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빅토르 폰 고르시파 1세.
그는 던전 공략이라는 희대의 업적을 세우고 싱카라 연합제국에서 영토를 할양받고 국가를 세웠다. 그야말로 위대한 영웅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업적이었다.
참고로 그가 국가를 만들면서 싱카라 연합제국에 제시했던 대가가 무엇인지는 싱카라 연합제국의 황제가 1년 전의 공식 석상에 나타나면서 밝혀졌다.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졌던 황제가 갑자기 20대 청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회춘의 묘약.
던전을 공략하고 얻었던 보물 중에 하나였던 그것을 바치고 빅토르는 나라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불로장생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권력자들이 애타게 바라는 것 중에 하나였다. 괜히 진시황제가 사기꾼들에게 된통 당했던 것이 아니다.
덕분에 황제의 수명은 대폭 늘어났고 다음 황권을 노리던 연합의 젊은 세대의 왕과 왕자들은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건 분명 호재였다. 연합제국인 싱카라의 특성상 황제의 교체기에는 항상 내분이 일어나고 국력이 저하되었는데 현 황제의 수명이 대폭 늘어나면서 그 진통의 시기가 훨씬 뒤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싱카라 연합제국의 안정기는 훨씬 더 길게 지속되게 되었다.
다만,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카일은 말했다.
“나한테 오면 공짜로 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딱 한 번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카일의 능력이라면 딱 한 번은 상대를 회춘시켜 줄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빅토르는 왕이 되었고 자신의 나라를 건국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염원하던 가문의 재건을 훌륭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동화속의 영웅담 같은 경우 여기서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말로 끝낼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거의 대부분의 인생을 모험가로서 살아온 빅토르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빅토르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유능하고 훌륭한 모험가들이었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싱카라 제국이 빅토르에게 넘겨준 남쪽 영토는 싱카라 제국 안에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곳이었다.
그런 영토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운영할 수 있는 깜냥을 모험가들에게 바란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카일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던전을 공략하고 거기서 나오는 코어를 산출해서 수출하자는 계획이 잘 먹혔기에 근근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던전에서 나오는 코어만으로 국가를 운영하기에는 다소 부족했고, 결국 국가에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빚까지 져야 할 정도의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고르시파 왕국의 국가 재정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1년 후. 고르시파 왕국의 국가 재정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카일이 다스리고 있는 화이트 영지에서 나오는 방직물과 식량 덕분이었다.
해외에서 수입해 와야 했던 방직물과 식량의 상당 부분을 화이트 영지에서 커버해 주었고 당연히 재정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카일은 3년 면세를 약속받았기에 세금은 내지 않았지만 자기 영지에 상단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돈과 물류를 유통시켰다.
특히 환락의 도시 아르트라에서 거둬들이는 수입을 상인들을 통해서 풀어내는 것은 고르시파 왕국 전체의 경제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결국 지금 고르시파 왕국에서 가장 유능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카일 화이트였다. 이런 카일에게 백작위를 내린다고 하는 데 반대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카일이 수도로 찾아온다고 하자 모두가 그 행적에 주목했다. 카일 화이트라는 이름은 고르시파 왕국의 중앙 귀족들에게 있어서 가장 핫한 이슈가 된 것이다.
“호오, 제법 도시다워졌는걸?”
카일은 3년 만에 찾아온 킹스 캐슬을 보고 감탄했다.
3년 전에는 한창 건설 중이었던 내성도 거의 다 완성된 상태였고 외성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제법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도시의 주도로에는 빈틈없이 벽돌로 포장되어 있었고 주변의 건물들도 제법 잘 지어져 있었다.
그 옆에서 발레리아가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형은 절묘합니다. 뒤편에 큰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방어에 용이하고 외성벽을 건설 후 물을 끌어와서 해자를 만든다면 철옹성이 되겠죠.”
그 말에 카일은 피식 웃었다.
“킹스 캐슬이 굳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지.”
“그런가요? 일국의 수도라면 마땅히 방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돈 들어갈 곳이 산재한 건국 초기에 당장 수도의 외성벽부터 공을 들여서 건축한다? 왜? 우리가 내일 당장 전쟁이라도 하나?”
“그건… 아니죠?”
“그럼 헛짓이야. 국가를 운영하는 정책에는 우선순위가 있잖아?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수도의 외성벽 따위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건 바보짓이지.”
그렇게 혹평을 한 후 카일은 수도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에 설치된 관문에서는 수도의 병사들이 카일을 가로막았다.
“정지!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혀 주십시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행렬을 이끌고 찾아온 카일에게 병사들은 신중하게 말을 했다. 그 말에 호위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발레리아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카일 화이트 자작님이시다. 빅토르 폰 고르시파 1세 전하의 명령을 받고 킹스 캐슬에 입성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헙… 실례했습니다.”
