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약혼식도 없이 바로 결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일을 빠르게 해결하고 영지로 내려가야 했고 왕실 역시 이를 허가했다.
세간에서는 카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기정사실을 만들기 위한 왕실의 음모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빠르게 준비한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규모만은 꽤 화려하게 준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야외에 식장을 차리고 식장의 조경은 일류의 정원사들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정원에 화려한 대리석 분수가 자리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조각품들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최고급 실크로 만든 버진 로드는 물론이고 손님들의 좌석도 최고급으로 준비되었다.
“상당히 화려하군요.”
“그러게 말이죠.”
“나라가 건국되고 나서 이 정도로 화려한 행사는 드물었는데 말이죠.”
“그만큼 왕가에서 화이트 백작가와의 결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겠지.”
“일리가 있습니다.”
귀족들은 화려한 결혼식장에 와서도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분석했다.
반면 그것과 반대되는 기대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흥, 이렇게 식장만 화려하면 뭐 해? 신부가 꽝일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크리스털 화병에 잡초를 꽂는 격이죠.”
귀부인과 영애들을 중심으로 몇몇 영애들이 모여서 깔깔거리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하는 대화의 중심은 곧 나타날 클레어 공주였다.
이 화려한 결혼식장에 오동통한 체형의 클레어 공주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지난 한 달 동안 살을 빼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했다고 하던데요?”
한 영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살이 어디 뺀다고 빠질 살인가요?”
이름 모를 영애의 말에 멜리사 공주는 대뜸 반론했다.
그녀는 이제 곧 등장할 클레어의 모습을 가장 많이 기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역시 무리인가요?”
“당연하죠. 사실 살을 빼려고 했는지도 의문이에요. 걔는 천성이 게으르거든요.”
멜리아의 말에 주변의 귀족 영애들도 동감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부지런한 성격이면 원래 그런 체형이 되지도 않겠죠?”
“귀부인들 중에서도 한번 살이 찌면 원래대로 못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어머, 끔찍해라.”
그녀들은 클레어가 절대로 살을 빼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 속에서 멜리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감히 나를 차다니. 어디 실컷 비웃음이나 당해 보라지.’
실연의 슬픔이 분노가 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멜리사 공주는 카일에게 이를 갈면서 오늘의 결혼식만을 기다렸다. 이 결혼식에서 뚱뚱한 클레어와 결혼하는 카일을 비웃어 주고 조롱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날을 위해서 그녀는 특별히 더 신경 써서 화장을 하고 아름다운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했다. 카일이 자신을 찬 것을 후회하게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 보람이 있는지 주변의 영애들은 그녀의 옷과 장신구를 부러워하며 칭찬했다
“공주님. 이 드레스에 달아 놓은 다이아몬드는 모두 진품인 거죠?”
“어머, 이렇게 커다란 블루 사파이어는 처음 봤어요.”
“호호호. 고마워요. 특별히 신경을 좀 썼답니다. 아끼는 동생의 결혼식이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주변의 칭찬을 즐기면서 결혼식장 한구석에 자리했다.
“지금부터 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신관의 말에 모든 이들이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착석하자 신관이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카일 화이트 백작과 클레어 폰 고르시파 공주의 결혼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화이트 백작은 식장에 들어오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쪽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카일이 등장했다.
“어머? 저건 뭐죠?”
“특이한 복장인 걸요?”
카일이 입고 등장한 것은 깔끔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슈트였다. 원래 이 세계에서 결혼식 당일 신랑이 입는 복장치고는 꽤 파격적이었다.
이 세계의 남성은 혼례를 치르기 위해 종아리를 탄탄하게 조이는 부츠에 통이 넓은 반바지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붉은색의 긴 상의에 금실로 장식을 주고 목에는 화려한 칼라를 해야 했다.
그걸 한 번 입어 본 카일은 결론을 내렸다.
‘절대 안 해.’
꼴 보기 싫고 답답할 뿐만 아니라 비실용적이었다.
이 세계의 혼례복을 못 견딘 카일은 재단사에게 의뢰하여 현대적인 디자인의 슈트를 만들었다.
검은색의 슈트에 하얀색의 와이셔츠를 입고 목에는 진한 남색의 넥타이, 가슴주머니는 흰색의 행커치프를 걸치고 깔끔한 구두를 신었다.
심플하지만 흠잡을 곳 없이 라인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카일의 모습은 슈트 차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멋있어 보였다.
“나쁘지 않은걸?”
“어느 디자이너가 만든 거지?”
“나도 한 벌 만들어 볼까?”
남자들은 카일의 슈트를 보고 자신도 비슷한 디자인으로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일과 혼담이 오갔던 공주들은 그런 카일의 모습을 보고 더 아쉬워했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데…….’
‘왜 클레어하고?’
‘하아아…….’
원래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심지어 카일은 냉정하게 제삼자가 봐도 특 대물 월척이었으니 오죽할까?
멜리사는 부채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반드시 후회할 거야.’
그녀는 이어질 신부의 등장을 기다렸다.
신랑이 저렇게 멋있게 나왔으니 신부가 꼴사납게 등장하면 오히려 더 초라해 보일 것이다.
‘어디 드레스에 욱여넣은 돼지의 모습을 볼까?’
기다리는 멜리사의 마음을 안 것일까. 신관이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는 말은 했다.
“신부는 식장으로 등장하시오.”
그러자 한쪽에서 준비해 놨던 가림막 사이로 빅토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한 명의 여인이 등장했다.
툭, 쨍그랑, 털썩.
순서대로 설명하자면 어떤 영애가 부채를 떨어트리는 소리, 한 중년 귀족이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떨어트리는 소리, 그리고 아예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은 왕비의 소리였다.
