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사소한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프라이빗 바도 나쁘지 않았다.
귀족들 전용으로 하는 장사라서 그런지 술과 음식도 꽤 양질의 물건을 가져다 놓았다.
남방대륙의 곡주와 거기에 어울리는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게 상당히 맛있었다.
“그 남방대륙식 해산물 팬케이크 진짜 맛있었어요.”
“신선한 해산물이 가득 있어서 나쁘지 않았지? 검은색의 짭짤한 소스에 찍어 먹으니 간도 딱 좋았어.”
“술과도 어울리고 말이죠.”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도 음식에 크게 만족했다. 카일이 보기에는 약간 어설프게 만든 해물파전 같은 음식이었지만 두 사람은 맛있게 먹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몹시 즐거운 하루였다.
하루를 즐길 만큼 즐겼겠다. 카일은 이제 마차를 잡고 돌아가려고 했다.
“어이쿠, 어디를 가십니까, 나리?”
“갈 때 가시더라도 옆에 여자는 놓고 가시죠.”
그러나 그런 카일에게 척 봐도 ‘저는 양아치입니다.’라고 써놓은 것 같은 불한당들이 나타났다.
“하아, 뭐지? 이것들은?”
카일은 상쾌하고 즐거운 하루를 망치는 불청객들을 보고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카일이 불쾌해하면 당연히…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도 화가 났다.
“다 죽일까요, 주인님?”
“주군, 명령만 하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카일에게 찰싹 붙어서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 짓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발레리아는 어느새 엄숙한 기사 같은 분위기로 돌아갔고, 아리시아는 주변의 양아치들을 밟아 죽여야 할 바퀴벌레를 보듯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감히 주인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끼어들다니…….’
‘살고 싶지 않다 이거지?’
사실 두 사람도 오늘 하루가 무척 즐거웠던 만큼 이 쓰레기들의 등장에 화가 났다.
카일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적당히 만져 줘라.”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군.”
그리고 두 사람은 양아치들에게 척척 걸어갔다.
양아치들은 알아야 했다. 삼류 양아치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눈치가 있다면 눈앞의 여자 두 명이 당당하게 자신들에게 걸어올 때 뭔가 잘못 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아리시아와 발레리아가 평소처럼 갑옷과 가죽 바지를 입고 무장을 하고 있다면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몸에는 액세서리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 여자들이 분위기 잡으면서 와봤자 무서운 분위기가 날 리가 있는가? 오히려 이게 무슨 굴러온 떡이냐고 느껴질 뿐이다.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는 귀걸이를 빼고 하이힐을 벗으면서 한 걸음씩 양아치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양아치들과 가까워졌을 때…….
“와우… 진짜 환상적……. 커억!”
쩌어억!
아리시아의 뺨에 손을 대려고 하던 양아치 A의 턱이 돌아갔다. 언제 맞았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맞은 양아치 A는 그대로 턱관절이 탈구된 채로 쓰러졌다.
“뭐야? 방금……. 우와아아아아앗!
양아치 B는 발레리아에게 멱살이 잡힌 상태로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발레리아는 그대로 양아치 B를 벽면으로 집어던졌다.
콰아앙!
벽으로 집어던져진 양아치 B는 자신의 모양 그대로 벽면에 자국을 남기며 처박혀 버렸다.
둘이 순식간에 박살 나는 걸 보고 다른 기타 등등의 양아치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상대를 크게 잘못 건드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후회는 항상 한 발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다 이 악물어라.”
“아니면 죽었다고 복창하던가.”
아리시아와 발레리아가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주먹에 안면이 퉁퉁 부을 때까지 얻어터지고 다 큰 성인이 무슨 베개처럼 허공으로 날아다녔다.
카일은 그 광경을 보고 생각했다.
‘발레리아야 원래 강했지만 아리시아도 이제 만만치 않아 보이는걸.’
그녀에게 가르쳐 준 복싱은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것으로 그냥 호신술 정도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가속한 상태로 현란하게 주먹을 내지르는 그녀를 보니 상성이 아주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맨손 격투로 겨룬다면 평범한 익스퍼트급 정도는 잡겠어. 발리레아 정도라면… 으음, 지지는 않겠지만 애는 좀 먹겠는걸?’
그만큼 아리시아는 강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강하고 당당해진 그녀였다. 카일은 그런 아리시아의 모습에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살,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그때 양아치 한 명이 카일의 발치로 기어와서 애원했다. 아리시아에게 박살 났는지 발레리아에게 날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얼굴은 엉망이었다.
