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화이트 자작령이라고 이름 붙여진 카일의 영지는 열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 두 개는 어촌 마을이었고 나머지는 농업과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카일은 이 중에서 어촌 마을 쪽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뭔가 사람들이 굉장히 무기력한데요?”
“무기력? 이건 그냥 부랑자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아.”
아리시아와 발레리아가 하는 말대로 마을의 주민들은 카일이 군사를 이끌고 마을로 입성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시큰둥한 반응으로 쳐다보거나 삐쩍 마른 아이들 몇몇이 다가와서 구걸하는 게 다였다.
‘이건 어촌 마을이 아니라 어촌에 있는 빈민가라고 봐야겠군.’
카일은 마을 사람 중에 한 명을 잡고 물었다.
“이 마을의 촌장은 누구냐?”
“촌장… 말씀입니까?”
“그래. 지금 마을에 있나?”
“촌장은 지금 배를 살펴야 한다고 항구에 나가 있습니다.”
그 말에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내가 온다고 사람을 보내서 말했을 텐데? 그런데 바다로 나갔다고?”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사람 우습게 보는군.”
아무래도 신임 영주 길들이기 같은 텃세를 부릴 생각인 모양인데 카일은 여기에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검은 바람.”
“예, 주인님.”
“마을 촌장이라는 놈을 데리고 와라. 지금 당장.”
“예. 알겠습니다.”
카일의 명령에 검은 바람은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잠시 후.
검은 바람은 이 어촌 마을의 촌장이라는 남자를 데리고 왔다.
‘의외로 젊군.’
촌장이라고 해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을 생각했던 카일이었지만, 정작 검은 바람이 끌고 온 남자는 이제 삼십 대 중반 정도 된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얼굴에 반항기가 가득한 것을 봐서는 한 성깔 한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검은 바람에게 질질 끌려서 왔는데 그 뒤에는 그를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다수 모여 있었다.
“…….”
촌장은 카일을 보고 먼저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일은 그 남자를 향해서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이 마을의 촌장이냐?”
“그렇수다.”
말에서 이미 버릇이 없었다.
영주가 되어서 이 땅을 다스려야 하는 카일의 입장에서는 초장부터 얕잡아 보이고 들어가서는 무척 곤란했다.
카일이 검은 바람에게 슬쩍 눈짓을 주자 검은 바람의 손이 남자의 어깨를 잡아서 강하게 짓눌렀다.
우두두둑!
“크으윽…….”
어깨뼈가 바스라질 것 같은 고통이 그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다른 남자들도 이를 악물고 검은 바람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죽고 싶으면 덤벼라.”
검은 바람이 싸늘한 눈빛을 한 번 뿌리자 그들의 발길이 얼어버렸다.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의 검은 바람의 살기는 아무리 거친 바다 사나이들이라고해도 일반인들이 받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일은 검은 바람에게 억눌린 남자를 향해서 말했다.
“나는 네 자존심을 살려 주고자 온 게 아니다. 이 땅을 다스리라는 국왕 전하의 명령을 받고 부임했다.”
“…….”
“협조하지 않고 반발할 인간이라면 나에게 필요 없다는 얘기다. 너도, 그리고 저것들도.”
카일은 이 촌장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젊은 남자들을 가리켰다.
뿌드득.
젊은 촌장은 이를 뿌득 갈며 카일을 노려봤고 카일 역시 그 눈을 마주봤다.
잠시간의 기 싸움이 벌어졌지만 어차피 결과는 뻔했다.
촌장이 먼저 고개를 숙였고 카일이 말했다.
“이름이 뭐지?”
“조셉이라고… 합니다.”
“그래. 조셉, 이 마을의 인구는 총 몇 명이지?”
“사백 명 정도 될 겁니다.”
“사벡 명이라…….”
카일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정도면 빡세게 하면 하루면 되겠군?”
“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인구 조사를 해와라.”
“방금 말했지 않습니까? 사백 명이라고.”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백 명의 나이와 연령 성별 등등을 모두 상세하게 분류하고, 총 몇 가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인구 조사라는 거다. 그냥 몇 명 정도라고 어림짐작으로 대답하는 건 어린애라도 하는 거다.”
“…….”
카일의 말에 조셉이라는 촌장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자신이 어린애만도 못한 무능한 인간으로 취급받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생각 같아서는 그냥 확 들이받아 버리고 싶었지만 신입 영주라는 인물이 데리고 온 군사들이 상당히 강력해 보였다. 특히 자기 어깨를 누르고 있는 이 거구의 이민족 남자는 절대 맞서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카일은 조셉에게 다시 말했다.
“촌장이라면 글은 읽고 쓸 줄 알겠지?”
“예. 가능합니다.”
“하루 주지. 내가 시키는 대로 인구 조사를 완벽하게 해 와라. 그리고 거기 너희들.”
카일은 촌장을 따라서 온 젊은 남자들을 불렀다.
그들은 카일의 부름에 쭈뼛쭈뼛 다가왔다.
“너희들은 인근 마을에 가서 촌장들에게 전해라 사흘 안으로 내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완벽하게 인구 조사를 해서 내 앞으로 오라고. 만약 실패하면 큰 벌을 주겠다는 말도 반드시 전해라.”
카일의 말에 젊은이들 중에 깡 좋아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말했다
“우리가 왜 당신이 시키는 대로… 커어억!”
뻐어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바람의 주먹이 그 남자의 안면에 박혔다.
