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영지의 젊은이들이 병사로 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은 카일의 귀에도 들어갔다.
“영지의 젊은이들이 다 지원하고 있다고?”
“예. 주인님.”
“…이건 예상 못했던 일인데.”
카일은 쓰게 웃었다.
사실 카일은 이 전쟁에서 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이길게 뻔한 전쟁이긴 하지만 작전 내용을 밝혀서 영지민들을 안심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영지민들이 불안해 할 경우 어떻게 감언이설을 속삭여서 다독일지가 고민이었는데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불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싸우겠다고 몰려올 줄이야.”
“그만큼 주인님이 훌륭한 영주님이라는 말이죠.”
레이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카일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카일은 그런 레이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기뻐 보이네.”
“예, 물론이죠. 저의 주인님이 이렇게 훌륭한 분인데 어떻게 안 기쁘겠어요.”
“그런…가?”
“물론이죠. 저는 주인님이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신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신뢰를 받는다니……. 역시 저의 주인님이세요.”
카일을 바라보는 레이나의 눈빛은 마치 성공한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 같았다.
카일은 그런 레이나의 칭찬이 쑥스러웠다.
그 쑥스러움에 화끈한 열기가 오른 것일까? 카일은 그녀의 가슴에 손을 불쑥 뻗으며 말했다.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가슴 만져도 돼?”
이렇게 장난을 걸면 순진하고 소극적인 레이나는 항상 부끄러워하며 뒤로 빠졌다.
“예, 그러세요.”
“어?”
항상 그랬건만……. 이런 반응은 카일도 예상 못했다.
카일의 손이 레이나의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에 닿기 딱 1센티미터 전에 멈췄고 레이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 만지세요? 아… 벗을까요?”
“…괜찮아?”
“예, 얼마든지요.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저는 어떤 것이든 해드릴 수 있어요.”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카일은 레이나에게 원하는 어떤 것이든 다 해주었다.
다만 이제 이렇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하아아, 이런 게 성장한다는 건가? 원 패턴으로 평생 살 수 없는 건 이래서였구나.”
역시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과 발전을 하는 생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레이나를 향해서 가벼운 장난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농담은 쓸 수 없는 모양이다.
“안 만지세요?”
“지금은 됐어. 밤에 만질 거야. 밤에…….”
아주 안 만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크흠, 어쨌든 지원한 이들은 모두 돌려보내라고 전해.”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그래. 지금 영지 발전을 위해서 젊은 인력이 한참 부족한데 젊은이들을 병사로 받아들이면 공사현장은 어떻게 해.”
“그건 그렇지만…….”
“영지민들에게 말해.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그리고 나를 믿으라고 해. 피바다인지 뭔지 내가 질 확률은 조금도 없다고 말이야.”
“후후후… 예, 알았어요. 주인님.”
이건 허세가 아니었다.
카일이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이건 질 확률은 조금도 없는 전쟁이었다.
* * *
며칠 후, 리온 마을에서 카일의 군대가 함선을 이끌고 출진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 숫자가 바로 열두 척이었다.
고작 열두 척만을 끌고 전투에 임하려는 카일을 보고 프랑크가 만류했다.
“영주님. 영지에서 수리 중인 배를 급하게 움직일 수 있게 조정한다면 서른 척 정도의 전함은 동원할 수 있습니다.”
프랑크의 말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열두 척이면 충분해.”
“적의 함대는 무려 삼백 척입니다.”
“바로 그래서야. 해전에서 300 대 12는 필승의 공식이거든.”
“…어느 세상에서요?”
프랑크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작고 귀여운 행정 관료 차림을 하고 있는 금발의 꼬맹이가 다가왔다.
“오빠, 가기 전에 여기 급한 서류에 사인 좀 하고 가줘요.”
바로 에이라였다.
이미 그녀의 행정 관료 차림은 영지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꼬마 행정 관료가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한다는 소문과 영주의 신임을 받아서 오빠 동생 한다는 소문까지 다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런 에이라를 보고 말했다.
“뭔데 그래?”
“빌 존스라는 상인하고 직접 거래한 품목인데 오빠 인장이 필요해요.”
“이리 줘봐.”
태연하게 결재를 하는 카일을 보고 프랑크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라 행정관님도 말 좀 해주십시오.”
“뭐가요?”
