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바르롯사 자작은 엉망진창으로 당했다. 그냥 얻어맞는 것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니라 진짜 귀족으로서의 명예가 시궁창에 처박힐 정도로 처참한 굴욕을 당했다.
그는 딱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은 상태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중앙 광장에 알몸으로 거꾸로 매달리게 됐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저는 쓰레기입니다. 돌을 던져 주세요.]
그런 치욕스러운 문장이 적힌 간판이 놓여 있었다.
물론 수도의 경비대원들이 황급하게 와서 회수해 갔지만 이미 소문은 다 퍼져버렸다.
워낙 보기 드문 광경이 아닌가?
이 사건은 수도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바르롯사 자작이 당한 것 자체가 워낙 과격한 수단이었고, 무엇보다 그 사건의 가해자가 카일 화이트라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카일이 바르롯사 자작을 박살 내고 개망신을 줬다.’
이 사건에 고르시파 왕국의 귀족 사회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카일 화이트 자작이 한 짓이라고?”
“이제 곧 백작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거야 알고 있지. 하지만……. 허허. 바르롯사 자작이 먼저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과격한 보복을 한 게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모험가 출신의 귀족들이 얼마나 예의 없는지…….”
“그건 그렇지. 그래도 카일 화이트 자작은 장사 수완이 제법 있으니 좀 다르다고 생각했지. 우리 정통파 귀족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국왕파 귀족 놈들은 이번 사태를 보고 아주 좋아 죽는다고 합니다.”
“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그러게 말입니다. 같은 귀족이 수도 한가운데에서 조롱거리가 된 것이 통쾌해하다니. 멍청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쯧쯧, 이래서 귀족은 태생이 중요한 거야. 태생이…….”
“그래서, 화이트 자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래도 그가 유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지. 아직 부족한 건 우리가 가르치면 되지 않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서 자리를 만들어 보세. 우리 정통파로 끌어들여야 해.”
“알겠습니다.”
흔히 말하는 정통파 귀족들은 하나같이 카일의 행동에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고고한 척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정통파 귀족들과 다른 부류의 귀족들도 있었다.
“하하하. 카일 그 친구 제대로 한 건 했군.”
“원래 바이에른에서도 그 친구 건드렸다가 피 본 인간들이 꽤 있었지?”
“정통파 귀족 놈들은 모르지. 카일 그 친구가 마음먹으면 우리보다 훨씬 더 막나갈 수 있다는 걸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예전에도 도시에 불을 지른 적도 있었지 않아?”
“설마 여기서 똑같이 하는…….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화이트 클랜의 카일이었잖아?”
“그건 그래. 사람 안 믿는 폐쇄주의자에 자기를 건드리는 인간이 있으면 끝장을 내주는 성질 더러운 인간이었지.”
“딱히 적대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일단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얘기나 나눠 볼까?”
“그게 좋겠어. 초대장을 보내 보자고.”
카일의 행동에 통쾌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살짝 경계하는 반응을 보이는, 국왕파 귀족들이다.
서로 다른 반응인 듯싶지만, 결론적으로는 카일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양쪽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여기서 잠깐 고르시파 왕국의 귀족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양대 귀족 파벌에 관해서 설명해보도록 하자.
고르시파 왕국은 모험가 출신인 빅토르 폰 고르시파가 건국한 나라다. 그렇기에 처음에 이 왕국의 귀족은 그런 모험가 시절부터 빅토르와 함께해 온 스톰 클랜의 간부들이 많았다.
평생 모험가로서 살아온 이들이 갑자기 귀족이 되어서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빅토르 본인조차 어린 시절을 귀족으로 보냈을 뿐 살아온 세월의 대부분을 모험가로 살지 않았는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행정을 컨트롤할 줄 아는 관료 귀족들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고르시파 왕국이 건국하며 출세를 노리고 이 나라로 귀화한 귀족들은 꽤 있었다. 빅토르는 그들을 서둘러서 등용하고 나라의 행정과 법률 정치 등의 내정을 맡겼다.
그렇게 해서 나라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 타국에서 귀화한 귀족이었으며, 그들은 스스로를 정통파라고 불렀다. 그러자 빅토르와 모험가 시절부터 함께해 온 이들은 빅토르를 따르는 국왕파 귀족이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고르시파 왕국의 귀족 사회는 양분되었다.
