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푸르트 마을은 인구 200명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마을의 인구가 작다는 말은 마을의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말이고, 그것은 이들이 그만큼 먹고살기 힘들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그런 이들에게 해적들과의 밀무역은 사실 유일한 구원이기도 했다.
이래 죽어도 저래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해적들이 가져오는 재물을 가져가서 상단에 대신 팔고, 그 차익을 챙겨서 그 돈으로 식량을 구입했다.
해적들은 그 대가로 푸르트 마을을 어느 정도 지켜 주기도 했다. 약탈한 재물을 세탁할 수 있는 환금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 마을이 계속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가 10년도 훌쩍 넘게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푸르트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항상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이 사실이 외부로 밝혀지면 마을이 통째로 불타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일에게 들켰을 때 촌장이 제발 자신 하나만으로 봐달라고 애원했던 것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만다행스럽게도 카일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비록,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에 전폭적인 협력을 한다는 조건부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 * *
칠흑처럼 어두운 밤바다.
그 위에 선체를 검게 칠한 해적선 한 척이 닻을 내리고 멈췄다.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해적선의 근처로 조각배 몇 척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들이 다가가자 해적선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거미줄.”
그러자 조각배에 타고 있는 인물이 말했다.
“비둘기.”
알 수 없는 암호로 답하자 조각배의 위로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한 명씩 올라와라.”
그 말대로 일행은 한 명씩 올라갔고, 배 위로 올라간 그들에게 해적들은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몸수색을 한다.”
해적들은 한 명씩 꼼꼼하게 몸수색을 한 후에야 다음 사람이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게 했다.
꼼꼼한 수색 덕분에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은 넘게 걸렸다.
모든 이들이 올라오자 해적선의 선장이 나타났다.
“촌장, 오늘은 좀 많군. 평소에는 열 명 정도 아니었나?”
“열 명이서 옮기려고 하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신임 영주가 의외로 유난이라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마을 젊은이들을 다 데리고 온 겁니다.”
“그래?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런데…….”
선장은 주변의 남자들을 보고 말했다.
“이 치들은 투란인이 아닌가? 언제부터 투란인이 너희 마을에 정착한 거지?”
그 말에 촌장은 잠시 당황했지만 말했다.
“최근 도적들이 기승을 부려서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도 마을의 돈을 모아서 투란인 노예들을 산 겁니다.”
“호오… 그래? 돈은 어디서 나서?”
계속 의심하는 해적 선장에게 푸르트 마을의 촌장이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저희가 어르신들하고 거래한 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그 정도 돈이야 모으고도 남죠.”
“…뭐, 일리는 있군.”
선장은 일단 믿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 믿음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겠는데. 투란인 노예들이 좀 생겼다고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이 새끼들은 기본적으로 말에서 내리면 X도 아니거든. 배 위에서는 등신들이지.”
순간 몇몇 투란족 남자들이 움찔했지만 함부로 나서지는 않았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냥 짐꾼으로 데리고 온 겁니다. 실제로 몸수색에서 칼 한 자루 안 나왔지 않습니까?”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살려 두고 있는 거 아니야.”
“…….”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그럼 거래를 하러 이동하지. 닻을 올려라.”
“예. 선장님.”
해적들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배의 닻을 올리고 노를 저으면서 배를 움직였다.
푸르트 마을과 거래를 하는 해적의 이름은 캡틴 조지라고 했다. 그는 원래 상인 출신이었는데 해적에게 사로잡힌 후 이런저런 곡절 끝에 해적으로 아예 전업을 하고 이제는 다섯 척의 배를 거느리고 있는 해적단의 선장이었다.
본인은 베르나도 왕국에 현상금이 걸려 있는 지명 수배자이기도 했다.
이놈의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조심성이었다.
상대가 강해 보이면 절대 싸우지 않았고, 평소에는 해적 깃발을 숨기고 상선으로 위장하고 다니며 단속을 피했다.
약탈한 재물을 환전하는 과정 또한 조심스러워서 푸르트 같은 작은 마을 몇 개와 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군데로 분산시켜서 재물을 처분해 왔다.
이 조심성 덕분에 그는 10년 넘게 해적질을 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 삶을 연명하게 도운 이 조심성은 환금 과정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사전에 전서구로 암호를 지정해서 정해진 시간에 접선을 하고, 그 후에도 몸수색은 기본이었다.
그렇게 긴 몸수색을 마치면 배 위에 마을 사람들을 태워서 자신의 선단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킨 후에야 거래를 했다. 자신의 함선들이 모두 둘러싸고 있는 장소에서라면 상대가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함선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괜한 투란족의 젊은이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하하하. 어떠냐? 투란의 땅개들아. 이것이 나의 대선단이다!”
사실 이렇게 굳이 시비를 걸듯이 말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경계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맨손이긴 했지만 투란인 노예라는 것은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 덩치는 어쩐지 거슬려.’
좀 전부터 유독 거슬리던 것은 다른 투란인 노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덩치의 투란족 노예였다.
강인한 피부와 탄탄한 근육, 그리고 달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들까지.
척 봐도 한가락 하게 생긴 느낌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더 경계를 하는 것이다.
“거기 중늙은이 투란 땅개.”
조지가 그 투란의 노예를 대놓고 불렀다. 그러자 다른 투란인들이 모두 움찔했다.
“…….”
지목을 받은 이가 묵묵하게 앞으로 나갔다.
조지는 단검을 손에 들고 잔인한 미소로 위협을 하며 말했다.
“어떠냐? 이 대선단의 위용이 놀랍지 않나? 투란의 촌구석에서는 평생 보지 못했을 테지?”
“…….”
“그나저나 덩치는 진짜 좋군. 바다에 빠트리면 상어들이 좋아하겠어?”
