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어쨌든 성급하게 결정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아직 남은 재산을 다 처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카일은 그 사이에 차분하게 숙고해서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에 빠질 무렵, 누군가가 카일을 찾아왔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누군지 몰라도 중요한 사람이 아니면 돌아가라고 해.”
요즘 같은 시기에 카일에게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돈 빌려 달라는 사람 아니면 제발 계약을 철회하지 말라고 비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눈앞에서 징징거리는 소리를 듣는 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기에 만남을 일체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오웨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웬 씨가?”
카일의 중요한 연줄 중에 하나인 오웬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이지?’
보통은 사람을 보내서 만나자고 하는데 직접 찾아 온 것을 봐서는 보통 용건이 아닌 듯했다.
“응접실로 안내해.”
“예. 주인님.”
어쨌든 만나 봐야 알 일이었다.
카일은 복장을 바로하고 오웬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오웬 씨.”
“아니, 별로 기다리지 않았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오웬의 얼굴은 몹시 밝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제길, 그래 당신들은 좋겠지.’
지금 스톰 클랜은 던전 공략이라는 대위업을 세웠다.
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최종적인 보상이 무엇인지 몰라도 어마어마할 것은 분명했으며 그로 인해서 얻게 될 명예와 재화 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대박으로 인해서 바이에른 전체의 경기는 매일같이 하한가를 경신하고 있는 지경이지만 말이다.
카일 역시 그로 인한 피해자 중에 하나다.
“축하드립니다. 스톰 클랜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설마 던전 공략이라는 대위업을 성공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속으로는 다소 투덜거릴지 몰라도 여기서 ‘왜 던전 공략해서 내 인생 플랜을 꼬이게 하고 그래? 세상 당신들 혼자만 사냐고? 엉?’ 이라고 따질 정도로 바보 천치는 아니다.
오웬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카일에게 말했다.
“뭐, 나야 별것 안했지. 우리 클랜의 간부들과 클랜장님이 다 했는걸 말이야.”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스톰 클랜의 향후 방침은 정해졌습니까? 여기저기서 굉장한 제의가 많이 들어올 듯하던걸요?”
카일은 은근슬쩍 스톰 클랜의 향후 계획을 떠봤다. 그러자 오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한테 숨길 일은 아니지. 뭐, 클랜장님에게 여기저기서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나 봐. 왕국의 공작부터 제국의 제후까지 공주와 결혼해서 사위가 되면 왕위 계승권을 준다는 왕국도 있더군.”
“대단하군요. 그러고 보니 이전의 던전 공략자도 자기 스스로 국가를 건국했었죠?”
“그래. 던전을 공략하고 얻은 재보를 이용해서 국가를 세웠지. 사실 우리 클랜장님도 그런 쪽으로 결심을 굳히신 모양이야.”
“오오오… 대단하군요. 이 대륙에 새로운 신생 국가가 생기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나는 아마 그 신생 국가에서 귀족 작위를 받겠지.”
“축하드립니다.”
“그래. 뭐, 그런데 문제가 있어.”
“말씀하십시오.”
“내가 다른 파티장들보다 더 많은 돈을 클랜에 납부하고 공헌치가 높지 않나? 그래서 간부들이 내가 어디서 그런 돈이 났는지 물어 봤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뭐, 별 수가 있나? 간부들에게 거짓을 고할 배짱은 없고 해서 사실대로 말했지. 자네에게 후원을 받고 있다고 말이야.”
“…그러셨군요.”
카일은 입맛이 좀 썼다.
‘너무 많이 뿌렸나?’
오웬과의 인연을 관리하기 위해서 카일은 그에게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이름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써먹으면서 뿌린 것 이상의 자금을 회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카일이 지원한 금액은 스톰 클랜의 파티장 한 명에게 들어가기에는 꽤 많은 금액이었다. 그렇게 튀는 흔적을 남기면 결국 윗사람에게 눈길을 받기 마련이었다.
