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발레리아는 솔론의 뒤편에 숨어 있는 아렉스를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먼저 시비를 건 주제에 부하들을 내 버려두고 클랜장만 도망가는 건 너무 추잡하지 않나?”
“크윽…….”
뼈를 때리는 발레리아의 말에 아렉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하지만 아렉스가 뭐라고 하기 전에 솔론이 검을 들고 나서며 말했다.
“비켜라. 안 그러면 죽인다.”
그 모습에 발레리아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솔론이지? 익스퍼트 최상급에 모험가 경력은 25년 베테랑. 사실상 지금 실버 팽 클랜에서 제대로 된 전력은 당신 하나뿐이고 말이야.”
‘이미 정보전에서도 지고 있었던 건가?’
실버 팽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발레리아의 말에 솔론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말하지. 비켜라.”
“한 번만 말하지. 우리 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나?”
“맹세컨대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찢어 죽여버리겠다.”
“주인님이 말씀 하시기를 지금 실버 팽에서 탐나는 인재는 당신 정도라고 하더군.”
두 사람의 대화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좋다. 죽여주마.”
“뭐,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러나 결국 결론은 같은 곳으로 도달했다.
발레리아가 검을 들어 올렸고 솔론은 자신의 검을 횡으로 비스듬하게 잡았다. 이를 빠득빠득 갈며 분노했던 솔론이었지만 자세를 잡은 그 순간에는 분노가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파문 하나 없는 잔잔한 연못과 같은 진중한 기세가 풍겼다.
‘확실히 대단해. 마음을 완벽하게 다스리는군.’
발레리아는 그런 솔론의 모습에 은은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솔론은 발레리아를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전체적인 전력이 열세인 지금 상황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면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하압!”
우우우우우웅!
과연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할까?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강자답게 웅장하고 거대한 오러가 검에 맺혔다.
롱 소드의 다섯 배가 넘는 길이까지 뻗어 간 오러에 발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단하군.”
발레리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 역시 열심히 수련을 거듭했고 지금은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솔론은 그런 자신보다 명백하게 수준이 높은 검사였다.
검사로서는 말이다.
‘죽이는 게 아까울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며 발레리아는 검을 들어 올렸다.
“…….”
“…….”
두 사람은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대치했다.
그러다 바람이 불었고 날아온 낙엽 하나가 발레리아의 오른쪽 눈을 가렸다.
‘지금이다.’
아주 짧은 빈틈이었지만 고수의 사이에서는 목숨을 취하기에 충분한 빈틈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솔론의 몸이 움직였다.
그의 검이 빛살이 되어서 발레리아의 잘록한 허리를 가르려고 했다.
“헛?!”
솔론은 경악했다.
분명 자신이 먼저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아가 더 먼저 자신에게 닿아온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정수리를 쪼개기 위해서 떨어지는 발레리아의 검은 자신의 검보다 훨씬 빨랐다.
‘큿…….’
하지만 솔론도 무수한 사선을 넘으면서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전사였다. 그는 황급하게 검의 궤도를 수습해서 발레리아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상대의 속도가 소름 끼치게 빠르기는 했지만 이렇게 속도에 특화된 공격이라면 위력은 가벼울 것이라는 계산적인 생각보다는 무수한 실전을 거치면서 몸에 새겨진 경험치가 그를 반응하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힌 순간.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승부의 결과가 나왔다.
발레리아는 검을 내려친 상태였고 솔론은 그녀의 검을 막으려는 자세 그대로 자세가 굳어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웅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던 그의 롱 소드가 반토막이 나 있다는 것과 발레리아의 브로드 소드가 그의 사타구니를 지나서 지면까지 깊숙하게 박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쩍… 쩌적…….
솔론의 몸이 정수리부터 서서히 갈라지려고 했다. 죽음을 직감한 솔론은 마지막으로 발레리아의 일격에 대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 의문을 품었다.
그녀의 검은 속도를 중시한 검이 아니었던가?
자신보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닿은 그 속도는 틀림없이 속도 위주의 검사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직접 검이 닿은 순간 그가 느낀 감상은…….
“무, 무거…워.”
촤아아악.
그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솔론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솔론의 감상에 발레리아는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숙녀에게 실례지.”
“부, 부클랜장님이 죽었다.”
“제길, 이건 말도 안 돼.”
“도… 도망가! 모두 도망가!”
솔론의 죽음은 가뜩이나 열세였던 실버 팽의 완벽한 패배를 의미했다.
