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바키 버얼레는 3분 정도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카일이 다시 손을 대자 고통이 사라졌다.
‘더 방치했다가는 능력이 각성해 버리지.’
카일은 그 전에 코어에 힘을 회수했다. 결국 바키 버얼레는 지독한 고통만 느끼고 초능력은 각성하지 못한 것이다.
카일이 능력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할 수 있게 된 이 기술은 사실 전투에는 사용하기 힘들다.
하지만 고문의 수단으로는 아마 이것보다 탁월한 것도 없을 것이다.
“어때? 한 번 더 할까?”
“안내… 안내, 안내, 안내……. 안내하겠습니다…….”
격렬한 고통에 말까지 더듬으며 간절하게 매달리는 바키 버얼레 백작을 보고 카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바키 버얼레 백작의 금고는 꽤 클래식한 수법으로 숨겨져 있었다.
바키 버얼레 백작의 방에 있는 서재의 책을 한 권 뽑자 책장이 스르륵 움직이며 숨겨진 금고가 드러난 것이다.
‘그야말로 귀족 금고의 왕도 같군.’
“여기 있습니다.”
“좋아. 어디 볼까? 호오… 제법 알차게 모았군.”
바키 버얼레 백작의 금고는 생각보다 두둑한 편이었다. 가득 쌓여 있는 금화와 보물을 보고 카일이 검은 바람에게 말했다.
“남김없이 챙겨라.”
“예. 주인님. 얘들아 쓸어 담아라.”
그리고 검은 바람의 부하들은 금고 안의 보물을 부지런히 쓸어 담았다.
‘저 빌어먹을 개자식들.’
그런 모습을 보고 바키 버얼레 백작은 이를 갈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보물을 다 챙긴 후 카일은 바키 버얼레 백작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볼일은 다 끝났고…….”
카일이 검이 스르렁거리면서 뽑혔다. 그러자 바키 버얼레 백작이 기겁을 하며 말했다.
“살… 살려 준다고 말하지 않았소?”
“응? 내가 언제?”
“…….”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말하는 카일의 말에 바키 버얼레는 생각해봤다.
잘 생각해 보니 살려 준다는 말은 실제로 한 적이 없었다.
편히 죽여 주겠다고 말했을 뿐.
‘이런 약탈의 상도덕도 없는 X새끼…….’
“그만 이만.”
“잠… 잠깐. 여기 지하에… 커억.”
다급하게 뭔가 말하려고 하던 바키 버얼레는 카일의 검에 심장이 꿰뚫려 버렸다.
“어……? 야, 지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어? 지하에 뭐?”
“크… 크르르르…….”
“이런, 끝까지 들어 보고 죽일걸.”
이미 늦었다.
바키 버얼레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입에서 피거품을 물고 죽어버렸다.
“지하라……. 지하에 다른 금고라도 있다는 건가?”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검은 바람의 말에 카일이 웃으면서 말했다.
“뭐 어째, 찾아봐야지. 주변에 비밀 스위치나 숨겨진 문 같은 게 있는지 찾아봐라.”
“예. 주인님.”
카일의 지시에 검은 바람의 부하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좀처럼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들여도 성과가 없자 검은 바람이 말했다.
“그냥 부셔버릴까요?”
“아니, 그건 좀 그렇지. 금고 안에 들어있는 보물까지 같이 부서지면 어떻게 해.”
“아, 그렇군요.”
“흐으음……. 제니아를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이번에 카일의 근접 호위를 맡고 있던 여기사 제니아가 카일의 부름을 받고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래. 넌 텔레포터니까 공간을 인식할 수 있을 거다. 이 건물의 지하가 있는지 알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제니아는 눈을 감고 잠시 집중하더니 카일에게 말했다.
“무언가 감옥 같은 시설과 거기에 가둬져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가볼 수 있겠나?”
“예. 주군, 그럼 저를 꼭 끌어안으세요.”
“그냥 손만 잡아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럼 그러시던가요.”
중간에 약간의 꼼수를 부리려고 했던 제니아였지만 초능력에 관해서는 카일이 훨씬 잘 알았다.
