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남방대륙과의 무역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가져올 대박 사업이다. 그 사업을 카일이 독점적으로 진행하고 관리하게 되면 카일의 위상은 고르시파 왕국에서 어디까지 솟구칠지 모른다.
국왕인 빅토르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세상 그 어떤 왕도 자신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신하를 원하지는 않는다. 배신의 위험성을 항상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빅토르가 카일의 사업을 허락하고 전폭적으로 허락하기 위해서는 카일이 빅토르에게 믿음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빅토르가 제시한 것이 바로 정략결혼이다.
생각해 보면 무척 정석적이 방법인 동시에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비록 정략이라고 해도 결혼을 하고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피로 맺어지는 혈맹이 되는 것이다.
빅토르는 모험가 시절부터 여러 명의 아내들을 두었고 자식들도 많았다. 그중에 시집가지 않으면서도 결혼 적령기인 딸은 다섯 명이 있었는데 카일은 그 다섯 명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사실, 다섯 명 중에 한 명을 고른다는 선택지를 준 것만 해도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 보통은 ‘내 딸하고 결혼해.’라고 하면 그냥 ‘예.’ 라고 말해야 하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그 첫 만남으로 카일의 앞에 나타난 게 지금의 로지 공주인데 그녀는 제법 귀티가 나는 모습이 전형적으로 곱게 자란 미인의 모습이었다. 다만…….
“백작님이 왕국 제일의 부자라고 들었어요? 돈이 얼마나 많은가요? 아버지보다 더 많은 건가요?”
“예, 뭐…….”
카일의 취향은 아니었다.
* * *
며칠 후.
“하아아……. 진짜 이걸 어쩌냐?”
카일은 난감했다.
빅토르와의 약속을 했다. 다섯 명의 딸 중에 하나를 골라서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말이다.
솔직히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빅토르와의 연결 고리도 더 강해지고 왕족과 결혼함으로 인해서 정치적인 입지도 다질 수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 상대를 카일이 골라도 된다는 것은 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어차피 정략혼인 만큼 딱히 사랑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지간히 참고 살아 줄 정도의 상대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길, 어떻게 다섯 명이 다 꽝이지?”
빅토르의 딸 다섯 명을 다 만나 봤지만 그 다섯 명은 모두 지뢰였다.
외모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빅토르는 왕이 되기 전부터 대형 클랜을 이끌고 있었고 그 딸들도 관리를 꾸준하게 하면서 지낸 덕분인지 모두 평균 이상의 미인이었다. 뭐, 아리시아나 발레리아 같은 반칙 수준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애당초 정략결혼에서 미모를 따지는 건 웃기는 일이다.
카일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성격이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고 알게 된 것은 그녀들이 카일의 배경에 막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고르시파 왕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가장 발전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바로 카일이다. 거기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남방대륙과의 무역마저 성공하면 어디까지 성장할지 모른다.
그녀들은 그런 카일의 배경에 막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이 카일의 아내가 되면 자신들도 카일이 만들어 놓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예 자기 몫으로 어떤 이권을 넘겨줄지를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이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영리한 것 같기도 했다. 카일이 왕실과 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들 몫을 챙기려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카일의 입장에서는 짜증 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몇몇 공주는 카일의 뒤에 서 있는 아리시아와 발레리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평범한 미인 축에 간신히 들어가는 그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리시아와 발레리아의 미모는 질투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여신이 내려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들의 미모는 이미 킹스 캐슬의 전역에 유명해졌다. 그녀들의 신분이 노예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카일이 지금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꽤나 성가신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카일의 아내가 될 공주들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들이 카일의 곁에 있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귀족들이 첩을 들이거나 노예를 거느리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자신들이 초라해질 수 있는 미인들이 남편의 곁에 즐비한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녀들은 노골적을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를 경계했고 개중에는 카일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저하고 결혼하면 저 둘은 어디 먼 곳으로 치워 주세요. 약속하실 수 있겠죠?”
할 리가 있는가?
이미 아리시아와 발레리아 그리고 레이나는 카일에게 있어서 최고로 믿을 수 있는 측근인 동시에 가족이었다.
카일은 당시 화가 났지만 일단은 아무 말 없이 돌려보냈다. 상대가 빅토르의 딸이 아니었다면 결코 순순히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제길, 이제 와서 약속을 물릴 수도 없고…….”
그 인성 폭탄 다섯 중에 한 명과 결혼을 하기로 빅토르와 약속을 했다. 어떻게든 그중에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군, 저희는 괜찮습니다. 부디 주군에게 도움이 되는 분과 결혼을 해주십시오.”
그런 카일의 고민을 알고 발레리아가 이렇게 조언을 했다. 옆에 있는 아리시아는 아무 말 없이 꾹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카일의 결혼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노예가 카일이 주인인 이상 언젠가 진짜 아내가 카일의 옆에 들어앉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걸 생각만 하면 손이 덜덜 떨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충동이 솟구치려고 했다.
“저도,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괜찮아요.”
아리시아는 질투심보다 카일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일은 그런 두 사람의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결혼을 하기로 약속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까지 카일이 쌓아올린 인생의 소중한 것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카일이 빅토르와 담판을 짓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넌 도대체… 얘가… 꺼…….”
그런데 그때, 카일이 머물고 있는 별궁의 밖에서 누군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확인해 볼까요?”
“아니, 직접 가봐야겠다.”
카일은 자신의 별궁 입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스스로 움직였다.
별궁 입구에는 카일이 아는 사람 한 명과 모르는 사람 한 명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멜리사 공주님.”
