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카일의 입장에서 봤을 때 미래의 성과를 위한 초기 투자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 세계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카일은 그 후에도 거침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그레이 마을은 화전을 일구고 있지?”
“예. 영주님.”
그레이 마을의 촌장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봤다.
“화전은 그만둬라. 생산성도 좋지 않고 힘만 든다. 그 대신 너희들의 산에서 이것을 채취해라.”
카일이 그의 앞에 연한 회색빛의 돌을 내밀었다.
“영주님, 이것은… 석회석이 아닙니까?”
“그래. 조사한 결과 너희들의 뒤편의 산맥에 지천으로 널린 게 이 석회석이더군.”
이 세계에서도 석회석을 활용한 시멘트는 있다.
연금술사들이 연구를 거듭해서 효과를 극대화시킨 시멘트는 이 세계에서도 유용한 건축 재료다.
다만, 이 세계에서 시멘트는 어디까지나 건축의 부재료지 주재료는 아니다. 돌이나 벽돌 따위를 쌓아 올릴 때 서로 붙여 주는 이음새의 역할로 사용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일이 생각하고 있는 철근 콘크리트보다는 강도도 건물의 수명도 훨씬 떨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량의 석회석이 필요하다. 너희 마을에 채석장을 만들어서 석회석의 채취를 맡기겠다.”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영주님 지금 당장 화전을 그만 두고 전부 채석 작업에 투입하면 저희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작업에 투여되는 사람에 대한 일당을 주마. 채석장의 규모가 커지기 전에는 내가 일꾼들의 생활을 책임지겠다.”
“예. 감사합니다, 영주님.”
마지막으로 남은 건 푸르트 마을이었다.
푸르트 마을은 지금 카일이 자리를 잡은 조셉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영지에서 단 두 개밖에 없는 어촌 마을이었다.
과연 자신들에게는 무슨 일거리를 줄지 기대하고 있는 푸르트 마을의 촌장에게 카일이 한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푸르트 마을은, 해산한다.”
카일의 말에 푸르트 마을의 촌장은 깜짝 놀랐다.
“영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마을을 해산한다니요?”
“너희 마을은 해안선이 좁고 연안에 암초가 많아서 항구로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항구를 유지했던 거지?”
카일이 갑자기 물어보는 질문에 푸르트 마을의 촌장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설마 아시는 건가?’
불안해하는 푸르트 마을의 촌장에게 카일이 말했다.
“사이펀 왕국의 해적들과 밀매를 하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놈들이 약탈해서 가지고 온 물건을 몰래 밀수해서 상인들에게 팔아 치우고 있었지.”
카일의 말에 푸르트 마을의 촌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부디… 부디 죽이시려면 저 하나만으로 해주십시오. 다른 영주민들을 불쌍하게 여겨 주십시오.”
카일은 푸르트 마을의 촌장을 잠시 내려다보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자구책이었음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해적과의 밀무역은 중죄다.”
“…….”
“그러니, 너희들에게 죄를 탕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어떤 기회를 말씀이십니까?”
“너희들과 거래하고 있는 해적들의 명부와 연락방식, 그리고 접선지에 대한 정보 등등을 모두 제공해라.”
“…그리 하면 저희 마을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단 마을은 여전히 해체한다.”
“그런…….”
실망한 표정의 촌장에게 카일이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해적들이 해안선을 약탈한 목표를 분산시키면 우리의 전력도 분산된다. 거기다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해적들은 반드시 보복하려 들겠지. 마을의 해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카일의 말에 푸르트 마을의 촌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 리온 마을과 합병한다. 이 마을은 앞으로 내 영지의 중심이 되어서 발전할 테니 인구가 늘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영주가 직접 다스리는 본토에 합류시킨다는 말은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영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촌장들에게 말했다.
“내 지시대로 마을을 움직이고,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라. 알겠나?”
“예. 영주님.”
회의가 끝나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카일에게 발레리아는 직접 카일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말했다.
“수고 하셨습니다. 주군.”
“음.”
막사에 가져다 놓은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카일에게 발레리아가 말했다.
“이제 슬슬 영주관저를 지어야 하지 않나요? 저택까지는 아니라도 일단 평범한 집 정도라도…….”
영주가 된 이후에도 계속 야전의 막사에서 생활하는 카일을 보면서 발레리아는 안타까워했다.
사실 발레리아 말고 다른 측근 노예들도 우선 카일이 머물 수 있는 관저부터 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카일은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어촌 마을에 덩그러니 저택을 지어 봐야 좀 그렇잖아?”
“그래도 그렇지…….”
발레리아는 그저 안타깝다는 듯이 카일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뭐해?”
“검은 바람과 아리시아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적의 잔당을 처리하고 영지를 순찰하고 있습니다.”
“좋군. 레이나는?”
“구호소를 차려서 아픈 사람들을 돌봐 주고 있습니다. 예산을 신청했는데 승인해도 괜찮을까요?”
“이리 줘봐.”
카일은 발레리아에게 받아서 레이나가 신청한 예산안을 검토했다.
‘약초 구입과 사람 몇 명 쓰는 정도군.’
“이 정도면 상관없다. 아직은 자금이 충분하니까 말이야.”
