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인상을 쓴 채 대답하지 못하는 빅토르에게 카일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국가가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지탱하는 주력 산업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싱카라 연합 제국에서 제안한 위치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나는 남쪽으로 향하는 바다를 인접하고 있다는 겁니다. 원래 대륙의 약소국이었던 베르나도 왕국을 강대국의 반열까지 끌어올린 건 남방대륙과의 해양 무역이죠. 바닷길이 열린다면 클랜장님도 남방대륙과의 무역에 참가할 여력이 생기는 겁니다.”
“남방대륙과의 무역이라……. 그건 성사되면 좋겠지만 해적들의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건 저한테 맡겨 주신다면 적절하게 처리를 해놓겠습니다.”
“호오… 자네가? 자신이 있단 말이지.”
“안 그러면 이런 말은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빅토르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남방대륙과의 무역은 굉장히 매력적인 건수이지만 100%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지.”
“그럴 수도 있죠. 저야 자신을 합니다만…….”
“다른 보험이 필요해. 이 자리에 내가 자리를 잡아야 하는 다른 이유가 말이야.”
“그건 아주 쉽죠. 바로 이 죽음의 사막입니다.”
카일은 지도에서 옅은 갈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을 가르쳤다.
죽음의 사막.
대륙의 서쪽을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사막은 그 누구도 횡단에 성공한 적이 없어서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린다.
이 광활한 사막은 그 면적도 상당히 넓어서 싱카라 연한 제국의 5분의 1정도에 달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밑에 있는 사이펀 왕국의 경우 국토의 절반 이상이 죽음의 사막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 아닌가? 누구도 살지 않고 누구도 돌보지 않는 모래뿐인 땅인데?”
“맞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죠. 그래서 이곳에 생성된 던전은 몇 개나 방치되어 있습니다.”
“던전이라고?”
“예. 실례지만 빅토르 클랜장님은 국가를 건국한 후에 부하 분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세운 공적에 따라서 적당한 작위를 주고 일반 클랜원들은 병사로 받아들이겠지.”
카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평생을 모험가로 던전 공략에만 집중해 온 부하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귀족이니 영지를 다스려라. 국책을 논해라… 라고 하면 잘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일반 클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정한 군기와 규율이 생명인 군대에 잘 적응할 지도 의문이고 설령 잘 적응한다고 해도 스톰 클랜의 클랜원을 일반 병사로 부린다? 그건 맞지 않죠? 도끼를 주방에서 식칼로 사용하는 격입니다.”
“…….”
빅토르는 차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카일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스톰 클랜의 모험가들이 가장 잘 하는 것은 바로 던전의 공략입니다. 모험가 길드에서도 관리하지 않는 미개발 던전을 탐색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마석을 국가에서 관리한다면 국책 사업으로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내 부하들 중에는 이미 귀족일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네. 그리고 오랫동안 나를 따라온 가신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이 필요해.”
“작위와 영지는 내리면 됩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작위를 가진 귀족이 된다고 해도 던전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흐음…….”
빅토르는 고심에 빠졌다. 그런 그에게 카일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좀 전에 제가 어떤 국가를 만들 건지 물었고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셨죠? 제가 조언을 하자면 클랜장님이 만드는 국가는 던전에서 나오는 마석의 산출을 근거로 해서 해양 무역과 상업을 발전시킨 국가가 어울릴 듯합니다.”
“그게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기 때문인가? 모험가와 상인들이 번성한 나라?”
“어디까지나 선택은 클랜장님의 몫입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하고 얌전하게 기다렸다.
“잠시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나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니야.”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카일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는 길에 빅토르가 말했다.
“카일.”
“…….”
“자네는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은 거겠지?”
“클랜장님과 한배를 타는 것이 가장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할 때까지는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렇군.”
카일이 나가고 빅토르의 입꼬리가 스윽 하고 올라갔다. 카일이 한 대답은 절대적인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쩐지 어지간한 인간들이 하는 입 발린 충성 맹세보다는 훨씬 더 신뢰가 갔다.
* * *
빅토르와의 만남 이후.
카일은 사업 전반에 대한 철수 작업을 더 서둘렀다.
“괜찮겠습니까? 지금 계약을 무효화하면 투자금의 손실이 심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감수하도록 하죠.”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일은 눈앞의 상인과 거래를 종결한다는 계약서를 쓰고 위약금도 지불한 후 돌려보냈다.
“다음 분 들어오라고 해.”
카일의 말에 밖에 있던 집사 파르트가 말했다.
“주인님. 방금 나가신 분인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이군.”
카일은 피곤한지 뒷목을 손으로 잡고 주무르며 말했다.
“차 한 잔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잠시 한숨 돌리고 있는 카일에게 레이나가 차를 들고 다가왔다.
“주인님. 여기 차 가져왔어요.”
“메이드들 시키지 않고 왜 네가 직접 가져왔어.”
“가끔은 직접 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레이나는 직접 시중을 들며 카일에게 차를 따랐다.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마신 후 카일은 작게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요즘 무슨 문제는 없어?”
“예. 전부 다 이사 갈 준비를 한다고 바쁘긴 한데, 그것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주인님. 우리는 어디로 옮기는 거죠?”
“알고 싶어?”
“예.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어요.”
카일은 그녀의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가슴 만지게 해주면 가르쳐 주지.”
보통 이러면 레이나는 얼굴을 붉히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따지고 말았다. 그런데…….
물컹.
카일은 자기 손바닥에 와 닿은 익숙하고 기분 좋은 감촉에 깜짝 놀랐다.
“레이나?”
“가, 가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안 그런 것 같은데?”
“어, 어어… 어차피 주인님이 다 보고 만지고 하신 거잖아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흐으음… 그래?”
