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대강 이런 식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서 구상한 것이고 무언가 의견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도 좋다.”
카일의 말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말한 것은 발레리아였다.
“명령권에 대한 충돌은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서 검은 바람의 직속 병력이라고 하면 그 투란의 소년병들인데, 그들은 저나 아리시아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 겁니까?”
“공식적으로 조직 내의 서열은 너희들이 위다. 하지만 직속 병력인 이상 검은 바람의 명령을 우선시한다.”
“그건 저나 아리시아의 직속 병력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호크의 서열은 어떻게 됩니까? 저희 직속 병력과 호크의 서열은 누가 위로 합니까?”
“일단 동열로 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명령권은 없다. 너희 직속 병력들이라고 해도 다른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간부들의 직속 병력은 어디까지나 조직의 수직 관계에서 빼서 따로 운영하겠다는 뜻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호크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발레리아의 말에 검은 바람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호크가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밑에 백 명이 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실적과 실력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의 의문은 지당했다.
특히 실적은 어차피 도긴개긴이라고 해도 실력 면에서는 심각했다.
백 명이 넘는 부하들을 단련시키다 보면 두각을 드러내고 재능이 있는 부하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럴 때 호크에게 실력이 없으면 과연 밑의 부하들이 잘 따를지가 의문이었다.
“너희들 생각이 옳다. 그리고 호크의 실력에 관해서는 나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다.”
“생각이라면 어떤…….”
“호크를 각성시킬 생각이다.”
카일의 말에 측근들은 깜짝 놀랐다.
“호크를 각성…….”
“흐음, 그렇게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습니다.”
“능력은 주인님에게 하사 받는 힘이니 그 자체로 부하들 사이에서는 상징적인 힘이 되겠죠.”
“하지만 주인님. 지금 주인님의 능력이 없으면 저에게 맡긴 그녀들의 몸을 회복시키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발레리아 직속으로 넘겨준 전직 여기사들의 경우 상태가 꽤 심각했다.
처음에 카일과 만났을 때 발레리아처럼 죽음 직전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 바로 직전 정도는 되었다.
몸이 병들어서 레이나가 붙어서 꾸준하게 치료를 해 준다고 해도 자연 회복을 하려면 몇 년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는 카일의 초능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카일도 그걸 아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부분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능력이라면 한 번에 세 명의 초능력자를 각성시킬 수도 있다.”
카일의 말에 측근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주인님.”
“한 번에 세 명이나?”
“그래. 그리고 각성 시간도 아마 꽤 짧아졌을 거다. 받아들이는 쪽의 개인 차이도 있겠지만 전처럼 한 명에게 반년 이상씩 걸리지는 않을 거다.”
카일의 초능력은 그동안 많은 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 성장을 숨기고 능력을 신장시키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금 카일의 각성자 슬롯은 세 개로 늘었고, 코어를 활성화시키는 출력도 많이 강해졌다. 그동안 능력자를 함부로 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에만 주력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호크에게 능력을 주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호크가 그동안 보여 준 충성심을 생각하면 능력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조건 주인님의 뜻에 따를게요.”
“저도 동의해요.”
간부들이 전원 찬성했고 호크에게 초능력을 주는 것은 문제가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 2기생이 80명이고 잡일꾼이 20명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아리시아의 질문에 카일이 말했다.
“전부를 던전의 탐험가로 키울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에 따른 성공과 실패가 구별되어야 하지.”
“아아… 과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 명을 굴려서 그중에서 스무 명의 탈락자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었다. 사실 지금 카일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던전 들어가서 활동하는 80명과 클랜 본부에서 청소와 잡일만 하는 노예들을 절대 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금과 돌을 가려내겠습니다.”
“그 부분은 너희들에게 맡기겠지만 1기생과 2기생의 차이를 두고 훈련시켜라. 경력은 대우를 해줘야지.”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 카일의 서재에 노크 소리와 함께 호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호크입니다.”
“들어와라.”
“맡기신 일을 다 하고 들어왔습니다. 일단 숙소 건물 두 개에 부하들을 나눠서 배치했고, 간부님들의 직속 병력도 제가 임시로 숙소를 배정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일단 너에게도 말해 줄 것은 많지만 그 전에…….”
카일은 호크에게 다가가서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많이 아플 거다.”
“예? 무슨… 으, 으아아아아악!!”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그냥 확 저질러 버리는 카일이었다.
호크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들으며 검은 바람과 다른 간부들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돌렸다
“저건…….”
“진짜 아프지.”
“고통의 극한이죠.”
“다시는 겪기 싫어요.”
* * *
다음 날, 넓은 연병장에 백 명의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똑바로 안 들어!”
“죽고 싶냐? 지금 죽고 싶어서 수 쓰냐? 앙?”
“뒤지고 싶으면 말만 해라. 지금 죽여준다!”
통나무를 머리 위로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들은 바로 어제 카일의 부하로 들어온 2기생들이었다. 그리고 그 백 명의 사이에는 욕설과 호통을 하며 훈련을 닦달하고 있는 건 호크를 비롯한 1기생 선배들이었다.