* * *
카일이 그녀의 손을 잡고 둘은 지하의 어딘가로 텔레포트 했다.
“지하 감옥인가?”
왜 이렇게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 감옥의 안에는 딱 한 명이 갇혀 있었다.
“어린애?”
그건 순백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였다.
연한 백금발에 원래라면 귀여운 외모였을 것 같은 어린 소녀는 그동안 방치되고 있었는지 뺨이 홀쭉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꼬마야. 꼬마야. 정신은 있니?”
카일이 아이를 잡아서 흔들어 봤지만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누구지, 이 꼬마?”
“잘은 모르겠지만 입고 있는 옷을 봐서는 귀한 신분의 아이 같습니다.”
“타국의 귀족이라는 건가?”
해적은 귀족을 보면 사로잡아서 본가에 몸값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상대편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인질로 잡은 귀족의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에 죽여버리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
이 소녀도 어쩌면 그런 케이스일지도 몰랐다.
“일단 데리고 돌아가자.”
“예. 주군.”
카일은 어린 소녀를 챙겨서 위로 돌아왔다.
“주인님, 그 품에 아이는 누구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쇠약해진 상태니까 일단 레이나에게 맡겨라.”
“예. 알겠습니다.”
검은 바람은 부하들을 시켜서 아이를 배 위에 대기 중인 레이나에게 데리고 가라고 지시했다.
* * *
모든 약탈 작업이 끝난 후.
“항구의 기반 시설을 싹 파괴해라. 항구 인근에 있는 건물도 다 부셔버려라.”
“예. 알겠습니다.”
카일의 지시에 의해서 해적들의 모항인 알바니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알바니아 항구는 카일의 영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이펀 왕국의 항구였다.
즉, 여기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면 이 항구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해적들의 활동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항구 파괴는 필수였다.
“다 파괴해라. 나룻배 하나 대기 어렵게 해버려라. 저기 등대도 부셔버려. 창고에도 다 불을 질러라.”
카일이 지금 머물고 있는 리온 마을보다 세 배는 더 커다란 항구였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부수려고 하니까 순식간이었다.
약탈로 챙긴 재물의 양은 상당했다.
그냥 돈만 있는 게 아니라 남방대륙의 특산품이나 귀족들이 비싸게 사들이는 사치품도 가득했다.
약탈품을 배에 실으려는데 타고 온 다섯 척의 해적선으로는 한참 모자라서 항구에 정박 중이던 해적선들에도 가득 실어야 했다.
참고로 프랑크는 항구에 있는 해적선 중에서도 크고 비싼 물건들 위주로 일곱 척을 챙겼는데 그렇게 해서 카일의 배는 총 열 두 척이 되었다.
“나머지는 다 파괴해라.”
“예. 주인님.”
카일의 명령에 배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프랑크는 안타깝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군요. 선원만 충분했으면 열 척은 더 끌고 돌아갈 수 있는데…….”
“어쩔 수 없는 거지. 배를 움직이는데 인원은 지장이 없겠지?”
“예. 선원들을 최대한 분산 시켜서 배를 움직일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좋아. 출발하자.”
‘돌아가는 길에 빌 존스 씨에게 말해서 항해가 가능한 노예들을 좀 구해야겠어.’
배도 열 척이 넘게 생겼으니 이제 해상 전력도 본격적으로 육성해야 할 시기였다.
“하아아……. 할 일은 많은데 일거리는 점점 늘어만 가는군. 진짜 미치겠네.”
돌아가서 서류 작업에 파묻힐 것을 생각하니 다시 우울해지는 카일이었다.
* * *
사이펀 왕국의 국가 산업이 해적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카일은 이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멍청하면 해적질을 해서 먹고살까?’
하지만 지금 카일 스스로가 항구 하나를 덮쳐서 약탈을 해본 결과 깨달았다.
‘이러니까 해적질을 못 그만두지.’
항구 하나를 털어 먹으니 수입이 상당해 보였다.
순수하게 챙긴 현금만 해도 30,000골드가 넘었다. 거기다 남방대륙과의 교역품, 귀족들의 사치품, 각종 무기류와 식량도 가득 챙겼다.
