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카일은 측근들을 모아서 회의를 열고 지금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싱카라 연합 제국으로 떠난다.”
설명을 들은 검은 바람이 카일에게 물었다.
“주인님. 그럼 우리는 스톰 클랜에 병합되는 겁니까?”
소속을 어디로 두느냐는 그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카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구두로 정해진 약속대로라면 빅토르 클랜장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고 나는 귀족의 작위를 받겠지.”
“저희들의 주인님은 계속 주인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검은 바람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일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간에 따를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카일이 누군가의 밑에 들어감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카일 이외에 다른 사람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은 싫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귀족이 되면 너희들과의 관계는 주군과 가신 정도가 되겠지. 발레리아, 너와 네 부하들에게는 기사 작위를 돌려줄 수도 있다.”
“주, 주인님. 그런…….”
발레리아는 순간 너무 황송해서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와 그녀의 부하들은 한때 기사라는 누구나 선망하는 고귀한 신분에 있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으로 취급당해 최악의 처지까지 떨어졌었다. 그런 자신들을 다시 재기시켜 준 것만 해도 이미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은혜였다.
그런데 기사 작위까지 돌려준다니…….
“…….”
발레리아는 순간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삼키며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별것 아닌 담담한 한 마디였지만 그 한 마디에는 그녀의 진심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가신들도 거기에 맞는 자리를 가지게 될 거다. 단, 그것은 우리가 무사히 싱카라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카일의 말에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카일을 따르는 클랜원의 총 숫자는 삼백 명이 넘는다.
거기다 카일의 저택을 관리하는 메이드와 클랜의 잡일을 하던 인원까지 더하면 사백 명이 넘는다. 이 정도 인원이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루트는 두 가지다 율리우스 왕국을 떠난 후 세비아 왕국을 거쳐서 싱카라 연합 제국에 도착하는 것. 다른 하나는 루마니스 제국을 통과해서 이동하는 것. 어느 쪽이든 힘든 여정이 될 거다.”
이 정도 인원인 국경을 넘어서 대륙의 절반 정도를 건너는 장거리 여행이다. 최단거리로 잡아도 두 달은 걸릴 것이다.
“이사에 필요한 준비는 어느 정도나 됐나?”
“거의 대부분 끝났습니다. 짐을 거의 다 꾸렸고 짐마차도 쉰 대 이상 구했습니다.”
“부족하다 짐마차는 백 대 이상 구해라.”
“예, 주인님.”
“그 밖에 여행에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최대한 비축해라.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카일과 부하들은 본격적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열흘 후.
“출발!”
카일과 부하들이 출발하는 소리가 아니다.
한 발 먼저 스톰 클랜이 싱카라 제국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총원 오천 명으로 알려져 있던 스톰 클랜이었지만 이번에 숫자를 더 불려서 거의 삼만에 가까운 숫자가 행렬을 이뤘다.
카일은 거기서 오웬을 배웅한다는 명목으로 참석했다.
“가시는 길에 조심 하십시오.”
“걱정 말게. 자네도 곧 따라오겠지?”
“예. 부동산의 정리만 끝나면 바로 나갈 겁니다.”
“잘됐군.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그리고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악수를 나눈 후 카일의 손에는 작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 쪽지를 확인 한 후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쁘지 않군.’
거기에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자작위 수여
―3년치 면세
―추가 조건은 공적에 따라 협상 가능
밑에는 빅토르의 사인까지 되어 있었다.
구두로 약속했던 내용이긴 하지만 더 상세해졌고, 무엇보다 서면으로 남겼다는 것이 더 신뢰를 주었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그 쪽지를 품안에 챙겼다.
한 달 후.
“이제야 끝났군.”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동산이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아서 정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역시 바이에른이 쇠락기에 접어들 거라는 조짐이 보이자 부동산의 가격은 폭락했고 잘 팔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찌어찌 정리를 다 했고 이제 터전을 옮기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주인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검은 바람의 보고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다. 출발한다.”
“예. 출발!”
150대의 짐마차에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카일이 바이에른을 떠났다.
이때가 대륙력 527년 11월.
카일이 처음에 바이에른에 온 것이 대륙력 522년 1월이었으니 거의 6년 만에 이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
멀어지는 도시를 보고 카일은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했습니다.”
* * *
싱카라 제국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나라 중에 하나를 반드시 지나야 했다.
루마니스 제국과 세비아 왕국.
둘 중에 더 가까운 루트는 루마니스 제국을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카일은 굳이 세비아 왕국 쪽을 통해서 가기로 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굳이 카일이 건국식에 맞춰서 서둘러 도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빅토르가 국가를 건국하면 가장 먼저 포상을 해야 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빅토르를 보필하고 따라온 스톰 클랜의 간부들이다. 그들은 건국식에서 작위를 받고 흔히 말하는 개국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큰 명예다.
