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녀의 두 번째 기회는 가정 교사로서의 커리어가 바닥까지 떨어진 후에 찾아왔다.
바로 빅토르와의 결혼이었다.
원래 그녀는 모험가와 결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빅토르는 자신의 아이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지식과 교양이 있는 여성을 아내로 원했고, 그 조건에 딱 맞는 것이 제미니였다.
그녀는 깊은 고민 끝에 빅토르의 구혼을 받아들였다.
사실 당시 그녀는 가정 교사로서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시점이었다. 남작가의 천재 소년을 몰라본 안목으로 그녀의 교육 능력이 의심받은 것이다.
제미니는 슬슬 정착을 해야 할 시기였고 빅토르가 그냥 그런 모험가가 아니라 거대한 클랜을 이끄는 클랜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빅토르의 구혼을 수락했다.
‘이 정도 규모의 클랜을 이끌고 있으면 하급 귀족보다는 차라리 나을 거야.’
그렇게 하게 된 빅토르와의 결혼이었는데, 이게 대박을 터트렸다.
빅토르는 스톰 클랜을 바이에른 최고의 클랜으로 키워 냈고, 그녀의 생활은 어지간한 중급 귀족들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졌다.
그녀의 두 번째 기회가 불러온 행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에 빅토르는 던전을 공략해서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영웅이 되더니 싱카라 제국에서 영토를 받아서 자신의 나라까지 건국해 냈다.
빅토르 폰 고르시파 1세. 빅토르가 이 위치에 등극한 순간, 그녀 역시 왕비라는 지고한 위치에 오른 것이다.
비록 빅토르에게는 자신 이외에도 많은 아내들이 있었기에 독점적인 왕비는 아니었지만, 제미니는 빅토르의 여자들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위치에는 있었다. 아니,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두 번의 사례를 통해서 그녀가 깨달은 것은 인생을 살다 보면 성공으로 가는 커다란 기회가 언젠가는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는가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카일 화이트 백작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세 번째 기회였다.
딸만 하나 있고 아들은 하나도 없는 그녀는 빅토르가 왕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자연스럽게 왕궁을 나가야 하는 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최대한 좋은 혼처로 시집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카일은 진짜 황금 줄이었다.
모험가에 관해서 무심한 그녀조차도 바이에른에서 살 적, 카일에 대한 소문을 들어 봤다. 최연소 클랜장부터 시작해서 장래가 유능한 모험가라는 소문 등등.
카일은 왕국의 귀족으로 전향한 후에는 더 눈부신 활약을 보여 줬다. 해적들을 소탕하고 영지를 발전시켜서 이미 고르시파 왕국의 최고 부자라는 소문까지 들을 정도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화이트 영지에서 세금을 걷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재정 상황을 혼자서 견인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인재라고 했다.
그녀는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딸을 카일과 결혼시키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카일이 클레어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 다른 애도 아니고 그 뚱뚱한 돼지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일 화이트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제삼자의 개입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제삼자에게 따지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요!”
그게 바로 남편인 빅토르인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빅토르에게 말했다.
“멜리사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그 아이가 화이트 백작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그 녀석 얼마 전에 자기 호위 기사 중에 한 명을 사랑한다고 나한테 결혼 허락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나?”
빅토르의 말에 제미니는 순간 움찔했다.
‘그 멍청한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위 기사하고 눈이 맞아서 간도 크게 아버지한테 결혼시켜 달라고 졸랐던 멜리사였다.
빅토르는 멜리사의 결혼을 허락하려고 했지만 친모인 제미니의 결사반대로 멜리사와 기사의 결혼은 성사될 수 없었다.
제미니는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기사 A와 결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사실 제미니는 아직까지도 그 기사의 이름도 모른다. 바로 그 다음 날에 저 멀리 다른 외지로 강제 발령을 내려버렸으니 말이다.
제미니는 잠시 흐트러졌던 표정을 바로 잡고 말했다.
“그건 철없던 시절의 열병에 불과해요. 멜리사의 진정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화이트 백작이라고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엄마니까요. 항상 곁에서 지켜보고 보살펴 주는 엄마로서 딸아이의 마음 하나 몰라본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래?”
“당연하죠. 하긴, 당신은 항상 바빠서 딸아이에게는 관심도 없겠지만요.”
제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그녀가 이렇게 빅토르가 바빠서 가정에 소홀한 것을 책망하면 빅토르는 다소 귀찮아서라도 어지간한 것은 다 양보를 해주었다.
늘 그래 왔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 마음 접으라고 해. 화이트 백작과 클레어의 결혼은 이미 결정된 일이니까 말이야.”
“여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뾰족하게 소리를 지르는 제미니에게 빅토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멜리사가 화이트 백작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화이트 백작이 클레어가 좋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런 건 당신이 명령하면 되잖아요! 감히 당신 명령을 거부하겠어요?”
“그 친구는 하고도 남아.”
“그… 그럴 리가…….”
“그리고 설령 명령에 따른다고 해도, 내가 왜 그런 명령을 내려야 하지?”
“멜리사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 가여운 아이가 상심해서 침대에 누워서 울고만 있다고요.”
이건 사실이다.
