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선량한 인상에 공손한 말투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자였지만 카일은 전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카일은 이번에 클랜을 만들기 위해서 노예를 대량 구매하기로 했고 그렇게 건수가 크다 보니 믿을 만한 상단을 통해서 알아봐야 했다.
그렇게 해서 연줄을 통하고 통해서 끈이 닿은 것이 바로 이 남자다.
빌 존스.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활동하는 무국적 상인이자. 주력 사업은 전쟁 사업인 남자다.
전쟁 중인 국가에 접근해서 간도 크게 양쪽 모두에게 군수품을 납품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최대한 비싼 가격을 받아내기 위해서 당당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경쟁을 취하게도 한다.
그렇게 돈을 벌다가 승자에게는 더 큰 보수를 돈으로 받아내고 패자에게서는 더 혹독한 징수를 해 낸다.
작은 소국이긴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왕족을 모두 노예로 받아서 팔아넘긴 전적도 있는 남자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장사판으로 이용하며 국가 간의 힘겨루기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이 있는 남자다.
이런 위험한 인물을 눈앞에 두고도 방심할 정도로 카일은 얼빠진 인간이 아니다.
다만, 카일이 원하는 대로 주문한 까다로운 조건의 노예를 공수할 능력이 있으며, 상인으로서의 실적과 경력이 있기에 함부로 신용할 수 있는 비즈니스 상대임에는 틀림없었다.
카일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와 마주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선 주문한 상품을 볼 수 있을 까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빌 존스는 카일을 뒤편에 있는 마차로 안내했다. 마차에서는 다양한 노예들이 내렸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카일이 주문한 노예들이었다.
“우선, 주문하신 성인 남자 노예 백 명입니다.”
가장 큰 마차에서 주르륵 하고 나온 나자 노예 백 명은 광산이나 농장 같은 곳에서 육체노동을 하던 노예들이었다.
“건강 상태에 이상은 없지만 혹시나 이상이 있다면 차후에 말씀해 주십시오. 면밀하게 조사한 후 보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들은 얼마에 가격이 책정되어 있나요?”
“1인당 10골드로 해서 총 1,000골드입니다. 하지만 대량 구매를 하셨으니 900골드까지 깎아 드리죠.”
충분히 타당한 가격이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넘어갔다.
“다음으로 제가 주문한 노예가 있을 텐데요?”
“예. 주문 품목의 상품은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 꺼내드리죠.”
그리고 노예상인이 꺼낸 것은 커다란 체구에 검은 머리와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는 거한들이었다.
“아…….”
그들이 나온 순간 검은 바람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지금 나온 이들이 자신과 같은 투란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투란의 젊은 노예 열 명을 주문 하셨죠? 이들은 가격이 제법 나갑니다.”
“알고 있소. 얼마인지 말해 주시오.”
“투란의 젊은 노예들은 그 하나하나가 숙련된 기사나 다름이 없죠. 여기 잡힌 노예들은 모두 아직 어린 소년들이지만 성장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하나에 최소한 200골드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 해서 2,000골드 되겠습니다.”
“내가 투란 노예를 가지고 있어 봐서 아는 건데 모든 투란 노예들이 강인한 전사로 자라는 것은 아니죠. 다 해서 1,200골드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건 너무 염가군요. 1,800까지는 가능합니다.”
“서로 가운데서 만나서 1,500 어떻습니까? 저는 앞으로도 존스 씨와 많은 거래를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흐음.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정도는 져드리는 게 예의일 듯하군요. 1,500에 넘겨 드리죠.”
그렇게 카일은 투란의 젊은 노예 열 명을 넘겨받았다.
“주문한 상품은 아직 더 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빌 존스가 다음 마차에서 내리게 한 이들은 조금 전의 투란인들과는 정반대로 가녀린 여성들이었다.
안색은 초췌했고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도 보였고 다소 병색도 완연했다.
빌 존스는 그런 여자 노예들을 보고 말했다.
