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종속 계약에 구속된 노예는 주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하지만 위해의 해석에 관해서 파고들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세피로스는 뱀파이어다.
그리고 뱀파이어에게는 카일이 준 능력 말고도 몇 가지 능력이 더 있다. 몸을 안개로 바꾼다거나, 혹은 이성을 매료시킨다거나 하는 능력이 바로 그렇다.
그 매료의 능력이 문제였다.
매료라고 해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상대의 심신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그런 능력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호감을 심어 주는 정도였지만 그녀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접하면 접할수록 점점 빠져들고 종래에는 그녀가 하는 어떤 말에도 거역할 수 없는 사랑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매료의 능력을 이용해서 ‘저를 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주인님.’ 이라는 바람을 원하는 것은 노예의 종속 계약에서도 위해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피로스는 조금씩 조금씩 카일에게 매료를 걸어서 그를 자신의 사랑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다만, 카일의 곁에는 레이나 같은 텔레파스를 비롯해서 이미 몇 명이나 되는 정신계 능력자들이 있었다.
카일에게 매료를 걸고 있다는 사실이 들킨 순간 카일은 화를 냈고 아리시아는…….
“이 XX년. 죽여버리겠어!”
화를 내려던 카일과 다른 측근들이 순간 위축될 정도로 아리시아가 어마어마한 분노를 터트렸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모두 달려들어서 간신히 말려야 했을 정도로 아리시아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카일은 그녀를 폐기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러기에는 가지고 있는 능력이 너무 유용했다.
각성한 테이밍 능력뿐만 아니라 원래 뱀파이어로서 가지고 있는 능력과 전투력.
솔직히 폐기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고, 그 후에 그녀는 순순히 카일의 지시에 복종하면서 특수 부대의 일원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카일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다.
세피로스가 아르트라 항구에 들어가서 데드를 유혹해서 공작을 한 결과가 지금 카일의 눈앞에 보이고 있는 아비규환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뭔가 상을 줘야겠군.’
“음?”
퍼어어엉!
그때 카일은 거대한 해적선 한 척이 뱃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흐음, 대포가 없으니 마법사가 해전에서 차지하는 위력이 대단하군.”
“주인님, 아~ 하세요.”
“아아아…….”
카일은 아리시아가 하얀 손으로 넣어 주는 팝콘을 먹고 남는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눈앞의 상황을 관람했다.
그냥 호기심 때문에 구경하는 것 같았지만 카일은 이 기회를 통해서 이 시대의 해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관찰하고 있었다.
건너 들었던 정보들도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은가?
해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어떻게 승패가 결정 나는지를 신중하게 판단하면서 전체적인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처음에 전황은 거의 대등했었다.
3 대 1의 비율로 데드를 따르는 쪽이 열세였지만 배후를 점하고 기습을 가했다는 점이 유리했다.
하지만 라킨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미 고블린 한 마리 이기기 힘든 노구가 된 몸이었지만 함선을 지휘하는 능력은 신체의 노화와 상관없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가브릴에게 쾌속선을 이끌고 오른쪽으로 우회시켜라. 제트의 함대를 숨김 막으로 써서 적의 배후를 잡으라고 해라.”
“예, 아버지.”
“데드. 감히 네가 누구한테 덤빈 건지 깨닫게 해주마.”
라킨은 절묘한 지휘 능력으로 점점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거기다 원래 전력 자체가 라킨 쪽이 더 많았다는 점까지 더해져서 데드와 그를 따르는 해적들이 점점 불리해져갔다.
콰아앙! 쾅!
“데드 선장. 파브리의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선장님. 리코넬의 배가 이 이상으로 불리해진다면 퇴각하겠다고 말합니다.”
쏟아지는 낭보에 데드는 이를 갈았다.
“제길, 왜 카일 저놈은 공격하지 않는 거야?”
원래 계획은 카일이 신호를 하면 자신들이 습격을 하고 그렇게 적이 당황하는 사이 카일도 라킨의 함대를 공격해서 적을 앞뒤로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라킨의 함대가 배신을 해도 바로 공격하지 않고 그냥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일은 해적들과의 싸움에 서둘러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세피로스를 이용해서 데드를 포섭했다고 하지만 딱히 대등한 동맹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원하는 것은 명백한 상하 관계.
그렇다면 일단 한 번 물에 빠뜨려서 절박해진 상태에서 구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협공을 하기는 하겠지만 굳이 서둘러서 공격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제길, 싸워라. 무조선 싸워. 이미 우리에게 뒤는 없다.”
데드는 이를 악물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애썼다.
* * *
해적들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시점.
카일이 먹고 있던 팝콘도 다 떨어졌다.
전황은 데드가 압도적으로 불리해 졌고 이제 데드 편에 남은 배는 서른 척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카일은 크게 하품을 하더니 서서히 일어났다.
“이제 슬슬인가?”
“나서실 건가요?”
“그래도 데드라는 놈이 죽으면 곤란하거든.”
카일은 이 해전에서 이기기 위해서 데드를 포섭한 게 아니다. 그 이후의 계획까지 생각하면 데드는 여기서 살려 두고 써먹어야 했다.
“검은 바람. 배를 앞으로 전진시켜라.”
“예. 주인님. 전군 전진!”
어느 정도 전진한 카일의 함선은 적을 일정 거리를 두고 방향을 옆으로 틀었다.
“저놈들 뭐 하는 거지?”
“왜 저 거리에서 배를 옆으로?”