현금 이외의 교역품의 가치는 빌 존스가 와서 자세하게 감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10만 골드는 될 것이다.
“몇 군데 더 털어?”
중이 고기 맛을 알았을 때처럼 카일은 다시 배를 타고 약탈을 할까 고민했다.
두세 번만 더 이런 약탈을 진행하면 바이에른에서 있을 때보다 더 부자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리겠지? 이제 놈들도 대응할 테고.”
카일이 알바니아 항구를 공격해서 손쉽게 약탈할 수 있었던 것은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것도 있지만 적들의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 땅에 부임했던 싱카라 제국의 영주들 중에 자신의 재산을 털어가며 해적들을 토벌하려고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해적들의 모항을 먼저 공격한다?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한 것은 카일이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들이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기에 카일은 손쉽게 알바니아 항구를 박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들도 대응을 할 테고, 이전보다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위치가 밝혀진 해적들의 모항 중에서 알바니아 항구는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다른 곳은 규모 자체가 훨씬 크다는 말이다.
다른 곳에 입소문이 돌았다고 생각하면 지금 카일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적의 역습에 대한 방비였다.
‘항구 마을을 두 개에서 하나로 줄이길 잘했지.’
덕분에 리온 마을의 항구만 탄탄히 방비하면 연안에서 해적들에게 약탈당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카일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아리시아가 카일의 막사에 들어와서 말했다.
“주인님, 전에 그 아가씨가 깨어났대요.”
“전에? 아아……. 그 레이나에게 맡겨 둔?”
“예. 그런데 한 번 가보셔야겠어요.”
“왜?”
“그게… 그 아이가 공주래요?”
아리시아의 말에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주라고?”
여기까지 와서 일거리가 더 늘어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카일이었다.
* * *
에이라 수 레드로즈.
카일이 구해낸 소녀의 풀 네임이다.
레드로즈 공국은 율리우스 왕국의 왼쪽, 베르나도 왕국의 북쪽에 있는 작은 나라다.
상업이 발달한 나라였고, 작은 나라지만 공국 치고는 그래도 제법 탄탄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에이라는 그런 나라의 공주로 태어났다.
아기 시절부터 그녀는 범상치 않은 두각을 드러냈다.
세 살 때 이미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하더니, 네 살부터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왕실의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 나이 어린아이들과 달리 예쁜 인형이나 드레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도서실에서 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왕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완독하고, 멀고 먼 이국땅에서 가져온 희귀한 서적이나 학자들의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공국의 왕실은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레드로즈 공국의 국왕은 처만 해도 열다섯 명이 되었고 그 슬하에 태어난 자식은 마흔 명에 가까웠다.
에이라 공주는 공주 중에서는 열여덟째 공주, 자식 중에서는 서른세 번째 자식이었다.
이렇게 왕족이 많다 보니 그녀에게 일일이 신경이 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가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여덟 살 무렵이었다.
그녀에게 기본 교양을 가르치기 위해서 왕실에서는 가정교사를 붙였는데 가정 교사가 이틀 만에 그만두겠다고 나온 것이다.
“공주님에게는 제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말석의 공주라고 해도 공주는 공주다.
그녀를 가르치기 위해서 뽑은 교사는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우수한 인재였다. 그런 인재가 이제 여덟 살인 어린애를 가르칠 게 없다고 두 손을 든 것이다. 에이라 공주의 천재성이 대외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 후에도 왕실에서는 공주에게 다른 가정교사를 붙여 봤지만 모두 같은 말을 하고 그만뒀다.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자기 딸이 똑똑하다는 말을 들은 공왕은 에이라 공주를 불러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부녀지간에 단독으로 만남을 가진 첫 순간이었다.
공왕은 자기 딸에게 시험 삼아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국가의 역사나 대륙의 정세 등등.
그 모든 질문에 에이라 공주는 막힘없이 대답했고 심지어 공왕을 뛰어넘는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다.
공왕은 자신의 딸이 진짜 천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공왕은 말했다.
“훌륭하지만 안타깝구나. 네가 공주가 아니라 왕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