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카일은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최고의 스승들을 곁에 두고 죽을 듯이 수련해서 얼마 전에 간신히 익스퍼트에 도달했다. 그런데 클레어는 수련에 제대로 시간을 투자하지도 못했는데 익스퍼트라니…….
‘천재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천재야.’
아마 빅토르의 재능을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것은 눈앞의 클레어 공주일 것이다.
“대단하시군요.”
“예. 아……. 그리고 마법도 쓸 수 있어요. 4서클이 고작이지만·…….”
“이런 재능충.”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전생의 언어가 나와버렸지만 카일은 애써 진정했다.
제대로 수련도 하지 않았는데 익스퍼트에 4서클의 마검사. 이건 신분을 떠나서 순수하게 인재로서 영입하고 싶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만약 여기에 내가 능력까지 각성시켜 준다면…….’
어쩌면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를 뛰어넘는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과연 그녀를 각성시켜도 될까?’
이제 와서 카일은 자신의 능력을 숨길 생각은 없었고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최후의 보루로 한 가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카일이 각성시킨 인물은 모두 노예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일반인은 절대 각성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카일의 곁에 있는 마법사들은 카일의 능력을 각성 마법의 술식을 응용해서 인간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이능력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완전히 틀린 가설이었지만 카일로서는 유리한 오해이니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소문이 넓게 퍼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좀 망설여지는데?’
잠시 생각하던 카일은 클레어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사람의 가능성을 한 차원 높게 끌어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능력을 사용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상대가 저에게 종속 마법으로 종속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죠.”
“아… 그런가요?”
“예. 그래서 제 부하들은 모두 저와 노예 계약으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저는 틀림없이 소문대로 백작님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진지하게 말하는 클레어 공주에게 카일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혹시 눈치 없다는 말 많이 듣지 않으시나요?”
“예?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아닙니다. 크흠…….”
카일은 헛기침으로 말을 끊은 후 다시 이어갔다.
“어쨌든 저는 공주님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공주님이 저를 완전히 믿고 따라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도 모험가가 될 수 있나요?”
“모험가도 될 수 있고, 원한다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겠어요.”
두말없이 받아들이는 클레어 공주에게 카일이 손을 들어서 제지하며 말했다.
“일단 제 말을 모두 듣고 답해 주십시오. 충동적으로 답할 정도로 가벼운 조건이 아닙니다.”
“…예.”
“우선 첫 번째는 저하고 결혼을 하셔야 합니다.”
“겨, 결혼? 저하고요?”
카일의 말에 클레어는 크게 놀랐다. 뒤편에 있던 발레리아와 아리시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결혼을 하신다고? 주인님이?’
‘축하… 축하, 축……. 크윽, 못해. 못해. 축하할 수가 없어. 축하해야 하는데…….’
두 사람은 카일의 결혼 소식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뒤에서 아리시아가 주먹을 꽉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기는 했지만, 카일은 미처 보지 못한 채 클레어 공주를 보고 말했다.
“공주님이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 공주님이 빅토르 전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예.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와 결혼을 하고 저의 아내가 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남편인 제가 공주님의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면 공주님은 모험가가 될 수도 있고 상인이 될 수도 있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죠.”
“그…렇군요.”
순간 클레어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파에서 일어날 뻔했다. 카일이 제시한 조건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공주님이 저를 믿어 주셔야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믿을게요. 어차피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클레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백작님은 괜찮으신가요? 제가… 아내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니들과 달리 그…….”
“살이 좀 찌기는 하셨군요.”
“그 정도가 아니죠. 제가 돼지하고 뭐가 다른가요?”
카일의 말에 클레어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도 스스로의 외모에 콤플렉스는 가지고 있었다. 그녀라고 날씬해지고 예뻐지고 싶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 그녀의 앞에 보이는 두 여자만 봐도 그렇다.
금발의 하프 엘프와 적발의 여기사. 둘 다 카일의 애인으로 소문난 노예들이다. 하지만 노예라도 해도 사람들은 그녀들을 섣불리 대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카일 화이트가 총애하는 노예이기도 하지만 그냥 외모로만 봐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은 신분이 공주이기는 하나, 뚱뚱한 체형 때문에 항상 움츠려 있다. 자기 앞에서 공손하게 말해도 뒤에서 자신을 두고 비웃는 사람들은 질리도록 봐왔다.
“만약, 저하고 결혼을 하신다면 세상 사람들은 백작 부인이 뚱뚱하고 못생긴 돼지라며 놀릴 거예요.”
그녀의 말에 카일은 클레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흐으음.”
“왜… 그러시죠?”
“뚱뚱한 건 사실이지만, 못생겼다는 말은 누가 하던가요?”
“어, 그건……. 언니들이 항상 말했어요. 저보고 못난이라고요.”
