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으으음…….”
레이나는 눈꺼풀을 두드리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카일이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밤을 보낸 카일은 그녀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카일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으으음…….”
하지만 기껏 카일의 한 손을 풀자 다른 한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레이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다른 한 손을 살며시 밀어내자 이번에는 다른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끌어안았다.
거기다 조심스럽게 양손을 다 떼어 놓으려고 시도하자 이번에는 아예 양쪽 다리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감쌌다.
레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주인님, 일어나 있죠?”
“아니. 자는 중이야.”
그녀의 질문에 카일은 눈도 뜨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요. 이거 놔주세요. 오늘 바쁘단 말이에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카일은 그녀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레이나는 이렇게 투정 부리듯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카일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대로 다시 침대에 누울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일이 많이 쌓여 있어요. 그러니까 가볼게요.”
“키스 안 하면 안 풀어 줘.”
“진짜, 우리 주인님 나이 거꾸로 먹는 거 아니에요?”
“아닐걸.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레이나하고 같이 있을 때 정도뿐이야.”
카일의 말은 진짜였다.
뭐랄까……. 같은 카일의 여자라고 해도 순종적인 아리시아나 당당한 발레리아와 달리 레이나는 카일이 마음을 풀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연상의 여자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 느낌에 카일은 종종 이렇게 응석을 부리게 되었다.
‘내 앞에서만…….’
순간 레이나는 가슴 한구석이 찡한 느낌을 받았다. 애틋한 감정이 넘쳐 그녀는 카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키스해 드렸으니 이제 놔주세요.”
“어쩔 수 없네.”
카일이 레이나를 풀어 주자 그녀는 그제야 침실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침실에서 일어난 레이나는 카일의 방에 딸려 있는 욕실로 가서 샤워부터 했다.
지금 레이나와 카일이 함께 있는 곳은 임시로 지어진 카일의 영주 공관이다.
원래 카일은 제대로 된 공관을 짓기 전에는 막사에서 생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에이라는 그런 카일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일단 임시로 저택 비슷한 거 하나 지어줄 테니까 거기 짱박혀 있어요.”
그리 말하며 이곳에 카일을 넣었다.
약간 넓은 대지에 평범한 2층 건물.
최근 카일의 영지에 도입하고 있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닌 벽돌집이었지만 상하수도까지 깔려 있어서 지금 당장 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카일이 집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안심했다.
영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계속 막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였던 모양이다.
‘확실히 집에서 생활하는 게 좋긴 하지. 방음도 철저하고…….’
레이나는 샤워를 하면서 어젯밤 카일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신을 모시는 성직자였던 자신이 이렇게 한 남자에게 사랑받을 줄은 몰랐다. 과거에 자신은 평생 레테 여신님을 위해서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었는데 말이다.
‘그때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 입꼬리가 은밀하게 올라갔다.
‘아마 생각도 못한 일에 입을 쩍 벌리고 있겠지.’
역시 사람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같다.
씻고 나와서 옷을 다 갈아입은 레이나는 카일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럼 주인님. 다음에 또 봐요.”
“수고해.”
레이나가 나선 방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던 카일은 자신도 침대에서 일어나 준비를 마친 후 연무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최근 행정 쪽에 여유가 생기면서 다시 아침 수련을 시작한 카일이었다.
* * *
카일의 침실에서 나온 레이나는 아침도 챙겨 먹지 않고 바쁘게 어딘가로 이동했다.
“어서 오세요, 레이나 수녀님.”
“예, 저 왔어요. 오늘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수녀님이 이렇게 돌보아 주시니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그녀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모여 있는 휴식원이었다.
이곳은 일종의 양로시설로 가족이 없는 노인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장소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들이 영지에 꽤 많았는데 레이나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
카일에게 조심스럽게 상담을 하니 카일은 기꺼이 노인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주었고 그 장소를 휴식원이라고 불렀다.
사실 영지민들은 이런 카일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동력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노인을 보호하는 게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부모가 나이를 들고 봉양할 처지가 안 되면 부모를 버리는 일도 종종 벌어지는 것이 이 세계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독거노인들을 모아서 오히려 보호하고 챙겨 주다니 말이다.
