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빅토르는 카일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양심은 있는 거 맞지?”
“크흠, 저 말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맡겨도 괜찮습니다.”
카일은 그냥 뻔뻔하게 나왔다. 카일에게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고.
“하아, 그런 인재가 있을 리가 없지.”
이게 통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빅토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계획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카일이었다. 나라 전체를 돌아봐도 카일밖에 없었다.
다만, 일국의 왕으로서 한 명에게 이 정도의 이익을 한 번에 몰아주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빅토르 입장에서는 카일이 완벽하게 자기 사람이라는 확증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그렇다면…….’
빅토르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말을 받아들이지.”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일단…….”
“단, 조건이 한 가지 있네.”
“조건이라고요?”
“그래. 뭐, 별것 아니고 그냥 사소한 조건이지만 자네가 무조건 받아들여 줘야 하네.”
“그게 뭡니까?”
“일단 받아들인다고 말해 주게. 자네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닐 거야.”
“제 입장에서 손해가 아니면 일단 말해 주십시오.”
“대답 먼저.”
“설명이 먼저입니다.”
카일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백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짓은 하지 않는다.
결국 빅토르가 한 걸음 물러났다.
“내 조건은…….”
빅토르의 조건을 다 들은 순간 카일은 크게 당황했다.
“진심입니까?”
“물론이지.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할까?”
“그건…….”
“아니면 뭐지? 내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뭐, 없습니다. 없기는 하지만…….”
“그럼 됐군. 받아들이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닌가?”
카일은 머릿속으로 생각해 봤다.
빅토르의 조건은 생각보다 좋은 내용이었다. 카일에게 나쁠 것이 없었었고 몹시 타당하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제가 골라도 될까요?”
“그렇게 하게. 그 정도 자유는 주지.”
“알겠습니다.”
결국 카일은 받아들였다.
감성적으로는 뭔가 꺼림칙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빅토르의 제시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감성과 이성이 대립하면 항상 이성을 택하는 카일이었다. 자신을 일부러 타일러서라도 말이다.
* * *
얼마 후.
빅토르 국왕이 공식적으로 킹스 캐슬에 귀환했다.
사실은 이미 한참 전에 귀환해서 카일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맥주나 홀짝이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환한 것은 오늘이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자마자 공식적으로 카일을 왕궁으로 소환했다.
“저자가 카일 화이트 자작인가?”
“이제 곧 백작이 될 테지요.”
“거참, 이제야 얼굴을 보는군.”
“쯧, 저 친구 폐쇄적인 건 바이에른 시절부터 유명했지만…….”
“진짜 인간 혐오 아닐까?”
대전에 나타난 카일을 보고 정통파 귀족과 국왕파 귀족들은 수군거렸다.
카일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대전의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있는 빅토르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 카일 화이트 자작, 빅토르 폰 고르시파 1세 전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수고 많았다. 고개를 들어라, 화이트 자작.”
빅토르는 평소와 다르게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 노릇을 몇 년 하면서 장소에 따라서 분위기를 바꾸는 정도의 내숭은 익힌 모양이다.
카일이 고개를 들자 빅토르가 말했다.
“그동안 영지를 잘 다스리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화이트 자작.”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당연한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지.”
빅토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을 슬쩍 훑어봤다.
여기 있는 귀족들 중에 몇몇은 지방에 영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지를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킹스 캐슬에 머물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다른 나라라면 모를까. 건국 초기인 고르시파 왕국에서 지방의 영주는 각 지역의 영지를 다스리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데 저마다 수도에 와서 중앙 정치에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찔리는 게 있는 귀족들은 빅토르의 눈을 피했고, 빅토르는 다시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눈부신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작위를 한 단계 상승해서 백작의 위를 내리겠다.”
“과분한 직위를 삼가 무겁게 받겠습니다.”
“음…….”
빅토르는 자신의 검을 뽑았다.
보통 왕들이 작위 수여에 사용하는 검은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예식용 검인 경우가 많지만 빅토르의 경우는 다르다. 이것은 그가 모험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고락을 함께한 진짜 그의 애검이었다.
정성껏 관리했지만 검날에서 피 냄새가 풍기는 검이 카일의 양쪽 어깨를 두드렸다.