카일은 놈을 무심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살고 싶냐?”
“예. 예.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럼 말해.”
“뭐… 무엇을 말입니까?”
“죽고 싶냐?”
카일은 어디서 모르는 척하느냐는 듯이 되물었고 그 싸늘한 시선에 양아치는 황급하게 말했다.
“바르롯사 자작가의 집사라는 사람이 돈을 주고 시켰습니다. 저 두 괴물… 아니, 아가씨를 데리고 오면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10… 10골드를 준다고 했습니다.”
양아치 쓰레기들이 법을 어기고 나쁜 짓을 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저 두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면 백만 골드를 불러도 부족하지만 말이야.’
카일은 여러 가지로 불쾌했다.
“바르롯사 자작이라. 알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다. 레스토랑에서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를 바라보는 그놈의 눈빛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주인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리시아가 와서 카일의 의사를 물었다.
예전이라면 카일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이 싫었기에 그냥 적당히 넘어가거나 뒤로 은밀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럴 필요가 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럴 필요 없다.’였다.
결국 카일은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가며 말했다.
“그 새끼는 뒤졌어.”
* * *
바르롯사 자작은 고르시파 왕국의 신흥 귀족이다. 원래 세비아 왕국의 남작이었는데 고르시파 왕국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새로운 나라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자신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전 재산을 정리하고 고르시파 왕국에 귀화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행정 능력을 어필해서 수도의 관리직을 얻어냈고, 동시에 많은 돈을 국가에 기부해서 자작위를 얻어냈다.
4대째를 이어오던 남작가를 자신의 대에서 자작가로 올렸으니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나라를 바꾼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작위가 한 단계 오른 바르롯사 자작은 점점 더 오만해져 갔고 안하무인으로 변했다. 그런 그가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를 보고 욕심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니.’
살면서 많은 여자를 봐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미녀였다. 먼발치에서 봤던 세피아 왕국 제일 미녀인 테레지아 공주가 생각될 정도로.
처음에는 어느 귀족가의 귀족 영애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대화를 들어보면 적어도 한 명은 노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님이라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고 주군이라고 부르는 붉은 머리의 여기사도 비슷한 느낌으로 행동하는 게 둘 다 노예일 가능성이 높았다.
귀족 영애가 아니라 노예라면 얘기가 쉬워진다.
상대와 말만 잘하면 구입할 수도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비록 초청 자체가 실패해서 대화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뒤를 봐주고 있던 쓰레기들에게 의뢰해 여자들을 납치하게 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납치를 지시한 건 좀 성급한 감이 있었지만 포기하기에는 두 여자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뭐, 수도에서 본 적도 없는 귀족이니까 별것 아니겠지.’
결국 욕심에 눈이 먼 바르롯사 자작은 쓰레기들을 움직였고 지금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후후. 마치 여자를 모르던 소년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군.”
바르롯사는 기대감에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콰아아앙!
갑자기 들린 굉음과 함께 저택이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뭐, 뭐냐?!”
깜짝 놀란 바르롯사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떨어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의 1층에서 무슨 소란이 들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황급하게 집사가 달려와서 말했다
“주인어른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냐?”
“공, 공격입니다. 누군가가 군사를 이끌고 저택에 쳐들어 왔습니다.”
“뭐라고?”
바르롯사 남작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 *
카일은 여러 가지 선택권이 많았다. 그냥 복수만 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자금으로 적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었고 빅토르를 알현해서 국왕 직통 라인으로 죄를 고하게 할 수도 있고, 고루하지만 직접 결투를 신청해도 된다. 하지만 그 많은 방법 중에서 카일이 고른 복수의 방식은 가장 과격하고 확실한 것이었다.
당장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바르롯사 가문의 저택을 공격했다. 정면으로 당당하게 말이다.
일부러 이런 방식을 택했다. 자신의 존재감이 확 드러나는 방식을 말이다.
“주군, 적의 병력은 모두 제압했습니다.”
“수고했다.”
어느새 갑주로 갈아입고 완벽한 기사의 모습을 한 발레리아가 보고했다. 그녀와 함께 출동한 장미 기사단 50인은 바르롯사 가문의 병력을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간단하게 제압했다.
