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변명을 하려던 놈들이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호크가 말했다.
“훈련에 열심히 해? 네놈들이 훈련 중에 교관의 눈을 피해서 요령을 걸린 것만 해도 수십 번이 넘는다.”
“그건…….”
“거기다 감히 잡일을 해주는 메이드분들에게 희롱까지 일삼아? 주인님의 자비만 아니면 잡일꾼이 아니라 시체로 만들었을 거다.”
그러자 놈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제길, 어떻게 알았지?’
‘다 보고 있었나?’
호크는 그들을 보고 말했다.
“네놈들은 잡일꾼으로 확정이다. 이후에 숙소의 모든 잡일은 네놈들이 전담한다. 청소, 빨래, 식사 준비 등등. 그 외에 시설의 정비와 수리까지 모두 네놈들의 몫이다. 그리고…….”
호크는 뒤편에 남아 있는 여든 명의 훈련생들을 보고 말했다.
“지금 이놈들만큼은 아니라도 훈련 중에 요령 피우고 태만하게 훈련받는 놈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디 계속 그러고 싶으면 그래 봐라. 주인님에게 보고는 안 드렸지만 이 커다란 시설을 다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더 필요할 것 같으니 어디 계속 그따위로 해봐라.”
호크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여든 명의 2기생들도 입을 다물었다. 내심 그들도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파르트가 다가와서 호크에게 말했다.
“부대장님. 이들입니까?”
“예. 파르트 집사님. 이놈들입니다. 쉴 틈 없이 부려 먹어 주십시오.”
“허허허. 안 그래도 일거리가 차고 넘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잘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파르트는 잡일꾼이 된 스무 명을 인수해 갔다. 그리고 호크는 남은 여든 명에게 말했다.
“자, 훈련을 시작하자.”
“옛! 알겠습니다!”
“옛! 알겠습니다!”
그날의 훈련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집중력이 보였고 이날을 계기로 2기생들은 죽을힘을 다해가며 훈련에 매진하게 되었다.
* * *
인간은 자신이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절대적인 상황보다는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난한 상황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자가 무엇을 누리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비록 사정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적고 차이가 크다고 생각되면 그때는 불행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즉,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카일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잡일꾼으로 떨어진 스무 명을 보고 훈련생으로 남아 있던 2기생들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새끼들 쉬지를 못하네.”
“쯧쯧, 그러게 말이다.”
“진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훈련이 끝나고 그늘 막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2기생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같은 위치였던 스무 명이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스무 명은 그야말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했다.
전체 숙소의 청소와 관리, 여든 명이 넘는 훈련생의 빨래와 식사 준비, 훈련 장비의 준비 등등……. 그야말로 단 한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거기다 잡일꾼들이 묵고 있는 숙소도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처럼 벽돌로 잘 지어진 숙소가 아니라 한쪽에 지어 놓은 창고 같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식사는 차별 없이 주는 것 같았지만 일은 고되고 생활수준도 확 떨어진 것이다.
잡일꾼들은 뒤늦게 1기생들을 붙잡고 다시 훈련을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애원했지만 이미 정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저러지 말아야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너희들 그거 알아?”
“뭐 말이야?”
“1기생 선배들 말이야.”
“그 악마들이 왜?”
“그 사람들 월급을 받는다고 하더라.”
“뭐? 월급?! 돈을 받는다고?!”
“그래. 그리고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면 보너스라는 형태로 다른 돈도 받는데. 그게 꽤 큰 액수인가 봐.”
“진짜? 말도 안 돼…….”
“우리하고 같은 노예 아니었어?”
“지금 주인님이 돈이 많은가 봐. 사실 우리한테 먹이고 입히는 것만 봐도 딱 티가 나잖아?‘
“하긴, 그건 그렇지.”
어디를 가도 그냥 노예들에게 이 정도로 잘 먹이고 입히는 곳은 없었다.
‘우리도 열심히 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걸까?’
‘우리가 2기라면 이 밑에 3기, 4기도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잖아?’
‘진짜, 오늘부터 진짜 열심히 한다.’
자기보다 밑을 보고 위기감을 가지고 자기보다 위를 보면서 희망을 가진다.
그렇게 카일의 클랜에 들어온 2기생들은 점점 클랜에 적응하고 있었다.
* * *
무작정 체력 훈련만 하는 2기생들과 달리 다른 노예들은 이미 클랜의 전력으로 투입되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주인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검은 바람.”
검은 바람은 하얀색 늑대가 펄럭이는 깃발을 가지고 클랜 본부를 떠났다.
그런 검은 바람의 곁에는 무장을 갖추고 검은 바람을 따르는 투란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대장님. 이번에는 몇 층까지 갑니까?”
“이제 슬슬 7층으로 가시죠.”
“저희는 자신 있습니다.”
클랜이 되고 나서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카일이 없어도 노예들이 파티장이 되어서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클랜이 이 노예의 신분을 보장하고 행동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는 보장을 하면 노예라도 독자적으로 파티를 꾸려서 던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덕분에 검은 바람은 자기 직속 부하들을 데리고 던전으로 가서 훈련을 겸한 탐색 활동을 했다.
아직 어린 청년들이긴 하지만 모두 덩치가 좋은 투란인 노예 열 명들은 검은 바람의 지도하에 던전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검은 바람의 행동에 아리시아 역시 자기 직속 병력을 대동하고 끼어들었다. 탐색꾼을 키우기 위해서는 던전에서의 경험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검은 바람, 아리시아, 그리고 열 명의 투란인과 열 명의 사냥꾼들이 포함된 파티는 제법 강력했다.
그들은 스노우까지 데리고 가서 주로 6층에서 활동 했는데 한 번 내려갈 때마다 30골드에서 50골드 정도의 수익을 올려서 가지고 왔다. 훈련을 겸한 활동 치고는 상당히 쏠쏠한 수입이었다.
