이겠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부하의 대답을 들은 비토는 다시 아르트라의 야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이제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