“그것도 문제입니다. 주군이 바이에른에서 번 돈이 막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 막대한 재산이 5분의 1도 남지 않았습니다.”
발레리아의 말에 카일은 쓰게 웃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카일은 바이에른에서 실로 막대한 부를 이룩했었다. 던전에서 올리는 수익도 상당했지만 그 수익을 사업과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연일 대박을 터트렸다.
투자한 금액의 몇 배를 넘게 회수하고 매달 들어오는 임대료 등등이 더해지면서 점점 돈이 돈을 벌어왔다.
중간부터 카일이 손을 대지 않아도 돈이 돈을 벌어오는 구조가 되어서 카일은 돈에 관해서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되었다.
하지만 바이에른이 망하고 그곳에 있는 재산을 서둘러서 처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이 생겼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동해 오는 동안 들어간 경비도 상당했고 거기다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외부 상단에 연락해서 구입하는 물자들까지……. 아직 카일에게는 꽤 많은 돈이 남아 있었지만 절정기에 비하면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영지민들을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는 주군의 마음은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조금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사용 하시는 게 어떨까요?”
발레리아의 말에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딱히 영지민들을 위해서 돈을 무작정 푸는 건 아니야. 이 모든 것이 투자지.”
“주군의 사업 수완이 훌륭한 것이야 알고 있지만……. 정말 이 영지에 투자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총인구가 이천 명이 간신히 넘는 이런 영지에?”
“물론, 나를 믿어라.”
“알겠습니다. 저 발레리아. 주군에게 구원받은 그 순간부터 주군을 믿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후후후. 그래. 고마워.”
카일은 그렇게 말하면서 발레리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오늘 일정은 다 끝났으니 이제 남은 시간에는 발레리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갑옷의 후크를 풀고 그녀의 가녀리지만 탄탄한 어깨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군, 해적과 내통한 마을 촌장까지 용서해 주신 것은 역시 너무 관대하신 것 아닙니까?”
“…진짜? 여기서 일 얘기 하자고?”
“아니, 저야 주군을 믿고 따르지만 그래도 기사로서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간언… 흐읍, 주인님!”
카일이 무슨 장난을 쳤는지 발레리아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 호칭이 다시 주인님으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반응이 재미있네.”
카일은 그녀의 그런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계속 갑옷과 겉옷을 벗겼다. 발레리아는 카일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뚱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주군, 저는 지금 진지… 으읏… 읏…….”
“나도 진지해. 정말 진지해.”
카일의 손길에 발레리아의 갑옷이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 카일의 손은 그대로 발레리아의 상의 셔츠와 바지까지 벗겨 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약간의 반항기와 부끄러움이 섞여 있는 표정의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여기서 남방대륙을 향한 해양 무역을 하려고 해.”
“저도… 아, 알아…요.”
“그래.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배가 없지. 배를 만들려고 하면 기술자를 불러오고 건조를 위한 항구 시설을 만들어야 하고…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 더욱… 예산을… 아아, 주인님… 자꾸 이러시면…….”
“일단 들어 봐. 배가 필요한데 배가 없다. 하지만 배를 가지는 방법이 꼭 만들거나 어디서 사오는 것만 있는 게 아니야.”
“무슨, 말씀…이시죠…….”
발레리아는 머릿속이 점점 아득해 지고 있으면서도 카일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집중했다.
카일의 손길은 발레리아의 부드러운 속살을 누볐고 그녀의 귓가에는 영지의 향후 계획을 속삭였다.
“이 지역에는 해적이라는 훌륭한 사냥감들이 있지.”
“사…냥감? 해적이요……?”
“입장과 역할을 바꿔 보면 해적은 훌륭한 사냥감이야. 우리에게 필요한 배를 가지고 있는 건 물론이고 배에 타고 있는 해적들을 노예로 팔면 수입원이 되고, 해적들이 약탈한 물자도 훌륭한 수입원이 되겠지.”
“그런…….”
어이없는 표정을 하는 발레리아에게 카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해적선 한 척 나포하면 오우거보다 더 짭짤할 수도 있어.”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주군. 해적선을 어떻게 나포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앙… 장난 그만, 치시고요. 우리는 해전에 대한 경험도 전무합니다.”
“장난 아닌데……. 어쨌든 그걸 위해서 푸르트 마을의 촌장을 조건부로 용서해 준다고 한 거야.”
“그… 아아아…….”
발레리아의 탄성에 카일의 거침없던 손길이 멈췄다. 그리고 꽤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건 신음의 ‘아아아’야? 아니면 탄성의 ‘아아아’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보다 주인님 거기까지 생각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신 거군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신 건가요?”
“레이븐에게 이 정보를 들었을 때였지. 해적과 밀무역을 하는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걸 듣자마자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아아… 과연, 정말… 대단, 아앗…….”
“자, 이제 진짜 일 얘기는 그만. 뭐 때문에 나오는 소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어.”
카일의 눈앞에는 어느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알몸이 되어 있는 발레리아가 있었다. 여기까지 오자 발레리아도 더 이상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럼… 귀여워해 주세요.”
“얼마든지.”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카일과 발레리아는 격정적으로 몸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