개국공신이라는 단어는 귀족 사회에서 가장 선망받는 직책 중에 하나이며 가문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는 명예다.
그런데 카일이 건국식에 억지로 맞춰가서 거기서 작위를 받고 개국 공신의 자격을 얻는다?
굴러온 돌인 카일이 그렇게 튀는 행동을 하면 조직 내에서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카일이 빅토르가 세우는 나라에 등장하는 것은 건국식이 끝나고 나서 차후에 인재를 하나둘씩 모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것이 좋았다.
고로 일정을 서둘러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세비아 왕국에 용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마법사의 충원이다.
세비아 왕국이라고 하면 마도 왕국이라고 할 만큼 마법사 인재가 많은 곳이다.
말해서 뭐 할까?
마탑의 본부조차도 세비아 왕국에 존재할 정도다.
이제까지 카일은 마법사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써서 알아봤지만 노예 시장에서 마법사를 보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우연히 진주를 줍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성직자이면서 노예의 계약을 맺은 레이나만 해도 엄청나게 희귀한 케이스였다. 마법사는 죽을죄를 지어도 그냥 죽으면 죽었지 노예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탑에서 그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결국 카일은 이제까지 마법사 전력을 구할 수 없었다.
능력자 중에 몇 명이 특수한 능력에 눈을 뜬 덕분에 전투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카일이 하려고 하는 계획에는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러니 본고장의 마탑에 가서 마법사를 전력으로 구하려는 것이다.
노예는 아니다.
마탑에 정식으로 채용 공고를 내고 정규 루트로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일로서는 자기 밑에 노예 말고 일반인을 둔다는 건 큰 결심이었다.
계기는 빅토르였다.
‘어차피 빅토르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내 능력에 대한 보안이 계속 유지될 리는 없다.’
이제는 과거와 다르다.
설령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비밀의 보안 유지에만 주력하기보다는 그 힘을 더 키우는 것에 집중하는 게 현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마법사는 꼭 필요했다.
40일 후.
한 달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꾸준하게 이동하면서 카일의 일행은 드디어 첫 번째 목적지인 세비아 왕국 제2의 수도라고 불리는 솔라니에 도착했다.
“주인님. 성벽이 보입니다.”
“그래.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군.”
카일은 검은 바람의 보고를 받으며 미소 지었다.
장거리 여행이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린 여정이었다.
다행인 점은 몬스터나 도적들 따위가 귀찮게 달라붙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여행길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도적이나 몬스터의 습격이지만 카일의 여행길에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어떤 도적들이 수백 명 단위의 일행이 중무장을 하고 이동하고 있는데 시비를 걸겠는가? 거기다 몬스터들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으면 피해가기 마련이다.
던전 안의 몬스터들과 달리 던전 밖의 몬스터들은 경계심이 강해서 적이 강해 보이면 좀처럼 다가오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그래도 오랜 여행길이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잠자리도 불편했고 마차에 오래 타고 있는 것도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뭐, 훈련을 겸해서 하루에 반나절 이상씩 완전 무장을 하고 행군을 하는 병사들에 비하면 낫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편한 잠자리에서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았다.
다만 전원이 이 안에 다 들어갈 수는 없었다.
사백 명이 넘는 대인원이 모두 도시 안으로 들어갈 경우 막대한 통행세와 체류비가 나간다.
그리고 비용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도시에서 무장 병력 사백 명이 도시 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최대한 절충을 해 봐도 서른 명 정도가 한계일까?’
그 정도라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단에서도 통과할 수 있는 규모다.
“음, 도시로 들어갈 멤버는 우선…….”
카일이 말을 하자 몇몇 부하들이 눈을 반짝였다.
‘제발 나를 데리고 가주세요.’
‘주인님, 침대에서 자고 싶어요.’
‘주인님, 저요, 저.’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카일은 선택했다.
“우선,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 둘 중에 한 명은 여기 남아서 캠프를 지켜야 한다. 누가 남겠나?”
“제가 남겠습니다.”
검은 바람이 담담하게 나와서 말했고 발레리아는…….
“그럼 제가 주인님을 호위하겠습니다.”
순간 검은 바람이 발레리아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치사하게 이렇게 나오기냐?’
‘뭐? 자네가 먼저 남는다며?’
둘 사이에 약간의 아이 콘택트가 있었지만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말싸움을 하는 추태는 부리지 않았다.
“좋다. 그럼 발레리아, 아리시아, 레이나가 따라오고 발레리아 부하들 중에 다섯 명 정도만 뽑아서 데리고 와.”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호크.”
“예. 주인님.”
“애들 중에 아무도 열 명 정도 데리고 따라와라.”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호크는 빠르게 열 명의 부하들을 뽑았고 카일은 소수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솔라니에 들어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