처음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정통파 귀족이 왕족의 내정을 맡아서 처리하고 국왕파 귀족들은 군사와 던전 토벌 등을 맡아서 처리하면서 적절한 분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인은 양 파벌의 성향이었다.
귀족이 되었다고 하지만 모험가 출신인 국왕파 귀족들은 성향이 자유롭고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 자유로운 그들에게 군사를 움직이고 던전을 토벌할 때마다 행정을 꽉 쥐고 있는 정통파 귀족들이 일일이 서류의 인가를 하고 활동 예산을 제한하는 것이 굉장히 거추장스러웠다.
결국 그에 반발한 국왕파 귀족들은 그냥 행정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의 휘하의 병사들을 멋대로 움직이며 던전을 탐색했다.
그런 국왕파 귀족들의 행태에 정통파 귀족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건 미쳤어. 완전히 미친 거야.”
“어떻게 행정 절차를 무시하고 군을 움직일 생각을 했지? 반역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건가?”
“다시는 이런 짓을 못 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해당 귀족을 엄벌에 처하고 다시는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국왕파 귀족들 역시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 새끼들이 드디어 단체로 돌았나?”
“뭐, 처벌을 해? 굴러온 돌들이 미쳐가지고 아주…….”
“우리가 몇 년이고 던전을 탐험했는지 알기는 알아? 펜보다 날카로운 건 잡아 보지도 않은 것들이 감히 참견질이야.”
“다 죽여버릴까, 아주.”
“못 할 것도 없지. 안 그래?”
이렇게 반발한 국왕파 귀족들 몇몇은 실제로 정통파 귀족에게 쳐들어가려고도 했다.
다행히도 이런 행위를 사전에 발각한 빅토르가 황급히 막아서 수도에서 피가 흐르는 것은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지만 양쪽의 적개심은 이미 폭발한 상태였다.
당장 다음 날, 왕실의 대전에서 난리가 났다.
“전하, 감히 수도에서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 저 역적들을 처벌해 주십시오.”
“전하, 저 X도 모르는 새끼들이 이 지랄 저 지랄하며 참견한 게 원인입니다. 그냥 닥치게 해버리죠.”
“말을 품위 있게 하시오. 어찌 왕국의 귀족이라는 인물이 대전에서 그렇게 추잡한 언사를 입에 담는 것이오?”
“X까! 이 XX새끼야! 네 애미…….”
“이… 이이이……!”
양쪽에서 격렬하게 갈라져서 싸우는 이들을 보고 빅토르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양쪽 다 뒤지게 패버리고 싶다.’
그럴 수 있는 힘과 실력은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초보 국왕인 빅토르도 알았다.
정치판에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상당히 많다. 그럴 경우 대부분은 그냥 적당한 미봉책으로 양쪽 모두에게 적당한 타협책을 제시하는 게 고작이었다.
결국 빅토르 역시 별수 없었다.
“양쪽은 서로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마치 진지하게 싸우고 난 후의 어린애들한테 ‘싸우면 안 돼요.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자, 악수. 서로 안아 주고 미안하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선생님 수준의 중재였다.
당연히 이걸로 양쪽이 납득할 리가 없다. 다만 건국왕인 빅토르의 권한과 상징성이 너무나도 강하기에 양쪽은 일단 화해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그 후 양쪽 파벌의 분류는 더욱더 선명해졌고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무식한 것들. 감히 우리한테 덤비다니.”
“아주 본때를 보여 줍시다.”
“개한테 목줄을 잡고 있는 게 누군지 알려주는 게 주인의 의무겠죠.”
정통파는 행정 절차를 몇 배로 복잡하게 만들고 깐깐하게 결재하기 시작했으며 마석의 매입 가격을 후려쳤다.
물론 국왕파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 새끼들이 해보자 이거지?”
“아주 X 되게 만들어 주자고.”
“다 뒤졌어.”
“잠깐, 그런데 클랜장… 아니, 전하께서 싸우지 말라고 하셨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알기로 분명 귀족들은 결투라는 뻘짓을 합법으로 인정했지?”
“결투? 호오오… 그거 좋은데?”
“그 재수 없는 상판에 장갑을 던지면 합법적으로 패줄 수 있다 이거지?”