카일은 양 손으로 레이나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이 만지작거리며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안에서 일그러지는 그녀의 가슴의 광경을 관찰했다.
주물럭주물럭, 몰캉몰캉, 출렁출렁―
옷 위로이긴 하지만 형태를 거의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레이나의 가슴은 풍만했다. 그 거대하고 부드러운 존재가 카일의 손길에 의해 형체를 일그러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카일의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은 실로 황홀해서 이대로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만 있어도 할 종일…….
“그만, 그만 만지세요.”
결국 레이나가 먼저 물러났다.
“아쉬워라.”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계속 만지시는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주인니이임!”
귀엽게 울상을 짓는 레이나를 보고 카일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품에 끌어서 안았다.
“장난 좀 쳐본거야.”
“너무해요.”
“너무한 건 레이나의 미모지. 너무 예쁘니까 내가 이런 장난도 치는 거 아니겠어?”
“저만 예뻐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리시아 씨나 발레리아 씨도 똑같이 예뻐하시면서……. 장난만 유독 저한테 치시죠!”
“레이나의 반응이 가장 좋거든.”
“다른 여기사 분들한테도 안 하잖아요?”
“걔들은… 장난을 걸면 오히려 달려들기 때문에…….”
“몇 분은 안아 주셨잖아요?”
“거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단다.”
카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름다운 여자 노예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린 카일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총애를 하고 살을 맞대는 건 주로 세 명이었다.
아리시아, 발레리아, 레이나.
여기서 여자를 더 늘릴 생각은 없다. 다만 아주 가끔 술에 취했을 때라던가, 다른 세 명이 모두 던전에 들어가서 아무도 없을 때라던가……. 그럴 때면 발레리아의 부하들인 전직 여기사들이 적극적으로 카일에게 다가왔다.
그녀들의 경우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해도 괜찮다고 허락을 했지만 오직 카일만을 바라보고 카일에게만 애정을 구했다. 다른 남자들은 벌레 보듯이 하는 게 보통이었고, 검은 바람이나 호크 정도 되면 그나마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과거에 남자들에게 지독한 짓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남자에 대한 기본적인 적대감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들을 구해 주고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준 카일만이 예외였다.
그래서 카일에게 파고들 기회만 있으면 항상 적극적으로 그 틈을 노렸다. 실제로 그중에 몇몇은 어찌어찌해서 성공하기도 했다.
카일에게 한 번이라도 안겨서 사랑을 받은 경우 다른 여기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어쨌든 주의해야지.”
“딱히 주인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닌데요.”
“아니, 이건 문제야. 다른 데 한눈팔지 못하게 너희들이 나를 꽉 잡고 있어 줘.”
“여기서 더요?”
“응. 더.”
카일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나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하는 동시에 그녀의 치마 속으로 서서히 손을 집어넣었다.
레이나도 부끄러워 하면서도 카일의 목에 부드러운 팔을 감고 호응했다.
그렇게 막 분위기가 뜨거워지려는 순간이었다.
“주인님, 편지가 왔습니다.”
“제길.”
집사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깨버렸다.
“크흠, 밤… 밤에 올게요.”
레이나는 급하게 옷을 여미며 방을 떠났다. 그리고 카일은 파르트가 가져 온 편지를 확인했다.
그 편지를 다 읽은 후 카일은 파르트에게 말했다.
“클랜 전원에게 전달해라.”
“예. 주인님.”
“우리는 싱카라로 간다.”
카일의 다음 정착지가 결정되었다.
* * *
싱카라 연합 제국.
대륙의 최강대국인 루마니스 제국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강대국으로 원래는 다섯 개 이상의 작은 왕국들이 힘을 합쳐서 연합을 해서 만든 제국이라고 했다.
황제를 뽑는 방식이 독특했는데 싱카라 연합 왕국에 소속된 아홉 국가의 국왕이 각자 투표를 해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이가 황제가 된다. 그 직위는 세습되지 않으면 선황제가 서거한 후에는 다시 투표로 다음 황제를 뽑는 방식이었다.
이 연합체의 나라에서 던전 공략자인 빅토르를 영입하기 위해서 제시한 땅은 싱카라 연합 제국의 남쪽 땅이었다.
하사한 땅의 절반 정도가 죽음의 사막이긴 했지만 그 크기는 상당히 넓었다. 무엇보다 빅토르가 정식으로 싱카라 연합 제국의 열 번째 왕이 됨으로 인해서 그에게도 제국의 황제를 뽑기 위한 투표권과 스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비록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물론 당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라고 빅토르가 받기로 한 토지에는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우선 남쪽에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사이펀 왕국과 그 보다 더 밑에 있는 게오르그 왕국. 이 두 나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최악의 막장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쪽으로 열리는 해로가 뻥 뚫려 있는 나라들이지만 해류가 험하고 베르나도 왕국보다 지리적으로 남대륙과 멀기 때문에 해양 무역이 발전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사이펀 왕국의 경우 국토의 절반 이상이 죽음의 사막이었다. 거기다 위쪽에는 강력한 싱카라 연합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발전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나라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선택한 업종이 바로 해적이었다.
먼 남방대륙까지 갈 항해술은 없었지만 가까운 연안을 따라서 서족으로 향하면 남대륙과 오가는 베르나도 왕국의 배들이 있다. 가는 길에 세비아 왕국의 연안을 약탈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사이펀 왕국과 게오르그 왕국은 해적질이 국가 산업으로 분류되는 야만적인 나라로 분류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남쪽 땅에 자리를 잡으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빅토르에게 그 야만적인 나라를 상대로 하는 국경 경비의 역할을 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장단점이 좀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카일은 빅토르에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추천했고 빅토르도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빅토르는 선택을 했고 이제 카일이 약속을 지켜야 할 시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