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카일의 경우 클레어와 결혼하면서 가장 많이 걱정했던 것은 그녀가 기존에 카일의 총애를 받던 노예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카일의 걱정은 기우였다.
“합!”
“예. 좋습니다. 정확한 자세로 절도를 유지하면서 공격하세요.”
발레리아가 차분하게 검을 받아 주고 클레어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녀를 밀어붙였다.
머리를 질끈 묶고 가벼운 승마복 차림으로 검을 휘두르는 클레어는 뭐가 그리 행복한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한참 그녀의 공격을 받아 주던 발레리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그녀의 검을 가볍게 쳐내서 떨어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발레리아의 말에 클레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말했다.
“예, 스승님.”
그렇다. 그녀는 발레리아를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발레리아가 카일의 노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클레어가 존경할 수 있는 요소가 너무 많았다.
훌륭한 여기사에 성공적인 모험가, 심지어 검을 잡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모험가를 꿈꾸는 클레어로서는 너무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바로 발레리아였다.
빅토르 휘하의 여성 모험가 중에서도 마스터는 몇 명인가 있었지만, 그녀들에게는 함부로 말도 걸 수 없었다. 서로의 위치와 입장이 너무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발레리아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에게 마음껏 가르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미칠 듯이 행복했고, 스스럼없이 발레리아를 스승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발레리아와의 좋은 관계는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쳤다.
아리시아 역시 성공적으로 오랜 시간을 활동한 모험가였고, 지금은 카일의 전속 비서 같은 존재였다.
카일의 아내가 된 클레어는 함께 지내게 된 아리시아에게도 웃으면서 먼저 다가갔다. 정작 아리시아 본인은 무척 사무적으로 클레어를 대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클레어는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카일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에 관해서 무조건적인 인정을 약속했다. 그건 카일의 애첩이었던 세 명을 제외하고 하룻밤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 장미 기사단의 단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결혼을 한 부인이 남편이 그전부터 데리고 있던 애인이나 노예들을 남몰래 치워버리는 것이 흔한 것을 생각하면 클레어의 행동은 상당히 관대한 것이었다.
하긴, 어차피 카일이 그런 행동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현명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클레어와 카일이 영지에 도착했을 때.
“주인님, 승작과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주인님.”
검은 바람과 레이나가 가장 앞에서 카일을 맞이했다. 그리고 에이라가 따라 나와서 말했다.
“멜로나는?”
“그걸 어디서 구해?”
“쳇, 이런 사람을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환영하나 몰라?”
에이라가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뒤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카일이 온다는 소식에 자발적으로 나와서 색종이와 꽃잎을 뿌리고 열렬하게 환영하는 영주민들이 있었다.
“와아아. 영주님 축하합니다.”
“결혼 축하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영주님.”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영주님.”
“와아아아!”
화이트 영지의 주민들이 모두 몰려와서 카일을 축복했다.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에서 내리고 말했다.
“너무 거창하군. 영지민들은 검은 바람, 네가 모은 거냐?”
그러자 검은 바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전부 자발적으로 모인 겁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모여서 통제하느라고 부하들이 열병식도 못 열게 되었군요.”
실제로 여기저기서 투란의 전사와 병사들이 영지민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거기, 선 넘지 마요. 선.”
“밀지 마, 밀지 말라고!”
그 모습에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모두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와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카일이 손 한 번만 흔들어 줘도 난리가 나는 영주민들의 모습에 함께 자리를 한 클레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원래 영주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가? 무슨 종교 단체 같잖아?’
모든 영주가 이런 건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확실한 성과를 올리고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이들은 광신도들의 교주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한다.
“더 있다간 폭동 일어나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호오……. 그래? 그거 기대되는군.”
그렇게 카일은 말을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들어선 카일은 가신 일동을 모아서 정식으로 클레어를 소개했다.
“모두 인사해라. 이번에 나와 결혼한 클레어 화이트다.”
“영주 부인님을 뵙습니다.”
“영주 부인님을 뵙습니다.”
가신들은 모두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천덕꾸러기 공주로 자라면서 이렇게 충성스런 인사를 받아 본 적 없는 클레어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클레어라고 해요. 많이 부족하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카일은 클레어에게도 가신들을 소개해 주었다.
“여기는 검은 바람. 나하고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사이고, 투란 전사단을 이끄는 나의 오른팔이지.”
가장 먼저 인사를 시킨 것은 검은 바람이었다.
카일의 소개에 클레어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알아요. 바이에른에 있을 때부터 화이트 클랜의 부클랜장을 맡은 분이죠. 저도 이름은 들어 봤어요.”
“검은 바람이라고 합니다.”
모험가를 동경하는 그녀인 만큼 검은 바람의 존재는 바이에른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카일은 다른 사람들도 소개했다.
“이쪽은 레이나. 레테 여신을 모시는 신관이며 나의 동료이기도 하고, 또 내가 각별하게 아끼는 부하이기도 하지.”
카일의 말에 이미 레이나에 관해서 알고 있던 클레어는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레이나 신관님.”
“말씀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부인.”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저보다 훨씬 더 먼저… 음, 그랬는데.”
“아… 그건…….”
둘의 대화가 이 이상 어색해지기 전에 카일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여기는 호크. 병사들을 이끄는 병사장으로 내가 신뢰하는 부하지.”