병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바로 통과시켰다.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의외로 정보통인 경우가 많다. 그들이 알기로 카일 화이트 자작은 고르시파 왕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더구나 이번에 수도로 방문한 목적은 백작으로의 승작을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실세 중에 실세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인생을 아주 쉽게 종 치는 수가 있다.
“화이트 자작님이 지나가신다. 일동, 예!”
“충!”
병사들은 좌우로 정렬해서 절도 넘치는 자세로 극진한 예를 표했다. 카일은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경비병의 대장에게 말했다.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자작님.”
“이건 별것 아니지만 소소한 성의네.”
카일은 작은 돈주머니를 주었다.
“아… 아닙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비병은 크게 당황했다. 보통 일국의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주 수입이 뇌물이고 부수입이 월급이라고 할 정도로 이런 일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을 가려가며 받아야지 이런 왕국의 실세를 상대로 돈을 받았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겠는가?
하지만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수고비니 받게. 부하들하고 술값이나 하면 될 거야.”
“그, 그렇지만…….”
“부담된다면 우리가 머물 만한 여관이라도 소개해 주지 않겠나? 내가 아직 수도에 저택이 없어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테리, 조크, 자작님과 그 호위 병력이 모두 머물 수 있는 여관을 수배해라. 당장!”
“예. 대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자작님.”
“그러지. 천천히 하게.”
잠시 후.
경비대의 부하들은 여관 거리에 여관 두 개를 통째로 빌리고 그 사실을 보고했다.
“이미 여관 주인에게는 말해 놨으니 찾아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고맙군.”
카일은 경비대에서 예약을 잡아 준 여관으로 찾아가서 짐을 풀었다.
“와아아……. 주인님, 옛날 생각나요!”
아리시아는 여관의 방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카일을 보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 예전에는 이런 여관에서 생활했는데 말이지.”
카일이 모험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전에는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지금 이 여관은 그때의 여관보다는 훨씬 더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어쩐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시절이 그립게 느껴지네요.”
아리시아의 말에 카일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우면 잠시 그때처럼 돌아가 볼까?”
“예? 어떻게……. 어머.”
아리시아는 카일이 자기 허리를 잡아서 당기자 그대로 침대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대낮인데…….”
“어? 그렇군. 미안해. 그럼 안 할게.”
카일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아리시아의 부드러운 팔이 카일의 목에 휘감겼다. 그 모습에 카일이 미소를 띠자 아리시아가 샐쭉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워요.”
아리시아는 카일의 품에 머리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봐도 봐도 귀엽다니까.’
카일은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아리시아를 품에 안았다.
* * *
왕을 만나기 위해서 수도로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왕을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일국의 왕은 바쁘다. 특히 빅토르 같은 경우는 더욱더 그랬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모험가 시절의 피가 끓어서 취미 삼아 레저 스포츠의 일환으로 던전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모두 필요해서 하는 일이었다.
카일이 벌어다 주는 돈 이외에 고르시파 왕국의 최대 수입원은 던전 공략이다. 던전에서 나오는 코어를 외국으로 수출해서 올리는 수입이 지금 고르시파 왕국의 최대 수입원이었다. 사실 이것도 카일이 조언한 결과였지만 세상 사람들은 빅토르 국왕이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하고 있다고 감탄했다.
어쨌든 던전 공략은 지금 고르시파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 중에 하나다. 그리고 던전은 그 특성상 깊숙하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던전을 가장 잘 공략하는 사람은 누굴까?
답은 뻔하다. 던전 공략자로 이름을 날린 빅토르 폰 고르시파 1세가 직접 나선 것이다.
빅토르는 지금은 왕국의 귀족이 된 과거의 측근들까지 대동해서 치열하게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역시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걸 해야 한다고 국가 운영보다는 던전 공략에서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 킹스 캐슬을 비우다 보니, 지금 빅토르 국왕은 이곳에 없다. 그 때문에 카일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한동안은 수도의 유람이나 하면서 천천히 돌아보자.”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군.”
그렇게 말하며 카일은 며칠간 수도를 느긋하게 돌아보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간단하게 차려입고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만을 데리고 나온 카일에게 아리시아가 말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죠? 주인님.”
“글쎄…….”
사실 볼거리는 카일이 다스리는 화이트 영지의 리온 마을이 더 많았다. 훨씬 더 많이 발전했고 최근에는 인챈트 학파의 마법사들을 대거 유입해서 신기한 물건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킹스 캐슬도 일국의 수도답게 놀거리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모르면 물어봐야지. 거기 마차!”
카일은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마차를 잡아서 탔다.
“어서 오십시오. 어디로 안내할까요?”
카일이 마부에게 말했다.
“이 도시의 귀족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장소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중앙 광장의 쇼핑 거리로 가겠습니다.”
마부는 망설임 없이 마차를 몰았다.
역시 모르는 도시에 가면 택시 기사들이 1등 가이드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