“훗, 그래요?”
카일은 피식 웃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빅토르의 다른 딸들은 그럭저럭 미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뭐랄까……. 그렇게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미인들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 열 명 모아 놓으면 그중에 한 명은 예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
왕가의 재력으로 각종 드레스와 장신구, 최고급 화장품과 향수 등 갖가지 것들로 치장해서 그 정도였다.
‘그러고서 자기들 여동생은 못난이라고 불렀다 이거지?’
카일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클레어 공주님이 다른 공주님들보다 더 예쁩니다.”
“예? 그게 무슨…….”
“살만 빼면 말이죠.”
카일의 말에 클레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빈말은 많이 들어봤어요. 어차피 제가 살을 못 빼니까 하는 말들인걸요.”
“저는 빼줄 수 있습니다.”
“…예?”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카일은 이 부분에서 조금 망설였지만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하고 종속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종속……. 저보고 노예가 되라는 건가요?”
클레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노예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말이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카일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노예가 되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종속 계약만 맺어 달라는 것이죠. 계약 조건도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도 좋습니다. 그저 저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부분만 맺고 공주님의 자유 의지는 건드리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믿죠?”
“그래서 처음부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를 완벽하게 믿어야 한다고요.”
“…….”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카일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저는 공주님에게 기회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회를 받을지 말지는 오직 공주님의 몫입니다.”
“…….”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수도를 떠나기 전에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카일의 말을 끝으로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클레어가 나간 후.
“후우우……. 힘들군.”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대 늘어졌다. 그런 카일에게 발레리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저 공주님이 마음에 드신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다른 공주들이 워낙 싫어서 말이야. 소거법으로 진행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저 공주님만 남는군.”
“흐음, 다른 공주님들은 뭐가 문제인데요?”
“성격도 안 맞고 조건만 따지고 드는 것도 싫지만, 가장 거슬리는 건 너희들과의 관계까지 개입하려고 한다는 거지.”
“예……? 어머!”
“주인님.”
카일은 발레리아와 아리시아를 끌어당겨서 양팔로 안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결혼을 해도 너희들은 내 여자야. 평생 내 곁에 둘 거야. 그걸 방해하는 여자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어.”
카일이 보기에 클레어 공주는 아리시아나 발레리아를 보면서도 아무런 악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의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녀와 결혼한다면 카일은 지금 곁에 두고 있는 여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님, 저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마, 맞…아요. 저는 주인님이 버리시지만 않으면 돼요. 그것만 해도 충분해요.”
그녀들의 말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더 강하게 그녀들을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버리라고 해도 절대 안 버려.”
어쨌든 동전은 던졌다. 이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이제 클레어 공주, 그녀의 몫이었다.
* * *
클레어는 자신의 방에서 생각에 잠겼다.
“결혼까지라면 괜찮지만… 종속 계약까지 제시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정말로 중증의 인간 불신인 건가?”
하지만 마냥 화를 내고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카일은 그녀에게 두 가지 이득을 제시했다.
하나는 그녀의 인생을 지금보다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것. 두 번째는 그녀에게 모험가로서 활동할 때 도움이 되는 더 강한 능력을 주겠다는 것.
하지만 그 외에도 클레어가 강하게 끌리는 조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진짜 뺄 수 있다는 건가, 이걸?”
그녀는 방에 있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봤다.
커다란 햄처럼 퉁퉁해져 있는 팔다리와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살덩어리들…….
“…….”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추했다.
어린 시절 모진 학대로 변해 버린 체형과 정착된 식습관은 그녀를 끔찍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가장 아름답고 싱그러워야 할 17세의 소녀였지만 클레어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는 것도 괴로울 정도였다.
‘이 살을 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평범해질 수 있을까?’
많이 예뻐지는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여자들만큼만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훗, 어차피 이런 몸뚱어리로는 아무도 안 데리고 가겠지?”
그녀는 결정했다.
카일을 100% 믿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그녀의 인생은 남은 평생 잿빛일 것이다.
“아마도 이게 내 인생의 첫 모험이 되겠지.”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 * *
다음 날, 클레어는 바로 카일에게 찾아가 말했다.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어요.”
“정말입니까?”
“예. 그러니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당당하게 기회를 요구하는 클레어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섭겠지. 그래도 용케 결정했군.’
카일은 그녀를 두고 말했다.
“아직 시간이 좀 있습니다. 성급하게 결정하신 것 같다면 좀 더…….”
“괜찮아요. 이미 결정했어요.”
한 번 결심한 이상 뒤로 물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클레어를 보고 카일이 말했다.
“확실히, 공주님은 전하와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예?”
“모험가로서 대성할 소질이 있다는 뜻이죠.”
카일의 말에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