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다음 날 아침.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침이 아니라 오전이었다.
지난밤에 시작한 카일과 그녀들의 광란의 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만큼 늦게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지난밤 카일은 정신 줄을 놓고 그녀들과 원초적인 쾌락의 향연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한 가지 확실한 것을 확인했다.
“약효 진짜 끝내 주네.”
비라그나라는 약의 효능이었다.
세 명 모두 오랜만의 행위로 몸이 달아올랐고 욕구가 폭발해서 끊임없이 요구했었다. 다행히도 약의 효과 덕분에 카일은 그녀들을 모두 만족시키고 재울 수 있었다.
‘연금술사 길드에 몇 개 더 주문해야지.’
레이나의 말이 맞았다.
그건 참 좋은 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난 카일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의 새하얀 살결이었다.
“…….”
어젯밤에 카일에게 보여 주었던 음란하고 색정적이었던 모습과 달리 잠들어 있는 그녀들의 모습은 여신이나 요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던 카일은 다시 이불을 덮어서 그녀들을 가려주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 다소 긴 목욕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녀들도 잠에서 깨어났다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죄송해요. 저희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데.”
“괜찮아. 그보다 씻고 내려와라. 아침, 아니 점심 먹자.”
“예. 주인님.”
잠시 후, 네 명은 개운한 표정으로 씻고 아래로 내려와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주인님. 이제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글쎄, 마탑에서 연락을 오기 전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카일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모처럼의 여유 있는 시간이니 휴가라고 생각하고 푹 쉬도록 하자.”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그녀들도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동의했다.
* * *
솔라니는 휴가를 보내기에도 좋은 도시였다.
자연경관이 아름답다거나 온천이 솟아난다거나 그런 곳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치안 자체가 좋았고 다른 곳에는 없는 신비한 문명의 이기들이 잔뜩 있었다. 예를 들면…….
“와아아, 주인님. 이것 봐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보여요.”
“세상에 이렇게 높이 올라오다니…….”
“대단해요. 주인님. 아! 저기 저 캠프는 우리 클랜원들 아닌가요?”
일행은 처음 올라와 보는 높은 전망대에 와서 감탄하고 있었다. 그저 높은 건물에 올라와서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며 시큰둥했던 그녀들이었지만 막상 올라와서 경관을 바라보니 좋아했다.
“저녁에 오면 더 절경일 거야.”
“저녁에요?”
“그래. 도시에 가로등과 건물의 빛이 들어오면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 내겠지.”
“와아아. 꼭 보고 싶어요.”
“주인님. 우리 저녁에 또 와요.”
“그래, 그래.”
카일은 여성진들을 데리고 데이트 하는 기분으로 솔라니의 명물을 구경하고 다녔다.
전망대를 나와서는 도심의 경전철을 타고 이동을 하고, 커다란 쇼핑몰에도 가봤다.
그리고 밤에는 활발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야시장에 가서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구경을 하기도 했다.
카일의 곁에 달라붙어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은 크게 즐거워했고 호위 역할을 하고 있는 여기사들도 중간부터는 꽤 즐기기 시작했다. 이 도시 안에서 사실상 호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서서히 자각한 후로는 발레리아도 그녀들을 적당히 풀어 주었다.
‘뭔가… 즐겁네, 이런 거.’
솔라니에서 여인들과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데이트를 하는 사이 카일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일상을 쭉 이어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마탑의 저력이 더 대단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존의 상하수도 시설이나 조명시설 등을 봐도 이 세계의 마법이 문명을 꽤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라니의 발전 정도는 더 대단했다.
지구로 치면 20세기 중반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정도의 문명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도시의 이동을 담당하는 경전철이나 고층빌딩, 심지어 연극을 영상으로 기록해 두고 상영하는 영화관 같은 것도 있었다.
‘이거면 내 생각보다 마탑의 마법을 활용할 여지가 더 크겠어.’
카일로서는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주인님 뭐 하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일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그냥 즐기는 게 우선이었다..
* * *
“하아아……. 죽겠다, 진짜.”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푸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푸념을 할 때 원인은 제각각인 법이다.
삶은 고뇌의 연속이며 다양한 시련과 관문이 인생에는 산재해 있는 법이다.
다만, 그래도 사람이 가장 높은 확률로 이런 말을 할 때는……
“돈도 없는데. 제길…….”
결국 돈 문제인 경우가 80% 이상이다.
이 푸념의 주인공 역시 그랬다.
연한 갈색 머리에 눈에는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는 마른 체형에 전형적인 샌님으로 보였다.