카일의 함대가 움직이는 걸 발견하고 신중하게 관찰하고 있던 해적들은 의아해했다.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만한 거리에서 정박한 카일의 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 카일이 말했다.
“포문을 열어라!”
그 명령과 함께 배의 하단부.
그러니까 원래는 노잡이들이 있어야할 부분의 나무창이 열리고 무언가가 등장했다.
검고 둥근 그것을 처음 해적들은 무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완벽하게 전열 형태를 갖춘 카일은 다시 명령했다.
“쏴라아!”
콰콰콰쾅!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포가 발사되었다.
포환으로 나아간 쇳덩어리는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서 해적선에 작렬했다.
콰직! 우지직! 콰앙!
“우어어어…….”
“뭐야! 이게 뭐야?!”
“선장님. 배의 밑에 구멍이 났습니다!”
“말… 말도 안 돼……. 이게, 도대체 뭐야?”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포에 포격을 당한 해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쇳덩어리들이 날아오더니 배가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이런 공격을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해적들도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놀랍지? 이게 바로 진짜 해전이라는 거다.”
카일은 싱긋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포술 훈련을 급하게 시켰기 때문에 약간 걱정했는데, 표적들이 워낙 바다에 바글거리다 보니 그렇게 문제는 없었다.
“쉬지 말고 계속 쏴라. 적을 물리쳐라!”
“예, 알겠습니다.”
“발사! 계속 발사해라.”
카일의 부하들은 신이 나서 대포를 장전하고 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카일이 이끄는 함선의 반경 안에 있는 해적선들은 거의 녹듯이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괴물이다.”
“미친, 저런 걸 어떻게 이겨?”
해적들은 전의를 잃고 망연자실하거나 분노만 터트렸다.
아무리 깡이 좋은 사이펀 왕국의 해적들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승산이 보여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법이다.
그런데 저건 도무지 그 승산이 보이지를 않았다.
정체불명의 무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해적선이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
그들이 평생을 해왔던 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심지어 그 피바다 라킨마저 그 광경을 보고 넋을 잃고 있었다.
“이런… 이런 전투가 가능했단 말인가?”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오며 수많은 적을 상대하고 피바다 라킨이라고 불리며 두려움을 받은 그였지만 이런 광경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필요성이 없는 분야는 발전이 더디다는 말이다.
이 세계에서 해전은 보통 원거리에서 화살을 쏴서 적을 쓰러트리거나 불화살을 쏴서 배의 돛을 불태우는 정도였다.
그리고 적이 줄고 기동력을 잃은 배를 상대로 접근해서 갈고리를 걸고 배를 바싹 붙인 다음 백병전으로 들어가서 적을 다 죽이고 항복을 받아 내면 그게 승리였다.
여기서 정규군이나 규모가 있는 해적들의 경우 마법사를 포함시킨다.
마법사의 마법 한 방은 배에 치명적인 한 방을 날릴 수 있다. 즉,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해전에서는 마법사의 숫자와 질이 해전의 절반 이상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마법사의 존재가 결국 적선을 공략하기 위한 대포라는 발명을 방해하고 있었다.
카일이 알기로 이 세계에도 화약은 있었다.
연금술사들의 노력으로 이미 수백 년 전에 발명된 물질이었다.
다만, 화약의 특징은 폭발인데, 그 폭발이라는 분야로는 화약이 마법을 넘을 수가 없었다.
안정성도 파괴력도 효과 대비 비용도 모두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적어도 이 세계의 화약 수준으로는 말이다.
그래서 화약은 필요 없는 물건으로 인식되었고 발달도 더뎠다. 하지만 카일은 화약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빈약하지만 언젠가는 발전한 화약 기술이 문명을 한 단계 더 비약시킬 것이 확신했다.
그래서 바이에른에 있을 때부터 연금술사 길드에 자원을 투자하면 화약의 연구 발전을 지원했다. 그 발전한 화약의 지식과 권리를 자신이 독점한다는 계약과 함께 말이다.
그게 이미 수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카일은 대포에 사용해도 충분할 정도의 성능인 화약을 손에 넣었다.
빅토르에게 남방대륙과의 해양 무역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 화약을 만들어서 보관해 왔고, 대포 역시 은밀하게 주문을 넣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하나 준비해 온 안배들이 겹쳐서 지금 압도적인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군, 적선이 거의 다 가라앉았습니다.”
“남은 찌꺼기들은 백병전으로 처리한다. 검은 바람, 발레리아.”
“예, 주인님.”
“예, 주군.”
“쓸어버려라.”
“알겠습니다.”
“전기사단 출격하라!”
카일의 지시에 따라서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직속 수하들을 이끌고 남은 해적들을 쓸어버렸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옆에서 자신을 몽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리시아에게 말했다.
“뭔가 마실 것을 준비해 주렴. 손님이 올 거야.”
“예. 주인님.”
* * *
전투는 끝났다.
함포 포격으로 패닉에 빠진 적선은 제대로 된 기능도 하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부하들을 이끌고 해적선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몇몇 해적들이 백병전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어떻게든 맞서려고 해봤지만 무리였다.
전원 능력자로 이뤄진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의 부대는 카일이 가지고 있는 전력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부대다.
해적들 중에서도 간간히 익스퍼트급의 능력자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감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전투는 급격하게 기울었고, 그 와중에 반대편에 있던 데드의 함대들까지 호응하자 피바다 라킨의 부하들은 전멸해 버렸다.
압도적인 대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