그들은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보호와 돌봄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그들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영지민들은 정말 우리를 끔찍하게 아끼는 구나.’
‘영지민들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는 영주가 우리 영주님말고 또 있을까?’
‘우리가 늙고 병들어도 영주님이 계시면 저렇게 돌보아 주시겠지.’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영원히 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카일의 입장에서는 레이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최소한의 복지를 챙겨 주는 것뿐이었지만 이 세계의 기준에서는 파격적이었다.
노인들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생활하니 만족하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휴식원은 당연히 레이나가 관리를 했고 그녀는 며칠에 한 번씩 이 휴식원에 찾아와서 노인들의 몸 상태를 살피고는 했다.
“해리스 할아버지, 허리는 많이 좋아지셨나요?”
“예. 수녀님이 직접 돌보아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멀쩡합니다.”
“다행이에요. 그래도 무리하시면 안 돼요. 또 저번처럼 무거운 걸 들려고 하시면 다칠 수 있어요.”
“예. 알겠습니다. 제가 수녀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듣겠습니다.”
노인들에게 있어서 레이나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여신이 내려온 것 같았다.
세상에 버림받고 고독하게 죽어가고 있던 자신들을 구해주고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거기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신성력을 써가며 몸 상태도 돌보아 주니 감격에 눈물을 흘리는 노인들도 있었다.
레이나는 신성력을 아끼지 않고 온 힘을 다해서 노인들을 돌보아 주었다. 그 헌신적인 모습에서 전해지는 진심은 세월의 풍파에 메마른 노인들의 가슴마저 먹먹하게 만들 정도였다.
휴식원에서의 일이 끝나고 나서도 레이나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고아원으로 향해서 그곳의 시설을 점검하고 아이들의 생활 상태를 체크했다.
“와아아~ 레이나 수녀님이다.”
“수녀님, 놀아 주세요!”
“같이 쿠키 만들어요~!”
아이들은 레이나가 찾아가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착하게들 있었니?”
“예에에!”
입을 모아서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고 레이나는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온 사탕을 나눠 주었다.
“와아아! 사탕이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천진하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레이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먹고 나서는 이 닦아야 한다.”
아이들을 그렇게 보낸 후 레이나는 고아원을 관리하는 원장을 만났다.
“운영에 어려움은 없나요?”
“예. 물론이죠. 레이나님이 운영비를 잘 챙겨 주시니 부족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운영비는 제가 아니라 영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아! 그렇죠. 하하하. 저희가 보기에는 두 분이 그냥 같은 거라서…….”
“크흠, 시설 점검을 좀 할게요.”
“예. 마음껏 둘러보십시오.”
이미 한 번 고아원을 운영해 본 적도 있는 그녀이기 때문에 이런 분야의 일은 에이라 이상으로 꼼꼼하게 체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특히 주방의 청결 상태와 식재료의 신선도를 꼼꼼하게 살폈다. 어린 아이들이 몸을 상하는 경우의 절반 이상은 먹는 것으로 생기는 문제인 만큼 아무리 신경 써도 부족하지 않았다.
‘괜찮네. 모두 신선하고 잘 보관하고 있는 식재료들이야.’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예. 물론입니다. 수녀님.”
그렇게 고아원을 모두 둘러본 후에도 그녀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새롭게 영주에 이주해서 거처가 없는 이들을 위해서 임시 거처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가서 불편한 것이 없는지 조사했고, 영지에 만들어진 병원에 가서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도울 수 있을 만큼 도왔다.
레이나의 이런 행동은 오직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아무런 타산 없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론 적으로 레이나가 이렇게 헌신하게 약자를 보살피고 봉사하는 모습은 영지민의 민심을 휘어잡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진짜, 이번 영주님은 신이 내리신 게 틀림없어.”
“어떻게 저렇게 곁에 있는 분까지 자랑스러운 게 틀림없어.”
“저런 분이 성녀지. 누가 달리 성녀인가?”