이 모든 소란은 클레어가 등장한 순간 모두 동시에 일어난 현상이다.
“크, 클레어가 어디 있지?”
“설마…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멜리사를 비롯한 심보 고약한 영애들의 기대감은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그녀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만큼 빅토르의 손을 잡고 등장한 클레어는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살을 빼고 등장한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은 웨딩드레스가 보여 주는 환상적인 라인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친 듯이 아름다웠다.
“세상에…….”
“진짜 뺐구나.”
“아니, 살을 빼는 건 둘째 치고 저건……. 저렇게까지 인간이 변할 수 있나?”
“허어어어……. 허허허…….”
사람들은 경탄을 넘어서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클레어는 카일의 앞에 도달했고 빅토르는 딸의 손을 카일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딸을 남편에게 건네줄 차례였다.
“내 딸을 울리면 죽여버리겠다.”
물론 다정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카일은 클레어의 손을 받았고 빅토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신관이 말했다.
“크흠, 그럼 지금부터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신랑 카일 화이트 백작은 신부 클레어 폰 고르시파 공주를 아끼고 사랑하며 반려로 맞이하여 남은 평생을 함께할 것을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시오.”
“그녀를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자애와 조화의 여신 레테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이 맹세에서 어떤 신의 이름을 대는가에 따라서 그 개인의 종교가 드러난다.
카일의 경우 딱히 레테 여신의 신도는 아니었지만 레이나의 얼굴을 봐서 그나마 가장 친숙한 신을 고른 것이다.
“신부 클레어 폰 고르시파는 신랑 카일 화이트 백작을 평생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것을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시오.”
“그를 평생 존경하고 사랑하며 따를 것을 전쟁과 승리의 신 유레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클레어가 선택한 신은 전쟁과 승리의 신 유레나였다.
사실 대중적으로 많은 신도를 보유한 종교는 아니었지만, 용병이나 모험가같이 목숨 걸고 싸울 일이 많은 이들이 주로 믿는 종교인 듯했다.
그녀가 유레나를 선택하여 맹세를 올린 것은 앞으로 모험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양쪽의 맹세를 모두 받아 낸 신관이 손님들에게 말했다.
“자애와 조화의 여신 레테와 전쟁과 승리의 신 유레나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진실된 맹세를 증거 삼아 둘이 하나가 되는 결합은 허락합니다. 이 둘의 맹세에 이의가 있는 이가 있다면 지금 나와서 말하시오.”
순간 공주들 중에 몇 명의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가까스로 참아 낸 듯했다.
“모든 이들이 침묵으로 긍정하였으니 성스러운 신과 이 자리에 함께한 이들의 축복 속에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맹세의 키스를 하시오.”
신관의 말에 따라 카일이 클레어와 마주하고 그녀의 얼굴에 가려진 면사포를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그 순간 클레어의 얼굴이 드러났고 하객들은 숨을 멈췄다.
‘무슨 저런…….’
‘아, 아아아…….’
‘허… 허허허…….’
말문이 막히는 미모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뽀얀 피부에 부드러운 연푸른색의 눈동자, 풍성하고 탄력 있는 금발이 뺨을 감싸고 있는 클레어의 미모는 여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멀리서 봐도 그런데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는 카일은 어떻겠는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사기일 줄은 몰랐지.’
물론 카일은 살이 빠지고 난 직후의 클레어의 얼굴을 봤다. 카일의 능력으로 클레어를 각성시킨 후 그녀의 몸에서 지방이 모두 녹아내리고 가장 이상적인 체형과 골격을 갖추게 된 과정부터 결과까지도 확인했다.
사실 그 당시에도 그녀의 얼굴을 봤을 때는 카일도 숨이 멎을 뻔했다.
‘와아……. 본판이 원래 이랬던 건가?’
아리시아, 발레리아, 레이나, 그리고 장미 기사단의 여인들……. 모두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진짜 클레어의 미모는 그런 미인들에게 익숙해진 카일 조차 순간 넋을 잃게 하는 특별함이 있었다.
클레어는 그냥 아름다운 것을 넘어서 타고난 고귀함이 느껴지는 미모였다. 위엄과 신비로움을 겸비한 그녀의 이목구비는 ‘태생부터 여왕님인 이가 있다면 이런 얼굴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다시 봐도 놀랍네.’
그때는 민낯이었음에도 그런 감상을 한 것인데, 지금은 결혼식을 위해서 완벽하게 화장까지 한 후였다.
결혼식을 위해 완벽히 치장한 클레어는 더욱더 아름다웠고,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그녀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크흐흠…….”
옆에 있는 신관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카일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카일은 클레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그 순간 짜릿한 느낌과 함께 성대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너무 잘 어울립니다, 클레어 공주님.”
환호성을 터트리는 이들은 지난 한 달간 카일이 만든 파벌인 혁신파 귀족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동조되어서 박수를 치는 다른 귀족들도 있었다.
“진짜… 사람 인생이라는 건 모르는 거군.”
“집에 가서 내 마누라도 살 좀 빼라고 해야겠어.”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만인의 축복 속에서 카일은 클레어와 혼인했고, 모든 혼인 절차를 마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멜리사를 비롯한 다른 공주들은 그냥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 * *
결혼식을 마치고 이틀 후, 카일은 드디어 킹스 캐슬을 떠나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리고 클레어.”
“예, 아버지.”
“…잘 살거라.”
“…예.”
부녀지간의 앙금이 많이 풀린 것으로 보였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빅토르의 말에는 그만큼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심은 클레어에게도 닿았다. 덕분에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딸로서 사랑한다는 사실은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마음 놓고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