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카일이 묵고 있는 호텔의 로비는 꽤 넓었다. 원래는 백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 그곳에 카일과 빅토르 단 두 사람이 전세 낸 상태로 마주 앉았다.
“크으으으……. 시원하군. 역시 던전 공략 뒤에 마시는 맥주는 최고야.”
카일과 마주한 빅토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맥주 한 잔을 시켜서 단번에 들이키는 것이었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굳이 여기서 마시셔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있지. 국왕이 되고 나니 주변에서 이런 짓을 함부로 못 하게 한단 말이야.”
“어쩔 수 있나요? 일국의 국왕이 천박하게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 촌스럽다고 흉볼 게 뻔한데.”
“그건 그렇지. 젠장, 이놈의 국왕은 왜 이렇게 못 하는 게 많은지. 여기 맥주 한 잔 추가.”
“예? 예……. 알겠습니다.”
호텔의 직원은 국왕의 주문에 다시 맥주를 가져왔다.
빅토르가 다시 맥주잔을 홀짝이기 시작하자 카일이 본론을 꺼냈다.
“던전 안에 들어가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던전 공략은 어제 끝냈지. 8층까지 돌파했어.”
카일은 꽤 놀랐다.
‘역시 던전 공략자인가?’
던전의 난이도는 봐야 알겠지만 본격적으로 공략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8층까지 돌파했다면 대단한 공략 속도다.
“하지만 이동 거리만 해도 열흘은 걸릴 텐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건 비밀이지.”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시시하기는,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면 알려는 주실 거고요?”
“아니, 안 알려주고 약 올리려고 그러지.”
“그럼 됐습니다.”
어차피 빅토르는 던전 공략자다. 그가 던전을 공략하고 나서 신기한 능력과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얘기다.
‘그 능력 중에 뭔가를 사용했겠지.’
지금 카일에게 중요한 것은 빅토르의 능력이 아니다.
“마침 오셨다니 잘 됐습니다. 그냥 여기서 약식으로 백작위를 수여받고 저는 영지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
너무 단호하게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왜요?”
“하아아아…….”
빅토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맥주잔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카일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나 좀 도와주게. 카일. 진짜 미칠 것 같아.”
“…….”
빅토르의 간절한 눈빛을 애써 피하며 카일이 말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도와주겠습니까? 저는 그냥 전하가 맡긴 영지를 성실하게 잘 운영해서 국가의 경제와 발전에 이바지할 뿐이죠. 마침 남방대륙과의 교역을 시작할 참인데 빨리 내려가 봐야겠군요. 승작은 그냥 한 걸로 하고 이제 가면 안 될까요?”
“안 된다니까. 남방대륙과의 무역은 무역이고, 그 전에 이 나라 안의 꼴부터 어떻게 정리 좀 해줘. 제발, 내가 이렇게 빈다.”
국왕파와 정통파의 파벌 싸움은 나날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빅토르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카일은 그런 빅토르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제가 왜 합니까? 전하가 왕이잖아요?”
“자네는 내 충성스러운 신하잖아. 일단은…….”
“뭐, 일단은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거래 관계에 더 가깝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이봐. 자네도 귀족으로서 내 신하의 위치에 있으면 고민하는 나를 위해서 도움을 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전하가 제게 요구하시는 건 제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천하의 카일 화이트가 해결 못 하는 문제가 있기는 있나?”
“일단 지금 제 눈앞에 하나 보이는군요.”
카일은 빅토르를 지그시 바라보며 ‘댁이 내 문제요.’라는 의미를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빅토르는 카일의 눈빛을 슬쩍 피했고 카일은 그런 빅토르에게 말했다.
“저는 제가 전하에게 제시했던 조건을 모두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왕국 내에서 가장 척박하고 힘든 토지를 받았지만 해적을 토벌하고 영지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래. 정말 훌륭하더군.”
“그리고 전하께 던전 공략을 통해서 마석의 수출을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삼으라고 조언한 것도 충분히 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리고 그 남은 약속을 마저 지키기 위해서 저는 남방대륙과의 무역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저에게 일거리를 늘리려고 하시는군요.”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나?”