레이나 역시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레이나님. 오늘 훈련 중에 발생한 부상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레이나는 집사 파르트가 데리고 온 부상자들을 하나하나 치료해 주었다. 그녀의 치료에 2기생들은 울먹거리며 감격하기까지 했다.
‘성녀다. 여기 성녀가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다…….’
‘아니, 여신이야.’
그녀가 수녀이자 주인인 카일의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감히 말 한마디 쉽게 붙이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미 2기생들의 마음을 꽉 잡았다.
그녀는 클랜의 내정을 살피는 것도 꽤 잘 했다.
“파르트씨, 여기 식자재 단가가 올랐네요. 시장 가격이 다 올랐나요, 아니면 여기 상단에서 가격을 올렸나요?”
“죄송합니다. 미처 체크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줘요. 그리고 소를 좀 알아봐 주세요.”
“소 말입니까?”
“예. 주인님에게 말했는데 우리 클랜은 우유의 소비량이 너무 많아요. 계속 목장에서 사는 것보다 젖소를 사서 키우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더 이득일 것 같아요.”
“그렇군요.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상냥한 말투로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지만 그녀는 클랜의 내정에서 새는 돈이 없는지 빈틈없이 잘 살폈고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고 있었다.
카일로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건데 그녀는 과거에 고아원의 원장으로 있었다.
원장으로 있을 적 그녀는 쥐꼬리만 한 자금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최대한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서 갖은 궁리를 다 해야만 했다. 게다가 신전에서 자라서 검소함과 절약이 생활 습관 전부에 베여 있기도 했다.
레이나는 카일처럼 사업 아이템을 궁리해서 돈을 버는 것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이 새나가는 것을 막는 것에는 몹시 유능했다.
그녀가 일을 잘 처리하자 그 지시를 받아서 행동하는 집사와 메이드들도 한결 마음을 놓고 시키는 대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클랜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유일하게 이 클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발레리아의 직속 부하들이었다.
현재 카일의 능력자 각성 슬롯은 세 개.
그중에서 하나는 최근 호크에게 사용했고 남은 슬롯은 둘이다.
카일은 몸 상태가 안 좋은 발레리아의 직속 부하들의 상황을 생각해서 그녀들의 능력을 먼저 각성시키겠다고 말했다.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는 그런 카일의 결정에 순순히 응했고 발레리아의 부하들 중에 두 명을 먼저 각성시켰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열 명 중에 두 명이 회복했지만 아직 여덟 명은 검을 잡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거기다 두 명이 너무 빠르게 회복한 것도 문제였다.
카일이 빌 존스에게 그녀들의 몸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은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회복해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회복한 그녀들도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오로지 내부에서만 활동해야 했다.
그녀들의 회복한 모습은 같은 클랜 안의 2기생들에게조차 비밀이었다. 종속 마법으로 보안을 지킬 수 있다고 해도 숨길 수 있는 사실은 숨기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결국, 제법 쓸 만한 수준의 기사 전력을 두 명이나 손에 넣었지만 그녀들은 당분간 던전에 투입 할 수 없었다.
발레리아는 그 점을 몹시 미안해했고 한 편으로는 거리낌 없이 활동하는 검은 바람이나 아리시아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복면을 쓰고 데리고 가면 어떨까요?”
오죽하면 그녀가 이런 말을 했을 정도다.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그런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네가 길드 직원이라면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인물이 던전 안에 들어가게 놔둘까?”
“그건……. 그럼 맨 얼굴로 가도 티가 나지 않지 않을까요. 하루에도 수백 명, 수천 명씩 던전 입구를 지나가는데 설마 다 기억하겠습니까?”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너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은 틀림없이 기억할걸?”
카일의 각성으로 인해서 몸을 회복한 두 명의 여기사들은 심각할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왜 주인님의 능력은 그렇게 쓸데없는 부가 기능이 붙은 걸까요?”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아쉬워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라면 기억에 남을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이들까지 모두 회복하면 한번에 움직일 테니 그동안은 연병장에 가지 말고 저택 정원에서 개인 수련만 하도록 해.”
“이미 그렇게 지시 하고는 있습니다. 다만…….”
“다만 뭐지?”
“아무래도 본인들 스스로도 주인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죄스러워하는 듯합니다.”
“괜한 짓을…….”
카일은 피식 웃었다.
각성을 하고 그녀들이 온전하게 몸을 회복했을 때 두 명의 여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발레리아 같이 폐기장에 떨어진 신세는 아니었지만 거의 그 직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몸뚱어리였는데 그걸 원래의 상태,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준 것이다.
두 명의 여기사들은 즉석에서 카일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었다. 카일에게는 이제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괜찮으니까 당분간은 개인의 수련에만 신경 쓰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 * *
그날 저녁.
두 명의 여기사와 호크가 카일의 방에 찾아왔다. 빠른 초능력 각성을 위해서 카일이 꾸준하게 코어를 활성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고속으로 활성화되어가는 초능력 코어를 느끼며 카일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잘 하면 한 달 안에 모두 각성하겠어.’
기약 없이 될 때까지 계속 각성을 시도하던 과거와는 달랐다.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이 와서 얼마나 더 하면 능력이 각성 될지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코어 활성화가 끝난 후.
“수고 많았다. 이제 돌아들 가라.”
카일이 이렇게 말하자 호크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호크가 물러났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안 가?”
호크는 물러났는데 두 명의 여기사들은 우물쭈물 하면서 방에 남아 있었다. 호크는 뭔가 짐작이 갔는지 눈치껏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그녀들이 말했다.
“저, 주인님.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저희가… 잠자리의 시중을 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