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리시아는 카일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게 싫어서 항상 한 걸음 물러나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인간 불신에 돈만 밝히는 수전노,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음흉한 인간. 카일은 충분히 이상한 놈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아리시아도 그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닌 척, 정색을 하고 클레어 공주에게 말했다.
“그런 건 헛소문입니다. 저희들은 그저 주인님의 도구이자 노예일 뿐입니다. 가끔 주인님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기는 하지만 그건 저희가 주인님에게 사용되는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 하지만…….”
“주인님의 인품을 의심하는 이들은 주인님의 능력에 질투심을 품은 저열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저희 주인님은 그저 저 같은 미천한 노예에게도 자애를 보여 주실 정도로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이실 뿐입니다.”
아리시아의 필사적인 변호에 클레어 공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기… 당신께서 그렇게 감싸시면 감싸실수록 백작님이 평소에 당신들을 총애하고 아껴 주신다는 방증이 되지 않나요?”
“…….”
순간 아리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입을 다문 아리시아에게 클레어 공주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종속 계약이 되어 있다고 해도 보통은 이렇게 주인의 인품이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나서서 변호하지는 않잖아요. 그게 보편적인 노예와 주인의 관계이지 않나요?”
아리시아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공주님은 무척 영리하시군요.”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
“하지만 눈치는 좀 없으십니다. 때로는 진실을 알아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이 서로를 향한 배려랍니다.”
카일의 말에 클레어 공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그만…….”
“괜찮습니다. 공주님의 말대로 그녀는 제…….”
카일은 말을 끌며 슬쩍 아리시아를 보다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제 애인입니다. 노예이긴 하지만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죠.”
“주… 주인님…….”
아리시아는 당황하는 한편 너무 기뻐서 말을 잇지 못했다.
카일이 그녀를 두고 애인이라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자 아리시아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행복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주인님의 애인. 내가… 내가…….’
아리시아는 온몸을 가득 채우는 행복에 뇌 기능이 정지해 버릴 것 같았다. 카일은 그런 아리시아를 두고 눈앞의 클레어 공주에게 집중했다.
“저에게 용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론을 들어 볼까요?”
“예, 예? 그게 사실은…….”
클레어 공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저를 백작님의 부하로 받아들여 주실 수 있을까요?”
“…부하?”
이건 카일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카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부하라면 어떤 부하를 말하는 겁니까?”
“저는 모험가가 되어서 던전에 들어가고 싶어요. 아버지처럼요.”
점점 더 뜻밖의 이야기였다.
“사정을 좀 알 수 있을까요?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공주님이 어째서 모험가가 되겠다는 겁니까?”
“그건…….”
클레어 공주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클레어 폰 고르시파. 그녀는 빅토르가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애인 중 한 명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친모가 죽었지만 빅토르는 제 핏줄인 그녀를 거둬서 키웠다.
빅토르는 여자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만큼은 철저하게 책임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모험가로서 던전 공략에 매진하는 빅토르가 시간을 내어 아이에게 하나하나 애정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빅토르는 클레어를 자기 아내들에게 맡겨 둔 채 다른 아이들과 함께 키우게끔 했다. 정작 본인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친부모가 아닌 이들의 손에서 자란 클레어는 정서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반쯤은 방치되다시피 자랐다.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주변에 여럿 있었지만,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친자식만 챙길 뿐, 그녀를 귀찮아했다.
사실 빅토르의 여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녀들은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저 아이를 돌봐 주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결과 어린 클레어는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고, 그런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영양실조로 쓰러져 버렸다.
반쯤 방치되던 클레어였지만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빅토르는 크게 놀랐다. 놀란 그는 황급히 클레어를 찾아갔고, 의사로부터 그 원인이 영양실조라고 전해 듣자 빅토르는 아내들을 불러서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집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 어린 것이 영양실조로 쓰러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모두들 뭣들하고 있느냔 말이야!”
빅토르의 분노는 아내들에게 쏟아졌고 그녀들은 크게 혼이 났다.
그 후 클레어는 그녀들은 클레어의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해서가 아니었다. 치졸하고 유치한 복수였다.
“더 먹으렴.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또 쓰러지면 나만 남편에게 욕을 먹잖니?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니”
“먹어. 절대 남기지 마. 남기면 잠도 못 잘 줄 알아!”
그녀들은 어린애가 다 먹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막대한 식사를 강요했다. 사실 그건 학대였다.
어린 클레어는 위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계모들의 협박과 감시를 받으며 식사를 해야 했다.