클랜장인 아렉스가 실력도 인망도 부족해서 클랜을 말아 먹었지만 그래도 실버 팽이 어느 정도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실력과 인망을 모두 갖춘 이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솔론이었다.
솔직히 실버 팽의 클래원들에게 있어서 솔론의 죽음은 아렉스가 죽는 것보다 더 큰 재난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가는 모습은 정예라기보다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유감스럽지만 화이트 울프 측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전투의 목적은 승리가 아닌 섬멸이었다.
삐이이이익!
누군가가 피리를 불러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화이트 울프의 클랜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1,2기생으로 이뤄진 일반 클랜원 백 명.
투란 전사 백 명.
그리고 아리시아가 이끄는 궁수대 쉰 명까지 모두 나타났다.
특히 검은 바람이 이끌고 있는 투란전사들은 말을 타고 있었다. 도망가는 적을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서 기동력까지 갖춘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런 병력이 어디서 갑자기?”
아렉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들이 먼저 위치를 선점해서 매복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역으로 매복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적이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매복을 주비하는 단계에서 이미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현실 앞에서 아렉스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새롭게 나타난 포위망 속에서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군. 아렉스.”
“너는… 카일?”
아렉스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카일은 여기사 출신의 노예들의 보호 속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매복을 하는 입장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원진 안에서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카일의 모습도 보였다.
“왜 그러지? 내가 두 사람이라서 신기한가?”
“너…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궁금한가 보지?”
아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렉스에게 카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궁금한 채로 죽어라.”
죽을 사람 소원을 들어주는 취미는 없는 카일이었다. 그리고 카일이 손을 내리며 지시했다.
“쓸어버려라!”
“옛! 전원 공격!”
검은 바람의 공격 명령과 함께 사방에서 화이트 울프의 공격이 이어졌다.
“우오오오오!”
“우리 애들 건드린 대가다.”
“다 죽여주마!”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 * *
전투는 일방적으로 종결되었다.
이미 전의를 잃고 도망가기 바쁜 실버 팽을 쓸어버리는 것은 사실 전투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중간에 항복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카일은 생존자를 남겨 두지 않았다.
전투가 끝난 후 검은 바람이 카일에게 다가와서 절도 있는 모습으로 보고했다.
“전부 다 처리했습니다. 주인님.”
“놓친 놈은 없겠지?”
“세피로스의 능력으로 주변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도망간 놈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됐다.”
세피로스는 레이븐과 마찬가지로 카일 직속의 특수 부대 소속의 노예다. 그녀의 능력은 무언가를 몰래 감시하는 것에 몹시 특화되어 있었다.
카일이 실버 팽의 내부 사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딱 좋은 타이밍에 유인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도 세피로스가 내부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보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전투에서는 알게 모르게 카일 직속의 특수 부대가 제 역할을 많이 했다.
매복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레이븐이 투명화 능력으로 아군을 숨겨 주었기 때문에 뒤를 완벽하게 잡을 수 있었다.
세피로스는 계속 정보를 전달해 주었고, 섬멸전 당시에는 사방에 감시망을 펼쳐서 그 누구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발레리아와 함께 행동한 가짜 카일의 경우…….
“노페이스, 이리 와라.”
“예. 주인님.”
카일의 부름에 대답하며 다가온 것은 발레리아들이 호위하던 가짜 카일, 노페이스였다.
카일은 그의 앞에 쓰러진 솔론의 시체를 보여 주며 말했다.
“할 수 있겠나?”
“예. 물론입니다.”
그리고 노페이스는 솔론의 시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전신이 꿀렁거리면서 그 형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노페이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솔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솔론의 초능력이 아니다. 그의 종족 특성이다.
노페이스의 종족은 도플갱어.
타인을 죽이고 그 모습을 훔칠 수 있다는 마족의 한 종류다.
원래는 서커스에서 구경거리로 살다가 폐기장까지 흘러 들어갔는데, 그 후에는 다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카일에게 구원받고 능력을 각성했다.
원래 도플갱어가 훔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라서 원래의 사람과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바로 정체를 들키기 쉽다. 하지만 노페이스는 다르다.
“어때? 뭐 좋은 정보가 있나?”
“예. 클랜은 망해가고 있었지만 개인 금고에 빼돌려 놓은 자산이 있습니다.”
“호오? 그래. 나쁜 놈이었군.”