“이로서 그대를 카일 화이트 백작으로 임명한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이제 백작위인가?’
‘백작이 되었으면 저 친구다. 중앙 정계로 진출할지 모르겠군.’
‘막강한 자금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꼭 우리 파벌로 끌어들여야겠어.’
귀족들은 카일을 보며 정치적인 계산기를 마구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빅토르가 카일에게 말했다.
“화이트 백작. 작위가 승작한 기념으로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하라.”
“예. 실례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있사옵니다.”
“백작이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국가를 위한 것이겠지. 그게 무엇인가?”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사전에 맞춰 놓은 것처럼 서로 잘 맞물렸다.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남방대륙과의 해양 무역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순간 대전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남방대륙과의 무역?”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무리야. 불가능해. 우리 나라 남쪽에는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지역인데 어떻게 남방대륙까지 해양 무역을…….”
빅토르는 귀족들을 무시하고 카일만을 보면서 말했다.
“호오오, 남방대륙과의 해양 무역이라? 그게 가능하겠는가?”
“예.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전하의 윤허를 얻고 저에게 남방대륙과의 무역에 관련된 외교 교섭을 일임해 주신다면 올해 안에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그렇군. 그대가 원한다면 한번 진행해 보라. 거기에 따른 행정적 절차와 법적인 제도가 필요하다면 그것도 전부 일임하겠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카일이 이렇게 말한 순간 귀족 한 명이 튀어나오듯이 말했다
“전하, 잠시 멈춰 주시옵소서.”
“무엇인가? 이고르 후작.”
중간에 나와서 말을 한 남자는 하얀 수염을 성성하게 기른 노년의 귀족이었다.
예순은 훌쩍 넘은 그 노귀족, 그 이름은 폴라드 젠 이고르 후작. 현재 고르시파 왕국의 정계를 양분하고 있는 정통파 귀족의 수장이다.
국왕파 귀족들은 원래 정통파 귀족들의 권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통파고 뭐고 간에 건국 전부터 국왕인 빅토르와 함께 피와 땀을 흘리며 나를 세운 그들의 입장에서 정통파 귀족들은 모두 거들먹거리기 바쁜 굴러온 돌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다르다.
이고르 후작은 원래 루마니스 제국 출신의 귀족으로 빅토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르시파 가문과 인연이 있었으며, 빅토르가 나라 밖으로 나가서 모험가로 활동할 때도 꾸준하게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즉, 정통파 귀족이긴 하지만 빅토르 국왕과의 인연 자체는 누구보다 오래된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그가 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빅토르의 초빙을 받고 작위를 받아들였다. 국왕파 귀족들도 굴러온 돌 취급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빅토르 역시 이고르 후작에게는 상당히 예우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빅토르 입장에서도 선친과도 인연이 있는 이고르 후작이니 말이다.
그런 이고르 후작이 나서서 말했다.
“전하, 지금 화이트 자작… 크흠, 실례했습니다. 화이트 백작이 하는 말을 그냥 믿고 받아들이시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가 남방대륙과의 무역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그것의 실현 가능성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오래전부터 싱카라 제국에서도 남방대륙과의 무역을 위해서 많은 공을 들여 봤지만 번번이 실패만 거듭했습니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카일이 나서서 담담하게 말하자 이고르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작, 여기는 왕국의 대전일세. 모험가 특유의 배짱과 도전 정신으로 국책사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이고르 후작의 말에 정통파 귀족들은 몇 마디를 덧붙이며 거들었다.
“후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저 자신감 하나로 일을 추진했다가 실패라도 하면 그것은 곧바로 국력의 손실로 이어집니다.”
“전하. 남방대륙과의 해양 무역은 중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일이 들어보니 반대를 외치는 정통파 귀족의 대부분은 자세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자신들의 정치적 수장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목적인 듯했다.
‘한심한 것들.’
카일이 보기에는 단체로 짹짹거리는 모습이 꼭 참새 떼 같았다.
어쨌든 카일의 입장에 잘된 일이다. 일일이 다 설득할 것 없이 참새 대장만 설득시키면 될 테니 말이다.
“크흠, 이고르 후작님.”