그렇게 소화 불량을 겪으면서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길 수년. 그 결과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몹시 뚱뚱한 체형으로 변해 버렸다.
클레어가 살이 찌고 뚱뚱해지자 주변의 형제들은 그녀를 놀리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돼지야. 넌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쪘니?”
“집에 있는 밥은 네가 다 먹지?”
“걷는 것보다 구르는 게 빠른 거 아니야?”
그녀는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 갔고 우울해졌다.
그런 클레어가 유일하게 동경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모험가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성 모험가.
“클레어 아가씨, 여기서 뭐 하세요?”
“또 연무장에 오셨네요. 같이 운동하실래요?”
설령 집안에서는 학대와 구박을 받는다고 해도 스톰 클랜의 모험가들에게 클레어는 빅토르의 딸이었다. 클랜장의 딸을 함부로 대할 모험가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가 뚱뚱하다고 놀리지도 않았다. 특히 여성 모험가들은 클레어를 친딸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클레어에게 그녀들은 상냥하고 멋있는 동경의 존재였다. 강하고 당당하면서도 덩치가 큰 남자들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는 그녀들은 클레어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클레어는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딸이라는 것이었다.
빅토르는 꽤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아들은 강하게 훈련을 시켰지만 딸들은 곱게 자라기만을 원했다. 그래서 귀족 출신의 가정 교사를 붙여서 딸들은 교양과 예절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어쩌면 모험가의 신분이라고 해도 스스로가 아직 귀족가의 후예라는 것을 자각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환경 속에서 클레어가 모험가로서 활동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빅토르가 던전 공략자가 되고 나라를 건국하면서 클레르의 상황은 더 안 좋아졌다. 이제 그녀는 명백하게 공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언니 자매들은 이 변화를 크게 기뻐했지만 그녀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공주가 되었으니 모험가라는 꿈은 이제 완전히 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체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쉬이 체념할 수가 없었다. 정작 그녀의 아버지는 일국의 왕이 되고 나서도 계속 던전에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아버지를 따라서 오빠들도 던전에 따라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인 자신은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고귀한 신분의 공주로 살아가는 것보다 모험가가 되어서 던전을 누비며 살고 싶은 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체념과 갈망의 늪에 빠져 있을 그때, 그녀는 카일의 소식을 들었다.
카일 화이트. 그는 바이에른에 있을 때부터 이미 유명했던 모험가였다. 이 남자가 왕국의 실세로 부상했다느니 남방 대륙과의 해양 무역을 진행하려고 한다느니……. 그의 소문은 화려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그런 화려한 소문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카일이 유능한 모험가라는 것 하나였다.
‘그렇다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카일이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 과감하게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 과감한 행동은 별궁 앞에서 언니에게 걸려서 구박을 받는 불운을 낳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카일과 만남을 가지고 그에게 자신의 본심을 말하는 것에 성공하는 행운까지 불러왔다.
* * *
그녀의 사정을 모두 들은 카일은 일단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참의 생각을 마친 후 카일은 진중히 입을 열었다.
“우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빅토르 전하께서는 저한테 공주님들을 소개해 주시면서 클레어 공주님을 뺐습니다. 왜 그런 거죠?”
“그건…….”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언니들과 달리 예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뚜… 뚱뚱하니까요.”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수치스러운지 클레어는 얼굴을 붉혔다.
살을 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한 번 잘못 든 버릇은 고치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인데.’
카일은 빅토르에게 유감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부모라면 자식을 감싸고 사랑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비록 카일 스스로는 전생을 포함해서 한 번도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었지만 상식적으로는 그랬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으로…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하셨죠?”
“예. 꼭 되고 싶습니다.”
“모험가로서 던전에 들어가서 싸우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실례지만 공주님은 이제까지 어떤 수련을 하셨나요?”
카일의 말에 클레어 공주는 앞에 있는 티스푼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익스퍼트?”
티스푼에 옅게 서리는 오러는 그녀가 익스퍼트의 경지라는 증거였다.
“오오…….”
그 모습에 카일은 크게 놀랐고 한 걸음 뒤에서 보고 있던 발레리아도 상당히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정작 모두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 클레어는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초급입니다. 아무래도 수련을 할 시간이 부족해서…….”
“수련 시간이 부족했는데 익스퍼트에 오르셨다고요? 그것도 이제 열일곱에?”
“저는 빅토르 폰 고르시파의 딸이니까요.”
“하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