“클랜의 간부들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간부들은 별말 안 했네.”
“다행이군요.”
그냥 돈 많이 낸 졸부 정도로 취급하고 넘어가 준다면 그게 최고긴 했다. 카일도 가능하면 스톰 클랜의 간부 같은 거물들하고 엮이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간부들은 별말을 안 했는데 클랜장님이 자네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
“…누가요?”
“클랜장님이 말일세.”
“저를 말씀이죠?”
“그렇지.”
“하아아아…….”
카일은 맨손을 얼굴에 가져가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물들 눈에 띄는 거 완전 별론데.’
그런 카일에게 오웬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입장에서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내 얼굴을 봐서 한 번 만나 보지 않겠나?”
오웬은 부탁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건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다.
던전 공략자의 칭호까지 얻은 스톰 클랜의 클랜장이 호출을 한다고 하는데 생 까고 가지 않는다?
‘그랬다가 뒤에서 앙심이라도 품으면 감당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이건 갈 수밖에 없는 통보였다.
카일은 아직 스톰 클랜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힘과 배짱은 없었다.
잠시 후.
카일은 마차를 타고 스톰 클랜의 본부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스톰 클랜의 본부였다. 이곳은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거기 조심해.”
“든다. 하나 둘 셋!”
“석재는 동쪽으로 쌓아 두라고 했잖아?”
스톰 클랜은 이미 본부의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쪽도 떠날 준비가 한창이군.’
하긴 던전을 공략한 스톰 클랜의 입장에서 이제 바이에른에 남아 있는 용무는 없을 것이다.
떠나는 것은 당연했다.
“카일, 이쪽이야. 날 따라오게.”
“예. 알겠습니다.”
카일은 오웬을 따라서 길드의 본부에서도 가장 안쪽에 지어져 있는 커다란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경비를 서는 인물들이 보였는데 그들 하나하나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최소한 익스퍼트 중급 이상?’
아직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카일로서는 경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를 비롯해서 많은 익스퍼트를 구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는 안목이 생기긴 했다.
‘그냥 저택의 경비병들만 데리고 가도 실버 팽 정도는 씹어 먹겠군.’
그리고 오웬을 따라서 안내된 곳은 어딘가의 방안이었다.
“클랜장님. 오웬입니다.”
“들어와라.”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고 오웬이 안으로 들어갔다.
“12번 파티장 오웬 입실했습니다. 크흠, 이쪽은 명령하셨던 모험가 카일입니다. 화이트 울프라는 클랜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오웬의 소개에 의해 카일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카일입니다.”
“그렇군.”
그가 일어서서 카일에게 다가왔다.
연한 갈색 머리에 카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체격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당당함.
‘이 사람이 바로…….’
“만나서 반갑네. 내가 스톰 클랜의 클랜장을 맡고 있는 빅토르일세.”
이 남자가 바로 스톰 클랜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며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던전 공략자. 실로 영웅이라고 불리기에 어색하지 않은 공적을 세운 모험가인 것이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카일은 반쯤은 예의로, 반쯤은 진심을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자가 세운 공적은 같은 충분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위업이었다.
“하하하! 일단 자리에 앉지.”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카일에게 자기를 권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뭐라도 마시겠나?”
“뭐든 주신다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커피 두 잔 가져오게.”
“예. 알겠습니다.”
시녀를 부를줄 알았던 카일이지만 빅토르는 카일을 데리고 온 오웬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웬 역시 군기가 가득든 목소리로 두 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저 남자도 밖에 나가면 누구한테도 꿀리는 소리 안 하는 사람인데…….’
사소한 행동이긴 하지만 이것만 봐도 빅토르라는 남자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게 무형적인 힘이든 실질적인 힘이든 말이다.
차가 나오고 오웬은 자연스럽게 방을 나갔다. 그리고 카일과 단 둘이 되자 빅토르가 말했다.
“불쾌할지 모르겠지만 자네에 관해서 뒷조사를 좀 해봤네.”
“그러시군요.”