“영주님이 배를 열두 척만 끌고 가시겠답니다. 적은 삼백 척인데 말이죠.”
“열두 척이라……. 그럼 쉽게 이기겠네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당연하죠. 해전에서의 열두 척 필승 공식은 국룰이죠.”
“내 생각도 그래.”
둘의 대화를 들으며 프랑크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그럼 갔다 오겠다.”
“다녀오세요. 올 때 멜로나.”
“팔겠냐?”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열두 척의 배를 이끌고 출진했다.
뒤에 남아서 배웅하는 에이라의 옆에서 프랑크가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싸움입니다.”
“걱정 마요. 그보다 이번에 새로 청구한 항만 정비 시설 말인데요. 형태를 좀 바꾸고 싶어요. 규격화된 대형 상자를 통째로 선적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인데 우선 이걸 컨테이너라고 하죠. 그리고…….”
에이라는 그저 자신의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 * *
피바다 라킨의 함대와 카일의 함대가 해역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열두 척의 적선을 확인한 라킨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쳤구나. 완전히 미쳤어.”
라킨이 생각할 때 카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항구를 이용한 수비전이었다.
항구를 철통같이 지키면서 적들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 해전에 전문적이지 못한 카일과 그의 부하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물론 그렇게 할 경우 원거리에서 활과 마법사들을 이용해서 항구가 파괴될 때까지 계속 두들길 생각이었으니 별 의미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삼백 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열두 척의 함선만을 이끌고 출전한다?
이건 그냥 미친 짓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 생각보다 쉽게 끝날 것 같습니다.”
“저 보잘 것 없는 함대를 보십시오.”
“하하하! 해전을 전혀 모르는 초짜가 호기를 부리는 꼴이 웃기지 않습니까?”
산하 해적선 선장들의 말을 들으면서 피바다 라킨은 생각했다.
‘그래. 저놈은 모험가 출신의 벼락출세한 귀족일 뿐이지. 결국 바다를 모르는 초보다.’
라킨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외쳤다.
“적들을 쓸어버려라! 아르바나 항구에서 죽어간 형제들의 원수를 갚아라!”
“오오오오!”
“우오오오오!”
당초 생각했던 작전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 전략 차가 있다면 작전을 짜는 것도 우습다. 그저 정면으로 돌격해서 적을 쓸어버릴 뿐이었다. 특히 산하 해적단 중에서도 이름이 쟁쟁한 해적들은 전공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앞다투어 달려갔다.
“가라! 적을 쓸어버려라.”
“마법사 캐스팅 서둘러. 놈들을 쓸어버린다!”
삼백 척의 해적선이 우루루 달려오는 광경은 언뜻 보면 장관 같았다.
카일은 그걸 보고 피식 웃더니 말했다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군. 신호를 보내라.”
“예, 주인님.”
그리고 카일의 신호에 따라서 아리시아가 화살 한 발을 쏘았다.
삐유우우우우우!
화살의 머리 부분에 호루라기 같은 홈을 만들어서 소리가 나게 하는 화살 명적(鳴鏑)이었다.
“저게 뭐지?”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해적들은 그 모습에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리고 명적의 소리가 다 끝나갈 무렵.
콰아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해적선 몇 척이 불타올랐다. 그 폭음의 정체는 바로 피바다 라킨의 배에 적중한 마법이었다.
“큭……. 무슨 일이냐?”
피바다 라킨이 황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먼저 함성이 들려왔다.
“지금이다! 배신자를 공격하라!”
“우오오오오오!”
삼백 척의 해적선 중에서 약 3분의 1 정도의 해적선이 피바다 라킨을 뒤에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백 척의 선두에는 스컬 해적단의 선장 캡틴 데드가 있었다.
“목표는 배신자 라킨의 목이다. 돌격하라.”
“오오오오오!”
그 모습을 보고 라킨은 노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데드! 감히 네가 배신을 해!”
“닥쳐라. 배신은 네가 먼저 하지 않았나!”
데드도지지 않고 버럭 외쳤다.
“뭐? 그게 무슨…….”
“네놈이 우리 형제들을 베오르그 왕국에 꾸준하게 팔아 넘겼다는 증거를 이미 찾았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피바다 라킨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데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버럭 외쳤다.
