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카일과 화이트 울프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조금 바뀌었다.
이제까지 카일은 돈 버는 재주가 탁월하고 운이 좋을 뿐인 벼락출세한 모험가라는 평가가 강했다.
대외적으로 카일 스스로가 엄청난 실력자가 아닐뿐더러 자신을 제외한 모든 클랜원이 노예라는 특수성 등등의 이유로 카일은 정상적인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남몰래 경멸과 무시의 대상으로 씹히고 있었다.
하지만 실버 팽 클랜을 쳐부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최근 기울고 있기는 했지만 실버 팽이라고 하면 한때 바이에른을 주름 잡던 실력 있는 클랜이었다. 그런 클랜과 전쟁을 해서, 그것도 기습을 당한 불리한 상황에서 오히려 역습을 해서 상대를 전멸시켰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을 뜻한다.
화이트 울프의 전력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 말이다.
사람들 중에서는 화이트 울프를 바이에른의 클랜들 사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한마디로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모험가로서 위상이 높아진 화이트 울프에 가입하기 위해서 많은 모험가들이 문의를 했지만 카일은 모두 거절했다. 그 대신 클랜 본부를 증축하고 빌 존스에게 말해서 다시 한번 대규모 노예를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모든 클랜원을 노예로만 채우려고 하는 카일의 행동은 기행에 가까웠지만 딱히 불법도 뭐도 아니었기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노예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지불해야 하는 세금이 커지다 보니 도시에서는 카일의 이런 결정을 반기기까지 했다.
바이에른 안에서도 노예의 보유세로 카일이 내는 세금의 금액을 상당한 액수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카일은 종종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도시나 신전에 헌금을 내기도 했다. 좋은 일에 사용하라는 목적으로 내는 돈이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정치적인 뇌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돈과 정치력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카일은 바이에른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순조롭군.”
“뭐가요?”
카일은 자기 옆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아리시아를 보고 말했다.
“모든 게 말이야.”
카일은 아리시아의 하얀 피부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풍족한 생활과 타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위치와 무력. 지금 카일은 지난 생부터 지금까지 간절하게 원했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카일은 아리시아를 끌어 당겨서 품에 안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지금에서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내가 행복한 인생을 구가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런 카일에게 아리시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주인님.”
그저 이런 순간들이 영원히 계속 되기만을 바랐다.
* * *
인생이라는 것은 그리 쉽사리 완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고 해도 여기저기서 고난과 역경이라는 이름의 방해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특별히 불합리하거나 한 것이 아니고 그게 보통이다.
행운이 따르는 만큼 불행도 따르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인생이다.
카일의 경우도 그랬다.
여러 가지 시련이 따랐지만 그래도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행동력으로 모두 극복해냈을 뿐이다.
그리고 누가 봐도 부러워 할 만한 성공을 거뒀다.
대륙력 527년 카일의 나이가 21세에 그는 이미 성공한 인생의 승자가 되었다.
다만, 그런 카일의 이른 성공을 시기한 걸까?
카일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재난이 닥쳤다.
그것은 대륙력 527년 9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클랜의 사무실에서 서류를 살피고 있던 카일은 지면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드드드드드드―
“지진?”
처음에는 제법 지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지면이 흔들리는 지진이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느낌이 강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건?”
약 2분 정도 지속된 지진은 그 후에 멈췄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검은 바람이 황급하게 카일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난 괜찮다. 클랜의 다른 시설의 피해는?”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 여진에 주의하고 부상자가 있을지 모르니 인원 체크를 서둘러라.”
“예. 알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카일은 이게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작은 지진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 지진은 카일의 입장에서는 천재지변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 * *
“뭐? 뭐라고?”
카일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무슨 일이 있었다고?”
카일의 질문에 발레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스톰 클랜이 던전의 최하층을 공략하고 던전의 보스를 죽이고 던전 코어를 회수했다고 합니다. 즉… 바이에른의 던전이 공략되었습니다.”
“던전이 공략되었다고? 그렇다면 진짜?”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아아…….”
카일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왔다.
바이에른에 던전이 발견된 것은 수백 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모험가들이 던전을 탐색했지만 던전은 그 끝을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사실상 공략은 불가능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이에른의 던전은 그 규모와 난이도가 남달랐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굳건하게 버티던 그 난공불락의 던전이 공략된 것이다. 스톰 클랜이라는 바이에른 최고의 클랜에게 말이다.
“스톰 클랜……. 진짜 어마어마하군.”
카일은 드물게도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카일에게 옆에 있던 검은 바람이 말했다.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라…….”
카일은 생각했다.
‘이건 진짜 전혀 생각도 못 한 상황인데.’
여러 가지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이 공략된다는 어이없는 사태는 생각도 못 했다.
바이에른의 던전이 공략되었다는 말은 이제 이 도시에는 던전이 없다는 말이다.
던전에서 나오는 코어와 그 코어를 채취하는 모험가들을 대상으로 해서 발전한 도시인데 던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인구가 줄고, 돈이 줄고, 도시가 쇠퇴하는 건 피할 수가 없겠지.’
대부분의 지지기반을 바이에른에 두고 있는 카일로서는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일단…….”
생각이 복잡했지만 카일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부터 했다.
“찰리 씨를 불러서 우리 클랜이 소유하고 있는 바이에른의 부동산부터 다 처분해 버려.”
가장 확실하게 떨어질게 분명한 부동산부터 처분하기로 했다.
‘그걸로 끝날 일은 아니지만 일단, 상황을 좀 지켜보자.’
던전 공략자.
그것은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드래곤 슬레이어에 버금가는 명예 중에 명예다.