카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카일의 뒷조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 바이에른에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바이에른에 오기 전의 행적이 전무에 가까우며 클랜의 동료들로는 오직 노예로만 구성해서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 카일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은 힘들었다.
‘아무리 스톰 클랜이라고 해도 별로 중요한 것은 알아낼 수 없었겠지.’
“루트비안 자작이 시녀와 동침해서 태어난 서자. 사실상 없는 자식처럼 자랐고 16세가 되자마자 독립했군. 그 후에 바로 바이에른에 와서 모험가로 활동을 시작했지. 혹시 틀린 것 있나?”
빅토르는 시작부터 폭탄을 던졌다.
“…….”
입을 살짝 벌리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카일에게 빅토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는 모양이군. 그 후에는 지금 자네의 오른팔이 되는 검은 바람이라는 투란족 노예를 구입했지. 흠, 구매가가 실로 파격적이야 단돈 1골드라니… 말이야.”
“…….”
카일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 후에도 폐기장에서 아리시아와 발레리아라는 우수한 노예를 구입했더군. 레이나라는 중급 수녀는 멀리서 구입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환경의 폐기 노예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맞나?”
“…대충 그런 셈이죠.”
카일은 경계 속에서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생각했다.
‘검은 바람, 아리시아, 발레리아의 구입 경로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레이나는 잘 모른다. 이건 그의 정보망이 바이에른에 집중되어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내 출신을 안다는 건 율리우스 왕국 전체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 어느 쪽이든 외국에서 구입한 레이나의 사정까지는 모른다는거군.’
스톰 클랜의 정보망이 카일의 예상 이상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외국까지 뻗어 나갈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카일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그동안 스톰 클랜에 미움 받거나 책망받을 행동을 한 적 있는지 생각해 봤다.
‘다행이도 그런 적은 없군.’
적어도 이 남자에게 당장 적으로 간주될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는 말이다.
‘후우우우… 각오를 굳히자.’
카일은 자신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바꿨다.
여기는 호랑이 굴이다.
그렇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무사히 나가던가, 아니면 호랑이 등에 올라타던가. 어느 쪽으로 결정하던 말이다.
“내 생각에 자네는 폐기 상태까지 떨어진 노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듯하군. 맞나?”
“예. 제 고유 능력입니다.”
“호오오… 고유 능력이라고? 마법이나 신성력 같은 수단이 아니라?”
“예. 저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능력입니다.”
“…….”
카일이 이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자기 능력을 밝혔다.
이미 상대가 짐작을 하고 있는 이상 이걸 숨기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밝히고 거래에 나서자는 것이 카일의 생각이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카일이 오히려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러자 빅토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큭큭… 아니, 없네. 문제가 있을 리 없지.”
“그럼 다행이군요.”
“그런데 내가 이 사실을 세상에 밝히면 어쩔 텐가? 좀 시끄럽고 귀찮아지지 않겠나?”
“그렇군요. 그럼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맨입으로.”
“뭐, 원하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지불할 생각이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생각해 보죠.”
“하하하하하하하!”
빅토르는 크게 웃었다.
그는 그대로 한참을 웃다가 말했다.
“좋군. 아주 좋아. 상대가 약점을 잡아도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약점이 아니다 이건가?”
“…….”
“자네 나이가 지금 21세지?”
“잘 아시는군요.”
“그래. 내가 자네 나이 때는 지금 같은 당당함은 없었지. 그저 망해버린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일념에만 미쳐서 냉정하지를 못했지. 아쉬워. 덕분에 먼 길을 돌아와야 했으니 말이야.”
“실례지만 빅토르 클랜장님이 돌아온 ‘먼 길’은 모든 모험가들이 바라는 꿈과 같은 여정 그 자체입니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 이건가?”
“그렇게 들으셔도 무방합니다.”
“크크큭… 배짱도 좋군. 점점 마음에 들어.”
빅토르는 카일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둘러말할 필요도 없어 보이니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자네가 욕심이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