빅토르의 말에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정치판이 쉬울 줄 알았냐? 이 양반아.’
솔직히 말해서 정치판 같은 건 진짜 들어가고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대로 빅토르를 외면하면 ‘과연 이 남자가 제대로 정치판을 다스리며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영지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돈을 벌고 성공을 해도 나라 전체가 안정화되지 않으면 모든 게 모래성처럼 쓰러질 수 있지.’
정치는 국가의 소프트웨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강하다고 해도 정치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나라가 쇠락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조금 도와주자.’
그리고 도와주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원조도 조금 받고 말이다.
결심을 굳힌 카일이 빅토르에게 말했다.
“지금 최대 고민이 뭡니까?”
“국왕파와 정통파의 대립이지. 이것들 싸우는 꼬라지를 보면 아주 진짜 양쪽 다 그냥 아주 확 그냥 막…….”
‘쌓인 게 정말 많은가 보군.’
카일은 성난 빅토르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양쪽 파벌이 싸우지 않고 화해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양쪽 모두 전하에게 충성하며 힘을 합쳐서 나라를 발전시켰으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원이 없겠군.”
“되겠냐, 멍청아?”
“뭐라고?”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
“크흠…….”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입으로 나온 카일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말했다.
“전하께서는 너무 이상적인 결과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가? 당연한 걸 바라는 게 아니고?”
“예. 수도에 기거하며 나랏일을 하는 귀족들은 필연적으로 중앙 정계에 연관이 되고 그것은 즉, 국가의 권력 중추에서 일한다는 것이죠.”
“그건 알아.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권력이란 결국 분쟁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성은 절대 나눠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
“배에 선장이 둘이든 셋이든지 간에 결국 배가 하나라면 나아갈 방향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좋은 귀족이든 나쁜 귀족이든, 국가를 위해서든 사욕을 위해서든. 그들이 목적을 이루려면 반드시 권력이 필요합니다.”
“마치 고깃덩어리를 놓고 다투는 개새끼들 같군.”
“별로 틀린 비유는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야만적이고 치열할 수도 있으니까요.”
권력은 더럽고 그 권력을 다루는 정치판도 오물투성이의 똥밭이다. 그렇기에 국가가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
역사와 대중에게는 정치판의 추잡하고 더러움을 숨기고 표면에 예쁘게 피어난 꽃만을 보여 주는 것. 그게 카일이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정치였다.
“갈등이 지금까지 흘러왔으면 이제 양쪽이 화해를 하고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두 파벌의 분쟁을 인정하고 그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도록 해야 합니다.”
카일의 말에 빅토르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경쟁을 유도하라고? 여기서 더? 정말 그게 최선책인가?”
“현 상황에 맞는 차선책이라고 해두죠.”
“최선책은 뭔가?”
“없습니다. 애당초 정치판에서 완벽한 해결책은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
빅토르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동안의 침묵 후에 말했다.
“경쟁을 유도하면 서로 간의 대립이 더 격해질 수도 있지 않나? 애당초, 어떻게 여기서 더 경쟁을 유도하지?”
“일단,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지금 수도의 귀족들이 하는 건 경쟁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권력 다툼이죠.”
“…….”
“경쟁이라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두고 옆에 있는 이를 의식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금 수도의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물어뜯기만을 위해서 싸우고 있죠. 이건 경쟁이 아닙니다. 전쟁이죠.”
“으으음…….”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다.
“파벌이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강력한 리더. 즉 빅토르 국왕 전하가 하실 일이죠.”
“흐음, 내가 강력한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이면 된다는 거군.”
“예, 그렇습니다.”
“뭐, 그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
“아니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하하……. 이봐, 카일. 내가 설마 부하들을 휘어잡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이 내가?”
빅토르는 자신의 힘에 강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자기 혼자서도 귀족들을 다 쥐 잡듯이 잡아서 박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그런 힘은 있다. 힘은 있지만, 그 힘만으로는 불충분했다.
“하아아아…….”