“…….”
“뭐라고 말 좀 하지 그래?”
“…….”
“벙어리냐? 너 이름이 뭐야? 엉?”
“검은 바람.”
“허어어? 이 새끼 버릇이 없군. 촌장,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개기는……. 촌장?”
조지가 푸르트 마을의 촌장을 찾았지만 어느새 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로 숨었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촌장을 대신해서 검은 바람이 말했다.
“여기 다섯 척이 전부인가?”
“뭐? 뭐라고?”
“아쉽군. 그래도 열 척 정도는 되었으면 했는데 말이야.”
“무…슨?”
순간 조지는 쎄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예전에 상인으로 있다가 처음으로 해적들에게 사로 잡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조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검은 바람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겁내시나? 말에서 내리면 아무것도 아닌 투란의 전사를 상대로 말이야.”
“네… 네놈들……. 얘들아, 쳐라!”
조지는 바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보다 검은 바람의 주먹이 그에게 틀어박힌 게 먼저였다.
뻐어어어억!
조지는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아서 지면에 털썩 쓰러졌다.
쓰러진 조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검은 바람이 외쳤다.
“녹색 나무.”
“예. 대장님. 준비했습니다.”
녹색 나무라고 불린 투란의 젊은이가 허공에서 공간을 열더니 무언가를 좌르륵 쏟아냈다.
아공간 보관 능력.
꽤 희귀한 능력으로 공간의 크기에는 한도가 있지만 대략 마차 세 대 정도의 물량은 보관할 수 있었다.
촌장으로부터 몸수색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여기에 무기를 보관했다.
녹색 나무는 아공간의 물건 중 특히 커다란 태도를 꺼내어 검은 바람에게 던졌다.
“대장님!”
검은 바람은 날아오는 태도를 한 손으로 잡고는 붕붕 휘둘렀다. 그리고 아직도 당황한 해적들을 향해 말했다.
“물개 새끼들을 쓸어버려라!”
“예. 대장님.”
“투란의 전사가 어떤 건지 보여 주마.”
“우오오오오!”
검은 바람과 그 직속 부하들이 해적선 위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 * *
“시작한 모양이군.”
“예. 맞아요.”
카일은 어부들이 쓰는 어선을 타고 해적선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란이 일어난 것을 봐서는 이제 작전대로 전투를 시작한 모양이다.
“후우우, 걱정이군.”
카일의 말에 옆에 있던 아리시아가 말했다.
“오라버니를 걱정하시는 건가요? 해적들이 그렇게 강한가요?”
“아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검은 바람은 걱정 안 하지.”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초능력까지 사용하면 마스터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은 바람이다.
걱정할 리가 없다. 하나 카일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배는 많이 부수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아아아…….”
“나포라는 개념을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어. 배라는 게 의외로 섬세해서 핵심 기관을 부수면 수리하기도 힘들 텐데…….”
카일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미)의 배였다.
그 말에 아리시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빨리 우리도 돌입해요. 그래야 안전하게 제압 할 수 있죠.”
“그래야지. 전원 전진하라.”
카일의 지시에 따라서 수십 척의 어선들이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해적선으로 다가갔다.
* * *
“막아. 막으란 말이야.”
“우아아아……. 미친놈! 이걸 어떻게 막아?!”
사방에서 날뛰는 투란족의 전사들을 상대로 해적들은 혼비백산이 되어서 날뛰었다.
말 위에서는 강해도 배 위에서는 약한 인간?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는가? 강자는 어디에 가져다 놔도 강한 법이다.
원래 카일에게 팔려 왔을 때 이들은 아직 어리고 경험도 없는 미숙한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10세 미만의 소년 시절에 노예로 잡혀 오거나 아예 노예로 태어나고 자라서 투란의 핏줄은 타고 났지만, 투란의 남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런 이들에게 검은 바람은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단련시켜 주었다. 진정한 투란의 전사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식을 가르쳐 주고, 카일에 대한 충성심을 뼛속까지 새겨 주었다.
검은 바람의 훈련에 그치지 않고 카일의 능력으로 각성하여 완벽한 신체 조건과 더불어서 강력한 초능력까지 갖추었다.
그렇게 지금은 모두가 제 몫을 하는 강인한 전사가 되었다.
그들 중 해적들 따위한테 질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배를 점령하고 바로 옆의 배로 널뛰듯이 넘어가서 날뛰었다.
“제길, 널빤지를 끊어!”
“도망가. 저 배는 이미 틀렸어!”
몇몇 눈치 빠른 해적들은 동료를 버리고 이제라도 도망가는 게 살길이라고 판단했다.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지만 너무 늦었다.
“발사!”
아리시아의 명령과 동시에 화살이 날아와서 배 위의 해적들에게 쏟아졌다.
“아악!”
“으아악!”
“화, 화살이 어디서……. 크억!”
화살로 허둥거리는 사이 발레리아와 그녀 직속의 여기사들이 배위로 뛰어 올라갔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거짓말이다. 저, 저, 저 새끈한 붉은 머리 년을 사로 잡……. 어?”
서걱!
말을 하던 놈은 섬광처럼 달려온 발레리아의 일격에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머리가 지면에 떨어지는 놈의 얼굴에는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의문의 감정만이 가득했다.
발레리아는 그대로 주변에 살기를 뿌리며 말했다.
“또 반항하거나 성희롱하고 싶은 놈?”
“…….”
“…….”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해적들이 무기를 집어 던지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항…항복.”
“항복합니다.”
“항복입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해적들은 모두 항복했고, 카일은 그 후에 유유하게 위로 올라와서 말했다.
“배를 돌려라. 리온 마을로 향한다.”
그렇게 카일은 다섯 척의 해적선을 나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