카일이 자신을 찼다는 사실도 불쾌했지만, 자신이 항상 뚱뚱한 돼지라고 놀리던 클레어가 카일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멜리사는 그 이상의 쇼크를 받았다.
“내가… 내가 그 돼지보다 못하다고? 내가? 이 내가…….”
결국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멜리사는 침대에 누워서 베개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분함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빅토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남자한테 차일 수도 있지.”
“여보!”
“그만, 끝난 얘기야.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마.”
“그럴 순 없어요. 제가 어떻게…….”
“없다고? 지금 내 말에 거역하는 건가?”
빅토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미니를 바라봤다. 순간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는 움찔하며 몸이 경직되었다.
빅토르는 평소 가정사에 관해서 아내들의 결정권을 존중해 왔다. 집 밖에서 하는 일에 일절 참견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집안일에 관해서는 아내들의 결정을 따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제미니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 나라에서 절대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국왕이라는 것이다.
“국왕으로서 카일 화이트 백작과 클레어의 결혼을 인정한다고 내가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 그런 말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그녀에게 빅토르가 말했다.
“돌아가서 근신하고 있도록. 내가 따로 말할 때까지 별궁 밖으로 나오지 말고 있어.”
“여보,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냥 속이 상해서…….”
“데리고 가라.”
빅토르는 그녀의 변명을 듣지 않고 기사들에게 명령해 그녀를 데려가게 했다.
“놔! 내 발로 갈 거야!”
제미니는 분함에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 * *
별궁으로 돌아온 제미니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멜리사 공주였다.
“어떻게 됐어요? 아버지가 마음을 바꿨어요?”
“실패했다.”
“그… 그럴 수가!”
멜리사는 다시 울상을 지었다. 화장이 다 지워진 민낯에 퉁퉁 부어 있는 눈덩이로 표정까지 찡그려지니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흑흑……. 너무해요. 어떻게 아버지가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어쩔 수 없더라. 백작이 클레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단다.”
“그게 말이 돼요? 저처럼 예쁜 여자를 내버려 두고 그런 돼지를 좋아하는 게?”
“…….”
“분명 아버지가 중간에 끼어서 압력을 넣으신 거예요. 그렇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요.”
멜리사는 빽빽 소리 지르며 말했다. 제미니는 그런 딸에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무슨 수가 날 거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무슨 수를 써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 * *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미 승작식은 마쳤지만 카일은 바로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한 달이 넘게 수도에 머물렀다.
그 한 달 동안 카일은 수도의 정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활동했다.
다양한 연회에 참석하고 스스로 모임을 주관하기도 하면서 자기편이 될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중앙 정치에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파벌을 만들었다.
국왕파와 정통파의 세력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포섭해서 만든 이 세력은 스스로를 혁신파라고 불렀다.
카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국왕파와 정통파로서는 뜬금없는 제3세력의 등장에 당황했다.
카일이 양쪽 세력의 한 귀퉁이를 떼 와서 만든 혁신파는 지금 당장 양쪽 세력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팽팽한 저울을 기울게 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무엇보다 카일 화이트라는 인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상당했다.
이 삼자 구도 속에서 빅토르는 착실하게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갔다.
킹스 캐슬의 치안을 관리하는 왕실 직속 경비대를 두 배로 늘리고 왕실 기사단의 숫자도 늘렸다. 이제까지 빅토르 스스로의 힘에만 의지해서 왕실 직속의 군사력을 성장시키는 것을 게을리했던 것을 만회한 것이다.
아무리 빅토르가 강하고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해도 군사력은 무력과 별개의 힘이었다.
빅토르가 군사력을 성장시키고 몇 가지 법령을 더 빡빡하게 만들자 양쪽 파벌의 다툼은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카일의 조언과 자금 후원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제야 좀 왕국다워지네.”
빅토르가 국가의 왕다운 권위를 지니게 되는 것을 보고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카일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에서 잠시 사라진 존재가 있었다.
바로 클레어 공주였다.
지난 한 달 동안 카일은 다양한 연회와 사교적 모임에 참석했지만 항상 혼자였다. 보통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인이 있으면 함께 동석하며 그 관계를 주변에 알리는 게 관례건만 카일은 항상 혼자 나타난 것이다.
클레어 공주 스스로도 자신의 별궁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이 카일에게 말했다
“결혼이 정해지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화이트 백작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작 또 다른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군요. 클레어 공주님은 함께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대방의 질문에 카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요즘 운동에 빠져서 말이죠. 제 호위 기사와 함께 몸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하긴, 공주님은 운동이 좀 필요하긴 합니다. 하하하하…….”
비웃음이 가득한 상대의 말은 ‘네 약혼녀 뚱뚱하다.’라는 조롱의 의미가 가득했다. 그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운동은 좋은 거죠.”
지금 클레어 공주는 발레리아의 지도 아래 그렇게 꿈꾸던 검술을 마음껏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뭐, 나중에 보면 알겠지.’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혼식까지는 저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카일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비웃었다.
“급하게 살 빼려고 발악을 하는군.”
“그래 봐야 드레스에 들어가기나 하겠어?”
“결혼식 날 볼 만하겠군.”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뚱뚱한 사람은 긁지 않은 복권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