다만, 입고 있는 푸른색의 고급 로브를 입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남자는 마탑에 소속된 5서클의 인챈트 학파의 마법사인 것이다. 그의 나이가 아직 서른 중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5서클의 경지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어쩌면 사십 대에 6서클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나 전도유망한 젊은이도 지금 당장 돈에 쪼들린 현실 앞에서는 한 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름은 헤일로 고르초프.
성이 있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귀족 출신의 남자다.
그는 세비아 왕국의 백작 가문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가문을 이어받을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와 형들은 나이 차이도 제법 있어서 그가 열 살 때 큰 형은 이미 스물둘의 나이로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 자리가 물 건너간 귀족은 어려서부터 자립할 준비를 해야 했다. 기사든, 상인이든, 행정 관료든 간에 가문의 후원을 받으면서 미래를 준비해서 향후 독립을 해서 살아가는 것이 평범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마법사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세비아 왕국에서 마법사의 사회적 위치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다른 국가에 가도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지만 세비아 왕국 내에서는 고급 인력을 넘어서 귀족과 같은 상류층의 인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마탑이 세비아 왕국에 존재하면서 왕실과 강력한 연대를 맺고 있는 이상 당연한 것이었다.
즉, 마법사의 자질이 발견된 시점에서 그의 장래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헤일로는 바로 마탑에 들어갔고, 가문에서도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다. 헤일로가 마탑에서 성실하게 수련해서 마법사로서 대성하게 된다면 가문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본인의 재능과 가문의 지원, 그리고 마탑이라는 우수한 환경까지 갖춰진 결과 헤일로의 재능은 활짝 꽃을 피웠다.
그는 이십 대에 4서클 마법사가 되었고 삼십 대에 접어들어서는 5서클 마법사가 되었다. 가문에서는 헤일로가 6서클이 되는 날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인 작년. 고르초프 백작가가 망해 버렸다.
가문에서 손을 대고 있던 사업이 크게 적자를 봤고 영지에서 전염병이 돌아서 인구가 크게 줄어든 것이 원인이었다.
아버지와 형님은 쓰러진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가문의 재산의 상당부분을 몰수당했고 영지 역시 팔아 치워야 했다.
그럭저럭 잘 나가던 중견급 귀족 가문이었던 고르초프 백작가는 순식간에 작위만 남은 몰락 귀족이 된 것이다.
당연히 헤일로에게 주어지는 지원도 없었다.
오히려 가문에서는 헤일로에게 손을 벌릴 정도였다. 헤일로는 당황했다.
삼십 대 중반에 5서클 마법사라는 잘 나가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서 전폭저긴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그에게 돈은 버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었다. 거기다 낭비가 습관이 되어 있는 그는 가문이 망하고 나서도 절약을 하지 못했고 그나마 수중에 쥐고 있던 돈도 금방 사라졌다.
가문에 돈도 보내야 했고, 마탑에 회비도 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가 빚더미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헤일로는 초조하게 자기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제길, 어떻게 하지? 어디서 돈 좀 안 떨어지나…….”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린 인간이 하는 생각은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복권이나 도박 같은 걸로 일확천금을 얻어서 지금 상황을 타개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루어지지 않은 상상이 머릿속에서 끊이지를 않았다.
다만,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망상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대부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일…해야겠군.”
결국 돈이 부족하면 일해서 버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비록 그 방법이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하지만 일단 기본은 일해서 수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일확천금이나 투자를 이용한 대박 같은 추가 수입은 일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고급 인력이다. 이 세상에 5서클 마법사를 원하는 직장은 얼마든지 있었다.
헤일로는 로브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서 마탑의 채용 공고를 확인했다.
“전쟁터나 던전에 들어가는 건 질색인데, 어디 목숨 걸지 않고 일하면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은 없나?”
그렇게 채용 공고를 살피던 헤일로의 시선이 멈칫했다.
인챈트 마법사 4서클 이상 구함.
근무지 : 싱카라 연합 제국
월급 : 100골드 이상 (협상 가능)
1년치 최저 월급 1,200골드 선지급.
고용인―카일 (무직)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무직은 뭐야?”
이만한 보수를 보장하고 선지급까지 하는 재력가가 직업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어쨌든 조건은 좋네.’
월급 100골드면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선지급으로 1,200골드를 준다고 하니 지금 당장 마탑에 밀린 회비를 지불하고 가문에도 어느 정도 돈을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만나는 보자.”
면접을 본다고 하니 만나 보고 아니라면 그냥 박차고 일어나 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마탑에 당사자와 채용 주선을 부탁했다.
* * *
첫인상.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상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그 기준은 의외로 꽤 오랫동안 상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일을 처음으로 만난 헤일로는 생각했다.
‘재수 없는 새끼. 벼락이나 맞아라.’
“왜 그러시죠? 헤일로 씨?”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헤일로는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