아직까지 기술이나 전술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 중요한 건 그저 체력, 체력, 체력이다.
그렇기에 1기생들은 2기생들을 아침, 저녁으로 미친 듯이 굴리면서 체력을 훈련시켰다. 이 훈련에 따라올 수 있는 인물들을 우선해서 뽑아야 했다.
카일은 체력 훈련을 호크와 1기생들에게 완전히 일임했다.
그러면서 딱 한 마디만 덧붙였다.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가 너희들한테 시킨 것 기억하지? 딱 그만큼만 굴려라.”
그 말에 1기생들은 힘찬 목소리로 “예. 알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연무장에는 지금 욕설과 고통의 신음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나름 잘 굴리는군.”
카일은 연무장이 보이는 자신의 방의 테라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주인님, 뭐 보세요?”
그런 카일의 옆에 다가온 건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부드러운 가운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발레리아였다.
그녀는 어젯밤 카일과 함께 밤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사정의 여자들을 구해 준 카일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평소보다 훨씬 격렬하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녀는 카일의 곁으로 다가와서 부드럽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애들 훈련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요?”
“아니, 그냥 똑바로 하는가 보는 거야.”
“잘하겠죠. 그냥 체력 훈련인데……. 아?”
발레리아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 통나무 하나가 옆으로 무너지며 2기생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누가 다친 것 같지는 않았고 이것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거 너무 하는 거 아니요? 같은 노예끼리 좀 봐줄 수도 있잖아?”
2기생 노예 중에 한 명이 교관 역할을 하고 있는 1기생에게 격렬하게 따지고 든 것이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항의를 받은 1기생 교관은 미간을 찌푸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상대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내가 못할 말 했어? 엉. 어디서 좀 먼저 들어왔다고 어디 상전이라도 된 줄 알아? 너나 나나 똑같은 노예인데 뭐 그리 잘났다고 지랄이야!”
일어나서 항의하는 노예는 그냥 일꾼 노예 치고는 제법 체구가 있는 남자였다.
원래 남자 노예들 사이에서는 덩치 크고 힘 센 인간이 유리한 법이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들어왔다고 해서 1기생이니 2기생이니 하는 처음 들어보는 계급에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종속 마법에 걸린 주인도 아닌데 같은 노예에게 복종하고 따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런, 첫날부터 곤란하게 됐군.”
테라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이 늘었으니 트러블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훈련 첫날부터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어쩌지? 내가 나설까?’
그때 옆에 있던 발레리아가 카일에게 몸을 기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세요.”
“그래도 되겠어?”
“충분해요.”
발레리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장담하며 카일의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카일은 1기생과 2기생의 서열을 분명하게 잡았다. 하지만 주인인 카일이 명령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모든 이들이 마음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종속 마법은 노예의 행동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마음까지 따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의미가 포괄적이라서 해석하기에 따라서 다른 명령의 경우는 강제력도 약화된다.
결국 노예끼리의 다툼은 많은 노예들을 관리하는 거대 농장이나 광산 같은 곳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1기생은 자신에게 반항하는 2기생을 보고 말로 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뻐어억!
“크윽…….”
한 방에 반항하던 2기생 노예는 거렸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남자에게 얻어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하지만 2기생은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반격을 하려고 했다.
“이 새끼가 아주 보자보자 하니까!”
하지만 그건 반격이 아닌, 상대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행동일 뿐이었다.
1기생은 그래도 1년 넘게 군사 훈련을 받고 던전의 실전에서 단련된 전사였다. 그런 1기생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주먹이 상대의 전신을 골고루 다졌고 2기생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더니 쓰러졌다.
이윽고 놈은 몸을 둥글게 말고 애원했다.
“그, 그만……. 제발 그만 때려…요.”
그제야 1기생은 주먹을 멈췄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놈의 멱살을 잡아서 끌어당기고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반항해 봐라. 그때는 아주 패 죽여주마.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면 꼭 해라. 알겠냐?”
“아… 안 하겠습니다. 절대 안 하겠습니다……!”
상대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리고 1기생은 주변을 둘러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해? 다시 안 들어? 이 새끼들이 다 빠져 가지고!”
그러자 2기생들은 다시 허겁지겁 통나무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에 한계에 도달해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이들도 다시 이를 악물고 통나무를 들어 올렸다.
“호오, 실력 차이가 꽤 선명하게 나는걸?”
카일은 1기생이 생각보다 일방적으로 2기생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살짝 감탄했다.
“지하 10층에서 하이 오크와 맞서기도 하는 부하들입니다. 저 정도는 당연하죠.”
“그래도 제법이야. 저 정도면 어지간한 병사보다는 낫겠는데?”
호크가 소드 유저 상급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1기생들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제 모험가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실력은 갖춘 건가?’
카일은 옆에 있는 발레리아의 어깨를 감싸서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수고 많았다.”
평생 칼 한 번 손에 잡아본 적 없는 일꾼 노예를 저기까지 단련시키는 것은 결코 보통 정성으로는 안 될 일이었다.
카일의 칭찬에 발레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