“그러게 말이야. 우리 레이나 수녀님은 성녀인 게 틀림없어.”
사람들은 레이나를 존경했고 레이나를 향한 존경은 자연스럽게 카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녀 자신은 그런 행동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하는 행동인데 말이다.
그렇게 레이나는 자신의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 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화이트 자작령인가?”
“예. 그렇습니다. 파울로 사제님.”
“흐음, 한참 발전하는 중이라고 하더니 그냥 공사 중인 건물만 많은 깡촌이로군.”
“하하하……. 그렇긴 하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영지를 바라보는 사람은 제법 살집이 두둑한 중년의 남자로 순백의 사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파울로. 그는 태양과 광명의 신 크라테스를 모시는 사제였다.
사제 중에서도 제법 급수가 높은 중급 사제인 그는 신전의 명령을 받고 화이트 자작령에 찾아온 것이다.
영지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는 기미가 보이자 신전에서는 빠르게 눈독을 들였다.
이곳에 신전을 짓고 포교를 해서 세력을 넓히겠다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파견한 것이 바로 이 남자였다.
그는 이런 시골 깡촌에 부임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먼 미래의 출세를 위해서 이 부임을 받아들였다.
“뭐, 일단 신전을 짓기 위한 허가를 받아야겠지. 영주를 만나보도록 하지.”
“예.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파울로 사제님.”
그는 카일을 만나기 위해서 영주 공관으로 찾아갔다.
* * *
“신전을 건립하고 싶다고요?”
“…….”
“저기요?”
“아… 아니, 음, 그렇기는 한데…….”
파울로는 초반부터 크게 당황했다.
신전 건립을 위해서 영주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정작 그를 맞이한 것은 자기 덩치의 절반도 되지 않는 꼬마 아이가 나온 것이다.
“음, 꼬마야 너는…….”
“수석행정관 에이라입니다. 영주님은 바빠서 제가 대신 볼일을 보고 있습니다.”
에이라는 굳이 변명 같은 거 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설명했다.
‘이런 꼬마가 행정관이라고?’
파울로는 당황했지만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크흠, 영주님을 만나서 직접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영주님은 바쁘십니다. 신전 건립은 도시 계획의 일부분이니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허허허……. 너에게 말이지?”
“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좀, 그렇군.”
“…….”
“어지간히 바쁜 일이 아니면 영주를 부르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게 원만한 애기가 될 것 같구나.”
파울로는 ‘나는 너 같은 어린애와 나눌 얘기가 없다.’를 애써 돌려서 말했다.
턱을 도도하게 들고 위엄 있게 말하는 파울로였지만 에이라가 느끼는 건 위엄이 아니라 진한 라떼의 향기였다.
‘뭐지? 이 진상과 꼰대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생물은?’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이런 인간을 계속 상대하고 있을 시간은 없는 에이라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주님은 바쁩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 주십시오.”
그리고 일어나는 에이라를 보고 파울로가 오히려 크게 놀랐다.
“아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돌아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례한가요?”
“다… 당연히 무례하지. 내 어지간하면 말 안하려고 했는데 이런 꼬마 계집을 상대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까지……. 어? 어어?”
한참 씩씩거리며 말하던 파울로는 자신의 양옆에 다가온 병사들이 양쪽에서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느꼈다.
“에이라 님, 어떻게 할까요?”
“행정 관료라고 신분을 밝혔는데 사사건건 반말에 막말까지 했으니, 모독죄로 집어넣어요. 한 사흘 정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영지의 병사들은 파울로를 양쪽에서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이놈들! 이거 놔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세상 어디를 가도 종교를 함부로 건드리는 건 부담되는 행위였다. 특히 태양과 광명의 신 크라테스는 신도가 꽤 많은 종교이기도 했고 말이다.
‘척 봐도 진상형 인간인데 저런 인간한테 초반부터 얕잡아 보이면 끝이 없지.’
에이라는 나름 생각이 있어서 파울로를 잡아넣으라고 한 것이다.
어차피 이 정도 잘못으로 큰 벌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며칠 정도 감옥에 가둬둠으로써 기선을 잡으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