사람 한 명이 허공에 붕 떠서 한 바퀴 돌면서 거꾸로 떨어지는 광경을 본 적 있는가?
적어도 이 어촌 마을의 젊은이들은 봤다.
바로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이다.
검은 바람에게 한 방 맞은 젊은이는 그대로 지면에 스러져서 꿈틀거리고만 있었다.
카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멍청이처럼 시키는 대로 하기 싫은 인간들은 앞으로 나와라.”
카일의 말에 전원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날 밤, 카일은 굳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캠프를 차리게 했고 부하들에게는 마을에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아무리 시골 마을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집안에 들어가서 자는 것이 편하겠지만 카일은 이제까지와 다름없이 막사를 치고 머물렀다.
그런 카일의 개인 막사에 누군가가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왔다.
검은 피부의 다크 엘프인 레이븐이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카일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주인님. 시키신 대로 이 근방의 정보 수집을 해놨습니다.”
“어디 보여 줘.”
레이븐은 미리 준비해 둔 보고서를 카일에게 내밀었다. 카일은 그걸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을은 열 개밖에 안 되는데 도적단만 서른 개가 넘는군.”
“아무래도 방치된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전임 영주라는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나?”
“예.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있는 땅도 아니고 도적들이 들끓는 땅이다 보니 모두가 신경 쓰지 않고 방치만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니 영주인 나에게 일단 적대심부터 보였겠지.”
영지민들이 영주에게 존경심을 보이고 그 권위에 굴복하는 것은 영주가 영지민들을 지켜주고 돌봐 주기 때문이다.
싱카라 제국이라는 강대국의 백성으로 태어났지만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이 지역의 주민들이 영주에게 존경심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선은 내가 이전의 영주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겠지.’
우선은 영지민들의 인심을 장악하고 영주로서 인정을 받아야 했다.
영지의 발전은 그 다음의 일이다.
“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
* * *
카일이 영지에 자리를 잡고 일주일.
그동안 카일은 인구조사에 대한 보고를 한 차례 받은 것 빼고는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영지민들은 마을 밖에 막사를 치고 머물고 있는 카일과 그 부하들은 반쯤은 경계하면서 계속 지켜보고 이었다.
“촌장님 어떻게 봅니까?”
“뭐가 말이냐?”
“신임 영주 말입니다. 왜 우리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할까요?”
“…….”
“보통 영주라는 것들이 부임하면 첫날부터 여간 성가시게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잠자리가 불편하다, 빨리 저택을 지어라, 음식이 맛없다, 여자를 바쳐라…….”
“그랬지.”
그동안 이 땅에 부임한 영주라는 것들은 대부분 주민들에게 패악질하기 바빴다.
사실, 싱카라 제국에서 사이펀 왕국의 국경지대의 영지에 부임된다는 것은 정계에서 밀려나다 못해 완전히 좌초된 것이라고 봐도 좋았다.
즉, 여기에 오는 귀족들은 이미 귀족으로서의 출셋길에서 밀려나고 자포자기한 놈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영주로 부임한다고 해서 제정신으로 일을 할 리가 없다. 오만 성질을 다 부리며 영지민들을 쥐어짜기만 바빴고, 그러다 도적들의 습격을 받아서 죽거나 정체불명의 사인으로 죽기도 했다.
그런데 입번에 부임한 영주는 뭐가 달라도 좀 달랐다.
부임 첫 날에는 갑자기 인구 조사를 명령하더니 그 후에는 그냥 마을 외곽에 자기들 끼리 막사를 치고 침묵하고 있었다.
마을에 특별하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여차하면 전전 영주처럼 우리가 쓱싹해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입 조심해라.”
조셉은 말을 한 청년의 입을 조심시켰다.
사람의 적응력은 잡초와 같아서 아무리 힘들고 거친 곳에 데려다 놔도 적응하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마련이다.
이 버림받은 땅의 영지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보호를 바랄 수 없는 그들은 스스로 강해지고 억세져야 했으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대상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
도적이나 사이펀 왕국의 해적들뿐만 아니라 정신머리가 썩어 있는 귀족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몇몇의 영주가 정체불명의 사인으로 사망했지만 국가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땅은 철저하게 버림받은 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이번에 영주가 데리고 온 병력 봤냐?”
“예? 아… 뭐, 보기는 봤습니다.”
“이제까지 온 영주들 중에 그렇게 많은 병력을 데리고 온 놈은 없었다. 대부분은 많아 봐야 기사 두 셋에 병사 백 명 정도가 고작이었지.”
“…….”
“이번 영주는 달라. 데리고 온 병력만 해도 수백이 넘고 기사들도 많아 보였다. 특히 나를 억누른 그 검은 바람이라는 남자는 아마 진짜배기 기사일 거다. 말로만 듣던 익스퍼트급의 기사일지도 몰라”
검은 바람은 기사가 아니었지만 뭐 대강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설마……. 그런 놈이 왜 이런 장소까지 왔다고 합니까?”
“나도 모르지. 어쨌든 최근에 이 땅에 새로운 왕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들었지?”
“…….”
“이번 영주는 이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할 수 없다. 모두 주의하라고들 해. 특히 젊은 애들한테 절대로 시비 걸지 말라고 해.”
조셉이 이렇게 말하기 무섭게 마을 사람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촌장님. 촌장님. 큰일 났습니다.”
“토미, 무슨 일이야?”
“신… 신임 영주가 사고를 쳤습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