“크크크크… 좋은데? 아주 좋아.”
그날부터 장갑이 아주 참새가 방앗간에 날갯짓하는 것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국왕파 귀족들은 정통파 귀족들을 보는 족족 장갑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대리인을 구할 것도 없이 바로 즉석에서 결투라고 말한 후에 뒤지게 패기 시작했다.
정통파 귀족들은 황급하게 ‘명예롭지 못한 결투를 금지한다.’라는 법안을 발표했지만 그건 정말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 새끼, 방금 내 마누라 쳐다봤지? 결투다!”
“뭐? 잠깐 그게 무슨…….”
“지금 날 비웃었지? 결투다.”
“무슨 헛소리요?!”
“너 생긴 게 나를 모독하는 기분이 들어. 결투다.”
“미, 미친…….”
졸속으로 만든 법이라는 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악용당하기 쉽다.
국왕파 귀족들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결투를 남발했고, 빅토르가 다시 황급히 중재하기 전까지 정통파 귀족의 절반 이상이 얼굴이 퍼렇게 물드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정통파와 국왕파.
이 투 파벌의 증오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양쪽 모두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고 상대편을 박살 내는 것이 진심으로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판이 하는 일은 동서고금 어디든 똑같다.
세력 불리기.
양쪽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인재를 포섭하고 파벌을 양성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서로를 이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무차별적인 세력 불리기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특혜와 그로 인한 부정을 불러왔지만 지금 당장 적을 이기기 위해서 혈안이 된 귀족들은 그저 세력을 불리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수도에 올라온 카일 화이트 자작은 그들에게 가장 탐나는 먹잇감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카일 화이트는 아직까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지금 고르시파 왕국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든든한 인재였다.
해적을 소탕하고 영지를 경영하는 모습에서 힘과 정치적 수완을 모두 입증했으며, 무엇보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고르시파 왕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카일이었다. 그런 카일을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면 당장에라도 상대 파벌을 짓누를 수 있다는 생각에 양쪽은 카일에게 초대장을 남발하듯이 보냈다.
“주인님. 또 왔어요.”
“제길, 또?”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카일에게 아리시아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으면 제가 대신 쓸까요?”
“아니. 일단 내가 읽기는 읽어야 하니까 됐어. 내가 할게.”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온 초청장을 읽으면서 거기에 답신을 보냈다.
자신의 존재가 밝혀진 이후 수많은 귀족들이 초청장을 보냈다. 그냥 티파티 초대장부터 사냥 모임이라든가 예술품을 관람하는 모임. 이런 명분을 들어서 계속 카일을 초대했다.
국왕파 귀족들 중에는 카일과 오랜 인연을 통해서 오랜만에 서로 만나자는 식으로 연락하는 이들도 있었다.
“드웨인? 이런 놈 기억 안 나는데? 누군데 아는 척하는 거야?”
그들 대부분인 카일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고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만난 것을 대단한 인연으로 포장한 이들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카일은 바이에른에서 있을 때부터 굉장히 폐쇄적인 성향으로 유명했다.
능력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외부와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때 카일과 가장 깊은 연을 맺었던 것은 스톰 클랜의 파티장인 오웬이었지만, 그는 지금 던전 공략을 위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결국 카일은 모두와 만남을 거절하고 자신의 숙소를 전세 낸 후 만나러 오는 이들도 모두 돌려보내고 있었다.
‘정치 파벌 싸움에 역이면 손해만 막심하지.’
카일이 보기에 지금 국왕파나 정통파가 하는 짓거리는 그냥 정치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 다툼에 불과했다. 거기에 끼어서 승자가 되어 봤자 승자 안에서 또 파벌이 갈라져 싸울 게 뻔했다. 그게 정치라는 것의 어떨 수 없는 생리였으니 말이다.
그런 난장판에 끼고 싶지 않은 카일은 빅토르가 오면 서둘러서 작위만 받고 다시 영지로 내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때…….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돌려보내. 나 아프다고 하고.”
실제로 카일은 지긋지긋한 권력 다툼으로부터의 초대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그러나 그런 카일의 말에 대답한 것은 익숙하지만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빅토르 국왕 전하?”
“오랜만이군, 카일.”
아직 던전 안에 있다고 하는 빅토르가 카일의 앞에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