“호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 후에도 총괄 집사를 맡고 있는 파르트와 영지의 내정을 전담하고 있는 에이라에 대한 소개도 이어졌다.
파르트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에이라는 클레어를 보자마자 대뜸 새언니라고 말하면서 친숙하게 굴었다.
둘의 모습에 클레어는 예감했다. 아마도 그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 말고도 카일 직속의 특수 부대원들도 있었지만, 카일은 그들에 관한 정보를 클레어에게 아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딱히 클레어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특수 부대는 그 성격상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하들과 인사를 끝낸 후 카일이 말했다.
“좋은 소식이 몇 가지 있었다고 했지? 그럼 들어 볼까?”
그러자 가장 먼저 검은 바람이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카일이 보는 앞에서 검을 뽑았다.
“어머?”
클레어는 깜짝 놀랐지만 카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있었다. 검은 바람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는 카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바람의 검에 푸른색의 오러가 서리더니 그것이 곧 완벽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파치잉!
이윽고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의 형체를 갖춘 그것은 바로…….
“오러 블레이드? 검은 바람, 너…….”
“늦어서 죄송했습니다.”
검은 바람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카일은 기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검은 바람을 껴안았다.
“하하하! 해낼 줄 알았다. 해낼 줄 알았어.”
검은 바람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에 카일은 진심으로 기뻐했고 발레리아와 아리시아 역시 검은 바람을 축하했다.
“축하해요, 오라버니.”
“축하해. 언제 대련 한번 하지.”
“바라던 바다.”
검은 바람은 지금 당장이라도 발레리아와 한 판 붙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로써 카일의 휘하에는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라는 두 명의 마스터가 생겼다.
물론 마스터가 아니라고 해도 초능력을 각성한 이들 중에는 마스터급의 무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역시 마스터라는 것은 큰 메리트였다.
익스퍼트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거뜬하게 상대하는 강자가 마스터다. 심지어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카일에 의해서 능력을 각성한 마스터다. 이 둘이 실제 전투에서 어느 정도 역량을 발휘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일반 마스터보다는 훨씬 더 강력할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작은 공국 수준의 군사력은 넘어섰다고 봐야겠지.’
카일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카일의 옆에서 앉아 있던 클레어는 완전히 뻑 간 표정을 하고 검은 바람에게 간청했다.
“검은 바람님. 부디 저에게도 검을 가르쳐 주세요.”
“부… 부인.”
“꼭 가르쳐 주세요. 검은 바람 님… 아니, 스승님.”
“스승님?”
당황한 검은 바람에게 발레리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저는 해고인가요?”
“그럴 리가요? 발레리아 스승님도 여전히 가르쳐 주셔야죠. 아… 정말 멋져. 마스터 스승님이 둘이나 있다니…….”
클레어는 마치 장난감이 가득한 가게에 들어온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당황한 검은 바람이 카일에게 ‘이래도 됩니까?’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카일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자유는 최대한 존중해 주기로 했으니 말이야.’
경사가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에이라가 말했다
“좋은 일 하나 더 있어요.”
“뭔데? 너 남친이라도 생겼니?”
“죽을래요?”
에이라가 이를 가면서 하는 말에 클레어는 놀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흥, 내 남친은 때 되면 생길 거고. 그보다 게오르그 왕국의 유력자와 접선을 했어요.”
“정말인가?”
“예. 게오르그 왕실의 3왕자라고 해요.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흥미를 보이고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
“좋군. 아주 잘됐어.”
카일이 킹스 캐슬에 가서 보고한 남방 대륙과의 무역 계획은 그저 탁상의 공론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이미 그 계획의 준비 단계를 실천하고 있는 단계였다.
게오르그 왕국의 해군을 동맹으로 삼기 위해서 유력자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에이라는 특수 부대의 인원들과 사실상 카일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환락의 도시 아르트라의 인선을 통해서 세오르그 왕국의 고위층과 연을 만들려 했다. 워낙 폐쇄적인 나라라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공을 들인 결과 드디어 성과가 나온 것이다.
“딱 좋을 때 들어왔군. 언제 만날 수 있겠나?”
“가능하면 우리 영지로 부르고 싶은데, 그게 싫다고 하네요. 우리보고 오라고 하는데…….”
“그건 내가 싫어. 그놈들의 뭘 믿고.”
게오르그 왕국은 어떤 의미로 양아치 국가인 사이펀 왕국 이상으로 믿기 힘든 곳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죠. 양쪽의 중간에 있는 사이펀 왕국의 도시에서 만나기로 하는 게 어떨까요?”
“좋군. 예를 들면 공정하게 아르트라 항구 도시라든가 말이야.”
“그렇죠. 그게 좋겠죠?”
카일과 에이라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쿵짝이 맞는 대화를 이어갔다.
아르트라는 피바다 라킨의 사후 대해적이 된 데드가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그 데드는 사실상 세피로스의 노예나 다름없었고, 세피로스는 카일의 부하다.
즉, 아르트라는 카일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아르트라 항구에서 회담을 가지고, 만에 하나 회담이 파토 난다면 묻어버리기도 딱 좋군.’
마음을 굳힌 카일이 말했다.
“아르트라 항구까지 호위 병력을 준비하고, 회담에 필요한 자료와 선물도 준비해라.”
“예. 이미 다 갖춰 놨어요.”
“좋아. 약속 시간이 정해지면 알려 줘.”
“예.”
에이라는 착착 준비에 들어갔고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