“형제들이여! 바다의 남자로 살 텐가? 아니면 저 늙은이의 개가 될 텐가? 자유를 원하는 형제라면 나를 따르라.”
“미쳤구나. 데드. 네가 완전히 미쳤어.”
라킨은 이를 가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저 배신자의 목을 가져와라. 놈을 죽이는 자를 나의 후계자로 삼겠다!”
라킨의 말에 카일을 향해서 진군하던 배들이 우왕좌왕하더니 그대로 반전해서 데드가 이끄는 함대와 격돌했다.
“배신자를 죽여라!”
“다 쓸어버려라!”
삼백 척의 해적선들이 적아를 구분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처절하게 격돌하기 시작했다.
* * *
아리시아가 한 일은 명적 한 발을 쏴서 신호를 준 것 뿐이다. 그 다음에 그녀가 한 일은 별거 없었다.
“주인님, 여기 있어요.”
“아, 고마워.”
그저 카일에게 팝콘을 가져다준 것이다.
최근 이 땅에서 옥수수가 난다는 것을 깨달은 카일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팝콘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맛은 지구의 것에 비해서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먹을 만은 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런 장관은 먹으면서 봐야지. 너희도 먹을래?”
“주인님.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전쟁 중인데…….”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쓰게 웃어버렸다.
“저는 먹을래요. 주인님하고 같이요.”
반대로 아리시아는 냉큼 카일의 옆에 앉았다.
카일은 선수에 준비한 자리에서 눈앞에서 보이는 광경을 구경하면서 아름다운 미녀를 옆에 끼고 해적들의 자중지란을 보고 있었다.
“내가 꾸민 일이긴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잘됐군.”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카일이 꾸민 일이다.
언제부터?
알바니아 항구를 공격했을 때부터?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바니아 항구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미 아르트라 항구에 사람을 보내서 피바다 라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공작을 펼쳐 두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후에야 알바니아 항구를 공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주인님. 이런 거대한 해적단이 결국 주인님의 계획안에서 놀아나다니…….”
검은 바람은 눈앞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거대 해적단을 보고 중얼거렸다.
“뭐, 특수 부대 얘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 특히 세피로스가 열심히 한 모양이더군.”
“아니에요. 주인님. 그 여자는 하나도 열심히 안 했어요. 주인님이 명석하고 우수하셔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는 눈에 불을 켜고 세피로스라는 여자의 공적을 부인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세피로스는 세피아라는 이름으로 데드에게 접근했던 그 매력적인 금발의 고혹적인 미녀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는 카일의 직속 특수 부대원이며, 그 종족은 엘프보다 더 희귀하다는 뱀파이어다.
뱀파이어는 워낙 희귀해서 폐기장에서 다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법 고가에 거래되는 종족이었다. 마법사의 실험 대상으로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카일은 그녀를 사서 능력으로 구원해 주었다.
그때 각성한 세피로스의 능력은 테이밍.
작은 박쥐나 새, 쥐, 그 밖의 작은 동물들을 길들여서 자기 명령에 따르게 하는 능력이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능력이 좀 더 발전하자 어마어마한 부가 효과를 발휘했다.
그녀의 능력으로 테이밍한 작은 동물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밍한 동물이 보고 듣고 있는 것을 세피로스도 같이 듣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 능력으로 바이에른에 있을 때부터 카일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자신의 능력을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 왔고 카일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거기다 실버 팽과의 전투 때는 작은 동물들을 넓게 퍼트려서 감시망을 펼친다거나 숨겨진 적을 찾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 능력 덕분에 카일은 그녀를 자기 직속의 특수 부대로 배속시킨 것이다.
아리시아는 세피로스의 이름이 나오자 카일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가 주인님에게 이상한 말 한 것 아니죠? 위험한 여자니까 가까이 하지 마세요. 주인님.”
“처음에 한 번이었잖아? 이제 그만 용서해 줘.”
“절대 용서 못해요. 감히 어떻게 주인님에게…….”
아리시아의 청초한 얼굴에 보기 드물 정도로 선명한 적개심이 보였다.
‘그때 일이 쇼크긴 쇼크였던 모양이군. 하긴, 어떻게 보면 내 위기였으니까.’
아리시아가 세피로스를 싫어하는 이유.
그것은 그녀가 카일의 노예 중에서 유일하게 카일에게 반기를 들었던 노예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