“어머? 백작님. 나오셨나요?”
그녀의 이름은 멜리사 폰 고르시파.
다섯 명의 폭탄 중에서도 카일이 핵폭탄으로 분류한 인물이다.
카일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카일을 보고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카일의 팔을 덥석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보고 싶어서 찾아왔답니다. 아직 식사는 전이죠.”
“먹었습니다.”
안 먹었다. 하지만 멜리사 공주를 보자마자 입맛이 싹 사라져서 그냥 먹을 생각도 사라졌다.
카일은 자기 팔에 달라붙어서 가슴을 비비는 멜리사 공주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런데 무슨 소란입니까? 여기는 빅토르 전하께서 제게 머물게 허락해 주신 별궁입니다. 공주님이라고 해도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어머,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저 계집애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니까 그런 거죠.”
“저 계집애?”
카일이 시선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소녀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제법 있어 보였다.
팔다리가 오동통하고 몸과 얼굴도 둥실둥실하게 되어 있는 그 소녀는 지금 고도비만견이 되어 있는 화이트가 떠오르게 했다.
‘전형적인 비만형 체형이군.’
“실례합니다.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카일이 소녀에게 물어봤지만 대답한 것은 멜리사였다.
“부끄럽지만 제 동생이랍니다. 하아……. 진짜 어디 가서 동생이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창피하지만 말이죠.”
“동생?”
카일이 알기로 빅토르가 제시한 상대는 다섯 명이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딸 중에서 적령기의 딸은 다섯 명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소녀는 왜 제외되었을까?
“혹시, 이미 결혼을 하셨나요?”
“하아……. 농담이죠? 저걸 누가 데리고 가요?”
카일의 말에 대답한 것은 이번에도 멜리사 공주였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자기 동생을 비웃었고 소녀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지금 열일곱이랍니다. 하아아…….”
멜리사 공주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백작님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저 계집이 백작님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지 않겠어요? 뭐, 무슨 생각인지는 뻔하죠. 자기도 일단 공주라고 백작님을 만나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아니, 아니에요.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에요…….”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멜리사 공주가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세우며 말했다.
“감히 언니가 말하는데 어디서 말대꾸야!?”
그녀의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게 울려 퍼졌고 카일은 자연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쩜 이렇게 짜증 나는 성격과 짜증 나는 목소리를 같이 가질 수 있지?’
카일이 멜리사 공주를 핵폭탄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성격이 가장 허접했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자기 잘난 척에 끝이 없으며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난폭했다. 그녀를 따르는 시녀들의 표정에서는 그녀를 향한 두려움이 보였고 목덜미나 손목 같은 곳에는 매질을 한 자국도 보였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녀가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를 보고 한 말이 카일을 엄청 화나게 했었다.
그녀는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를 봤을 때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듯했다.
그리고 카일에게 하는 말이…….
“저하고 결혼하시면 저것들은 치워 주세요. 더러운 노예들 주제에 백작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기분 나쁘네요.”
바로 저거였다.
그래서 카일은 그녀를 핵폭탄으로 분류한 것이다.
‘진짜 공주만 아니면…….’
카일은 어쩐지 그녀의 혈압을 올려 주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았다.
“공주님,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카일은 정중한 태도로 소녀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크…… 클레어 폰 고르시파라고 합니다.”
소녀는 예법에 충실한 인사로 답했다. 카일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
“저에게 용건이 있으셔서 찾아오셨나요?”
“예. 예……. 그, 결혼 얘기는 아니고 다른 용건인데 괜찮으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안에서 얘기하도록 하죠.”
그리고 카일은 소녀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며 방 안으로 이끌었다.
“백작님. 그런 돼지하고 같이 얘기를 하시다뇨? 시간 낭비예요!”
뒤에서 멜리사 공주가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카일은 신경 쓰지 않고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손님 이외의 사람을 돌려보내라.”
“예. 주군.”
그리고 발레리아는 힘으로 문을 닫으며 멜리사 공주를 돌려보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뭐야? 비켜! 이 더러운 노예가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야? 이러고도……. 아아아… 아파! 아프다고!”
“돌아가 주십시오.”
발레리아는 공주를 힘으로 밀어냈다. 멜리사 공주는 어떻게든 안 밀리려고 버텼지만 힘으로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버텨 봐야 그녀가 아플 뿐이었다.
발레리아는 일부러 눌러서 아픈 뼈 부위를 지그시 누르며 밀어냈다.
‘쌤통이다.’
카일은 방 안에 들어가면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꼴 보기 싫은 핵폭탄 멜리사 공주를 엿 먹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은 상쾌했다.
‘저거 하고 결혼하느니 평생 무인도에 처박혀서 혼자 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카일에게 클레어 공주가 말했다.
“저기, 백작님.”
“아아……? 아, 실례했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카일은 클레어 공주를 자리까지 정중하게 에스코트하고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차 두 잔 부탁해.”
“예, 주인님.”
공손하게 대답한 아리시아는 익숙하게 차를 끓여 와서 카일과 클레어 공주의 앞에 두었다.
“이 분은……. 소문의 백작님의 애인이신가요?”
클레어의 말에 아리시아는 크게 당황했다.
“무… 무슨, 아닙니다. 저는 그저 미천한 노예일 뿐입니다. 말을 거둬 주십시오.”
아리시아는 상당히 단호하게 말했다.
카일의 애인이라니? 생각만 해도 행복한 위치였다. 하지만…….
‘절대 안 돼. 주인님의 입지와 명예가 엉망이 되어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