카일은 목을 가다듬고 이고르 후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남방대륙과의 무역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의견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이고르 후작은 조금이긴 하지만 당황했다.
‘모험가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모험가 출신의 귀족들을 상대하면서 이고르 후작이 느낀 점이 있다면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품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논리적인 대화를 통해서 국정을 논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과 상식을 갖추었으면 했다.
그런데 국왕파 귀족들 대부분은 그런 게 없었다. 그저 억지를 부리고 우기고 무작정 실행하고 보고……. 그런 국왕파 귀족들의 엉망진창 정책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역시 모험가 출신의 귀족들에게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고르 후작이었다. 그래서 그는 카일 역시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차분하게 자신에게 의견을 구하는 카일의 모습은 기존의 모험가 출신의 귀족들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고르 후작님?”
카일이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이고르 후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크흠, 죄송하오. 이유라……. 그래, 말씀드리지요.”
그는 대전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말을 이어갔다.
“남방대륙과의 해양 무역이 불가능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요. 우선 첫 번째는 해적이오.”
그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후에 말했다.
“우리 나라 남쪽에 있는 사이펀 왕국은 해적의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해역이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게오르그 왕국은 아예 집단적으로 사략 해적선을 운영할 정도요. 가뜩이나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베르나도 왕국에서도 이 해역의 해적들을 상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그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해역을 뚫고 나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사실상 불가능이나 다름없소.”
“그렇군요.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뭡니까?”
카일은 반론보다 우선 차분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그에 이고르 후작도 계속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두 번째는 지형이오. 남방대륙과 우리 중앙대륙의 사이에 존재하는 대규모 군도는 해적들의 은거지인 동시에 복잡한 해류를 생성하고 있소. 그 군도를 지나서 무역을 한다는 것을 알몸으로 던전에 들어가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오.”
그런 이고르 후작의 말에 국왕파 귀족 중에 몇 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몸에 던전은 가능한데? 나 그런 적 있어.”
“너도? 나도. 한 번 있어.”
다행히 그들은 발언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카일의 질문에 이고르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남방대륙의 정세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남방대륙의 북부지역은 ‘연’이라는 나라와 ‘조’라는 나라가 대립하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나라의 성향이 다른 것도 알고 있겠군.”
“…….”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고르 자작은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이어갔다.
“연나라는 상업을 중요시하는 나라고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중앙 대륙과 무역을 해왔소. 하지만 조나라는 군사국가로 사업을 경시하는 나라이오. 오래전에 베르나도 왕국에서는 조나라에 외교 사절을 보내서 무역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소. 그들은 지독하리만치 폐쇄적인 나라란 말이오.”
“그렇다고 듣기는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방대륙과의 무역 같은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는 것이오? 우리 나라에서 최단 거리로 해역을 뚫고 도달한다고 해도 도착하는 것은 조나라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이고르 후작이 강하게 소리치자 국왕파 귀족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잠깐? 그렇다면 우리도 배를 좀 더 몰아서 연나라로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별문제도 아니구만.”
‘저 무식한 인간이…….’
그런 국왕파 귀족의 말에 이고르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아,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연나라와 무역을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카일이 먼저 나서서 그 국왕파 귀족에게 말했다.
“응? 어째서?”
“우리가 연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하면 배의 운행 거리가 길어지는 만큼 유통 마진이 더 붙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대륙 간 무역을 해온 베르나도 왕국과 경쟁력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같은 물건을 가져와도 우리 쪽에서 파는 물건이 더 비싸다면 누가 우리 물건을 구입하겠습니까?”
“어… 어어. 그런가?”
“예. 거기다 어찌어찌 연나라와 무역을 시작한다고 해도 조나라의 해역을 지나가게 되는 이상 조나라에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둘지도 의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역을 하려면 조나라와 해야 합니다.”
“진짜로? 다른 방법은 없고?”
“있으면 좋겠지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바이에른 시절부터 저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사업 얘기 가지고 장난친 적 없습니다.”
카일의 이 말에 국왕파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건 그렇지.’
‘돈 버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힌 친구였으니까.’
국왕파 귀족들이 너무나 쉽게 납득하자 정통파 귀족들은 오히려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저 인간들이 말로 설득이 되는 종자들이었단 말인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