저쪽에서도 기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나와서 대응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기사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약해빠진 놈들이었다. 발레리아가 나설 것도 없이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거의 다 종료되고 나서야 바르롯사 자작이 나타났다.
“누구냐? 감히 수도 한가운데서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는 처음에는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미 저택이 완전히 제압당한 것을 보고 도망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후 이렇게 스스로 나왔다.
“자… 자작님.”
“주군…….”
자신의 기사와 사병들이 완전히 패배해서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다.
“정체와 소속을 밝혀라. 감히 신성한 킹스 캐슬에서 왕국의 정통한 귀족의 저택을 함부로 공격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어떻게든 왕국의 배경을 자기 뒤로 끌어당기려는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다만, 카일이 그걸 신경 쓸 거였으면 이런 방식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나다. 내가 그랬다.”
카일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자 순간 바르롯사 자작은 흠칫했다.
‘저놈은……. 그러고 보니 저 여기사는?’
바르롯사 자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카일과 발레리아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이미 일이 어떻게 꼬였는지 짐작이 간 것이다.
‘제기랄…….’
하지만 그는 애써 모른 척하며 카일에게 말했다.
“그대는 누구요? 누구기에 이런 짓을 한 거요?”
“모르는 척하는 건가? 오늘 레스토랑에서 나를 만났을 텐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뭔가 오해가 있는 건 아니오?”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카일의 비꼬는 말에 바르롯사 자작은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그보다 소속과 정체를 밝히시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곳이 빅토르 폰 고르시파 1세 전하께서 다스리는 수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오? 우리 전하로 말씀드리자면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영웅으로 던전 공략자…….”
“시끄러워. 다 아니까 입 닥쳐.”
“…….”
카일의 과격한 말에 바르롯사 자작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제길,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품위가 없군. 도대체 어느 깡촌의 시골 귀족인 거야?’
그런 바르롯사 자작에게 카일이 말했다.
“내 이름을 밝히라고? 밝히면 감당은 할 수 있고?”
“…그·… 누구신데, 그러는 겁니까?”
카일의 당당한 태도에 바르롯사 자작은 위축되었다. 어쩌면 카일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바르롯사 자작에게 카일이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카일 화이트 자작이다.”
“화이트 자작? 그런 이름……. 카일 화이트?”
바르롯사 자작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카일 화이트 자작이 백작으로 승작하기 위해서 수도로 올라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설마 그렇다면…….’
“진, 진정 화이트 자작이…입니까?”
“그래. 내가 카일 화이트다.”
카일이 다시 이름을 밝히자 바르롯사 자작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크… 큰일이다. 잘못하면 죽을 거야……!’
카일 화이트는 작위가 자작일 뿐이지 이미 고르시파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거물이었다.
카일 화이트 자작은 해적과 도적으로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던 최악의 영지를 받아서 왕국 최고의 영지로 재건시킨 수완가로 유명해졌다.
고르시파 왕국이 건국 초기라서 쪼들리는 재정을 구원해 준 것 자체가 카일 화이트였다. 그 공적으로 귀족이 되고 3년 만에 백작으로 승작이 결정된 차세대 실세인 것이다.
카일이 수도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귀족들은 어떻게든 카일과 연줄을 만들고 싶어서 잔뜩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르롯사 자작은 그런 카일과 악연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카일은 후들거리는 바르롯사 자작에게 말했다.
“내가 뭐 때문에 왔는지 알고는 있겠지.”
“모… 모릅니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자작님. 혹시 그 쓰레기들이 제 이름을 팔았습니까? 저는 전혀 모르는 놈들입니다.”
“그 쓰레기들? 어떤 쓰레기들을 말하는 거지.”
“자작님을 공격한 그……. 헉?!”
허둥거리며 말을 하던 바르롯사 자작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너무 당황해서 변명한 나머지 카일이 말하기도 전에 범행 상황을 진술해 버렸다.
이건 거의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뚜둑, 뚜두둑.
카일은 주먹을 풀면서 그런 바르롯사 자작에게 다가갔다.
“자작님. 진… 진정하십시오. 이건 오해입니다. 대화를 하면 오해… 커억!”
뻐어억!
카일의 주먹에 바르롯사 자작의 턱주가리가 제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일은 그대로 바르롯사 자작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실험을 해보자. 실험 주제는 네가 얼마만큼 처맞아야 진실을 말하느냐는 거다.”
“무… 끄어억! 커억!”
바르롯사 자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