카일은 한숨만 나왔다.
‘이런 답 없는 호구를 보았나.’
카일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빅토르 전하는 훌륭한 모험가이며 위대한 영웅이며 강력한 전사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뭐가 안 좋다는 건가?”
“하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보면 그냥 호구입니다.”
“내가? 살면서 어디 가서 호구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쩌죠? 그런데 지금 들으셨습니다. 호구 왕 전하.”
“…….”
빅토르가 뚱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카일은 그런 빅토르의 시선을 받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죠. 만약 전하께서 대전에 귀족들을 모아 두고 명령을 듣게 하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왕명을 내리면 모두 복종하지 않나? 적어도 내 권위에 도전하는 이는 없네.”
“그건 전하께서 강하시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강함이 적이 아닌 신하들에게도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닙니다.”
빅토르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카일은 진짜 초보자를 가르치는 기분이 되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시 예를 들어 보죠. 전하께서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칩시다.”
“대강 비슷하군.”
“그리고 정통파와 왕족파는 말 안 듣는 아들 둘이라고 보죠. 그 둘이서 아버지의 말을 안 듣고 매일같이 죽일 듯이 싸운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일단 말로 타일러야겠지”
“그래도 안 되면요?”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야지.”
“그래도 안 되면요?”
“그럴 리는 없지만 그렇다면…….”
막상 생각해 보니 더 할 것이 없었다. 이미 무력으로 동원해도 안 되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카일은 그런 빅토르에게 말했다.
“만약 어떤 적이 와서 전하의 가족을 해치려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죽여버려야지.”
“그럼 아들들이 서로를 해치려고 하면요.”
“죽…일 수는… 없군.”
빅토르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신하들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군신의 관계로 맺어진 이상 필요 이상으로 자신들을 강하게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빅토르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정통파 귀족이 없으면 나라의 행정기관이 마비될 테고, 국왕파 귀족은 빅토르가 모험가 시절부터 함께해 온 전우들이자 강력한 군사력이다. 양쪽 모두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제제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이 자식들에게 만만하게 보이면 그 집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말을 듣지 않는다. 그걸 나라에 적용해 보면…….
“내가 호구였다니……!”
빅토르는 양손으로 자기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카일은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위로인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뭐…….”
“됐네.”
빅토르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호구 왕을 벗어나서 정상적인 왕이 될 수 있겠나?”
‘호오오…….’
카일은 이 순간 살짝이긴 하지만 빅토르의 왕재(王才)를 봤다.
완벽한 왕은 없다. 왕이라는 지고한 신분에 있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나 말을 함부로 바꾸기가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왕이 독불장군인 경우는 평범하게 무능한 경우보다 더 위험하다.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그것을 바꿀 수 있어야 했다. 적어도 빅토르는 그런 점에서는 순응할 수 있었다.
‘뭐, 그래도 클랜장을 경험한 게 도움이 되는 것 같군.’
카일은 빅토르에게 말했다.
“신하들은 채찍만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채찍과 당근을 같이 동원해야죠.”
“그렇군. 자세한 구체안은?”
“전하께서 제시할 수 있는 당근책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포상은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죠.”
“돈이라. 흐음, 왕실의 예산이 조금 어려운데.”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카일을 바라봤다.
‘안다. 알아. 내 입으로 이 말을 꺼내면서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할까 봐?’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자금은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다만, 이런 말을 아십니까?”
“뭔가?”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라.”
“누가 한 말인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뭐, 좋은 말 같기는 하군. 그렇다면 돈을 직접 주는 게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이권을 준다는 말인가?”
“예. 자세한 계획을 말하자면…….”
카일은 본론을 꺼냈다.
이쯤 되면 빅토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빅토르의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자신의 이익도 챙길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흐으음… 흠…….”
빅토르는 흥미롭다는 듯이 카일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이 끝난 후.
“그렇게 하면 실질적으로 자네가 나라의 모든 상권을 장악하는 것이나 다름없겠군.”
“모든 상권은 아닙니다. 뭐, 한 90% 정도 되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