노페이스가 각성한 능력은 싸이코 메트리.
사물이나 사람과 접촉함으로서 그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이로써 노페이스는 상대의 외모를 흉내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억까지 완벽하게 파악해서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노페이스도 이 능력을 살려서 실버 팽에 잠입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다 카일이 다른 방면으로 써먹기 위해서 빼낸 것이다.
“사전에 말했던 대로 처리해라. 할 수 있겠지?”
“예. 주인님.”
아렉스의 모습을 한 노페이스는 처절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위장한 상태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살… 살려 줘. 사람 살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싸움에 지고 도망가는 아렉스 그 자체였다.
* * *
며칠 후, 바이에른의 모험가 사회를 강타하는 뉴스가 벌어졌다.
실버 팽 클랜과 화이트 울프 클랜의 전쟁.
수십 년 전에는 클랜 간의 전쟁이라는 것이 종종 발발했다. 하지만 스톰 클랜이 바이에른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어느 정도 클랜 간의 서열이 잡혀서 함부로 전쟁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벌어진 실버 팽과 화이트 울프의 전쟁은 모험가들의 이목이 집중되기에 충분한 빅 이슈였다.
게다가 드러난 결과는 화이트 울프의 압승이었다.
실버 팽은 화이트 울프의 클랜장 카일을 도시 외곽에서 기습했지만 오히려 역습을 당해서 공격했던 클랜원이 전멸당하고 자신만 목숨을 건져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실버 팽의 부클랜장이 질풍의 솔론마저 죽고 말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결과였다.
간신히 살아서 돌아온 아렉스는 즉시 길드를 찾아가서 모든 잘못을 인정할 테니 부디 살려만 달라고 빌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길드에서는 카일에게 이만 멈출 것을 제안했고 카일은 어느 정도의 위약금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길드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사실 어느 정도의 위약금이 오갔는지는 대외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라는 것이 모두의 예상이었다.
그렇게 되자 실버 팽에게 대금을 받지 못하고 돈을 빌려준 상인들이 애가 달았다. 이대로 가면 자신들이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빨리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최대한 빠르게 법적 조치를 밟으면서 공식적인 차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뭐라고? 죽었다고?”
“예.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맨 상태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런 무책임한 새끼를 봤나?!”
상인들에게 들린 것은 실버 팽 클랜의 클랜장인 아렉스가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클랜 간의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빚을 진, 모험가로서 재기하기는 불가능한 상태의 아렉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어떻게 보면 타당했다.
문제는 받아야 할 돈이 있는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급하게 실버 팽의 본부에 찾아갔다.
이제 돈을 받기 위해서 클랜 소유의 건물이나 토지 같은 부동산부터 시작해서 내부의 시설과 공용 장비까지…….
한마디로 돈 될 만한 건 다 차입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있는 것을 다 처분한다고 해도 빚을 다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 했다.
클랜의 남은 재산 상당수가 카일의 화이트 울프 쪽으로 넘어간 후였기 때문이다.
화가 난 상인들은 카일을 찾아가서 따졌다.
사실 카일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자기 몫을 받아내는 것이 상인들의 생리였다.
“곤란하군요. 저 역시 아직 받아야 할 배상금을 절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물어보는 상인에게 카일은 자신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했다.
“자세한 액수는 밝힐 수 없지만 아렉스가 나에게 지불해야 할 배상금은 아직 10분의 1도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나도 그대들과 같은 피해자라는 뜻이오. 유감이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군.”
“그럴 수가…….”
결국 상인들은 어깨에 힘이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돌아가야 했다.
물론, 카일은 받을 돈은 다 받았다.
사실 그 이상을 받아냈다.
솔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노페이스가 다른 상단을 통해서 부동산과 클랜 소유의 재산을 다 처분하고 그 처분된 재산은 몇 번이나 세탁을 거친 후에 카일의 주머니로 들어왔다.
사실상 실버 팽 클랜의 전재산의 90%를 꿀꺽하고 심지어 솔론이 개인적으로 빼돌려 두었던 비상금까지 모두 챙긴 카일이었다.
그나마 10% 정도를 남겨 둔 것은 최소한의 껍데기를 남겨 놔야 저런 상인들이 먹고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배려(?)였다.
이미 일을 다 처리한 노페이스는 카일의 곁으로 돌아왔고 자살로 꾸민 시체는 진짜 솔론의 시체이니 그 누구도 이 사건의 흑막이 카일임을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완벽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