스톰 클랜의 클랜장은 그것을 이룩했다.
그의 이름은 틀림없이 역사에 남을 것이 분명했으며 전 대륙의 강대국들이 그를 초빙하기 위해서 돈과 보물, 작위와 공주 등을 싸들고 달려들 것이다.
이전에 던전 공략자는 아예 스스로 국가를 설립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대단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던전 덕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바이에른의 입장에서는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던전이 공략되면 던전의 몬스터들이 나오지 않고, 던전 그 자체도 점점 사라져 간다. 당연히 몬스터의 코어도 산출되지 않는다.
이미 눈치가 빠른 모험가들은 바이에른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개인이나 소규모 파티라면 몰라도 규모가 큰 클랜의 경우는 옮기는 것도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덩치가 큰 만큼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카일의 경우 얽혀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곤란할 정도였다.
상단에 투자한 자금도 회수해야 했고, 클랜에서 사용하는 식량과 생필품에 대한 장기 계약을 맺은 상인들과의 계약도 손을 봐야 했다. 상당한 금액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겠지만 이럴 경우 손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카일도 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침체기에 빠진 바이에른에 터를 잡고 있어 봐야 손해만 더 커질 뿐이니 말이다.
다만 여기저기 뻗어 놓은 일이 한 둘이 아니라서 이걸 다 정리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뿐 아니라, 떠난다고 해도 어디로 떠나서 어떻게 자리를 잡을지도 생각해 봐야 했다.
“생각해 보면 선택의 여지가 많은 편이긴 해. 열여섯 살 때에 비하면 그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열여섯에 카일이 처음에 바이에른에 왔을 때는 진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중에는 단돈 13골드뿐인 소년이 어떻게든 성공하기 위해서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 던전이 있는 바이에른에 온 것이었다.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해봤지만 자수성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일은 다르다.
화이트 울프라는 대형 클랜의 클랜장이 되고 이번에 손실을 좀 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많은 재산과 무력을 갖추고 있다.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말이다.
“어디 보자. 대강 선택지를 골라 보면…….”
카일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펜을 꺼내서 종이 위에 자신의 향후 진로를 적어 봤다.
1. 던전이 있는 다른 도시로 가서 모험가를 계속 한다.
2. 용병업으로 업종을 변경해서 용병단을 만든다.
3. 상인으로 진로를 수정해서 상단을 만든다.
4.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가서 돈으로 작위와 영지를 사서 유유자적하게 산다.
이 정도가 대강의 선택지로 보였다.
지금 카일의 여건이 풍족하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것이다.
“고르기 어렵군. 전부 장단점이 있으니…….”
우선 1번의 경우 이미 하고 있는 익숙한 일이니 부하들이 적응하기는 쉬울 것이다.
다만 던전이 있는 다른 도시에 가서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분명 텃새와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소규모 파티나 개인 모험가라면 상관없겠지만 대규모 클랜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기존의 터줏대감들과 반드시 마찰이 일어날 것이다.
2번의 경우 다른 용병단과의 마찰은 적을 것이다. 용병업계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이니 말이다. 대형 클랜들이 용병업계에 곁다리를 걸치고 활동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다만, 그만큼 용병일은 위험도가 더 높다.
용병업계가 만성적으로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용병의 사망률이 모험가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주 직업인 모험가들은 본인이 욕심을 내서 무리하지 않으면 꽤 안정적으로 싸울 수 있다.
다만, 용병의 상대는 같은 사람이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게 주 임무인 용병단은 사망자가 꾸준히 나올 수밖에 없다.
‘애들 키우는데 공들인 걸 생각하면 전쟁터에서 갈아 버리는 건 비효율적이지.’
그리고 3번.
실제로 지금 카일은 여러 상단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왜 당신이 상인을 안 하고 모험가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역정을 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카일 스스로도 자신이 상인으로 전업을 하면 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그동안 상단에 여러 번 투자를 하면서 자신에게 돈을 벌어들이는 재능이 있다는 것은 확인을 했다. 게다가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사업 아이템도 여러 개 있었다.
다만 상인으로 갈아타면 지금까지 키운 노예들의 전투력이 아쉽다.
상단의 호위 전력으로 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좀 과한 수준의 병력이지.’
지금 카일이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귀족의 영지와 정면으로 붙어도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 화이트 울프의 전력을 상단의 호위로만 썩히는 것은 좀 내키지 않았다.
“그럼 4번인가? 이게 가장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다른 외국에 가서 작위와 영지를 사서 귀족이 된다.
지금 카일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일이다.
클랜원들은 병사로 이직시키면 되고 귀족이 되면 상단 한두 개 운영하는 것 정도는 특별할 것도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귀족 작위를 가지고 상단을 운영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도 크다.
다만, 카일이 만족할 만큼의 영지와 작위를 받기에는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좀 부족하다.
전 재산을 탈탈 털면 그럭저럭 괜찮은 영지를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카일의 방식이 아니다.
자고로 투자는 분산 투자.
절대 한 바구니에 계란을 다 담는 방식은 하지 않았다.
영지를 구입한다고 해도 그 후에 어떤 트러블이 일어날지 모르고, 또 잘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영지와 작위를 구입하기에 사용할 자금은 최대치로 잡아도 카일의 전 재산의 50%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럼 절충안으로 1, 2, 3번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좀 더 자금을 모은 다음에 최종적으로 4번을 선택한다. …이게 가장 현실적인가?”
카일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뭔가 좀 비효율적인 느낌도 들었다. 최단거리가 있는데 굳이 빙 돌아가야 해서 불편한 느낌이랄까?
“더 좋은 방법이 있을 듯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