“사실 꽤 특이한 주문이었습니다. 전직 여기사 출신의 노예를 구해 달라고 하시다니 말이죠.”
빌 존스의 말을 듣고 발레리아가 눈을 번뜩였다.
‘설마…….’
그런 그녀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빌 존스가 말을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여기사가 노예로 잡힌 경우는 대부분 전쟁 포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경우 그녀들의 운명은 썩 좋지만은 않죠.”
노예제도가 태연하게 유지될 정도로 인권이 바닥인 세계다.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여기사들을 기다리는 운명이 얼마나 잔혹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빌 존스는 그녀들을 소개해 주며 말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기사로서의 역량은 이미 없다고 봐야 합니다.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고 그리고 여자로서도… 사실 멀쩡한 상태는 아닙니다. 일단 주문을 해주셔서 준비는 했는데 혹시 용처를 물어봐도 될까요?”
빌 존스의 말에 카일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꼭 알아야 합니까?”
“저하고 오랫동안 거래를 하실 생각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서로 간에 비밀은 없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조금의 정보를 들어내는 편이 좋았다.
“발레리아.”
카일은 발레리아를 불렀고 카일의 부름에 그녀는 냉큼 대답하며 곁으로 다가왔다.
카일은 그녀를 보여 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그녀 역시 전직 여기사였던 노예입니다. 그리고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지만 회복한 이후 믿음직한 전력이 되었죠.”
“그건… 굉장히 특수한 경우였군요.”
“예. 하지만 불가능한 경우도 아니죠. 보시다시피 우리에게는 유능한 수녀가 있습니다. 레이나.”
“예, 주인님.”
이번에는 레이나가 카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카일은 그녀를 소개하며 말했다.
“자애와 조화의 여신 레테를 섬기는 수녀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저를 따르고 있죠.”
“그렇군요. 하지만 아무리 수녀가 있어도 열 명이나 회복시키려면 회복과 용양을 거쳐서 몇 년은 걸릴 텐데요?”
“좀 더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는 제 나름의 비법이 있습니다.”
“그 비법이란… 당연히 비밀이겠군요.”
“예. 그리고 설령 몇 년이 걸린다고 해도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빌 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회복에 대한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1인당 50골드 어떻습니까?”
좀 전의 투란인 노예들보다는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사실 폐기장에 가기 직전의 노예들에 대한 가격 치고는 비싼 편이기도 했다.
카일이 뭐라고 하기 전에 빌 존스는 빠르게 변명을 했다.
“노예의 가격이라기보다는 이런 특수한 조건의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 정보망을 가동하고 여기까지 옮겨온 비용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문하신 대로 ‘전직 여기사이며 재기가 어려운 노예’라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운 주문이었습니다.”
“알고 있소. 지불하지.”
카일은 순순히 돈을 지불했다.
사실 카일이 돈을 지불한 이유는 빌 존스의 설명이 먹혀서가 아니었다.
눈이 다 죽어 있는 저 여기사들에게 자신의 값어치가 깎이는 것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나온 것은 비교적 상태가 좋은 남자 노예들이었다.
다만 앞에 봤던 투란인들과 달리 건장한 체격이라기보다는 날렵한 체구에 가까운 이들이었고 인종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번에 주문하신 것은 사냥꾼 노예들 열 명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활은 기본 소양이고 눈썰미도 좋은 편이니 던전에서 좀 경험을 쌓으면 탐색꾼으로도 쓸모가 있을 겁니다.”
“좋군요. 얼마죠?”
“열 명에 1,200골드 어떻습니까?”
“…합당한 가격 같군요.”
이번에는 깎자고 하면 깎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카일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양보를 해서 다음에 있을 거래에서 더 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가격만 놓고 보면 이 다음에 나올 노예들이 가장 비싸기 때문이다.
“자, 마지막이군요.”
다음에 빌 존스가 마차에서 내리게 한 이들은 한 명의 중년 남성과 수십 명의 젊은 여인들이었다.
“크흠,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귀족 저택에서 사로잡은 이들입니다. 저 중년 남성은 백작가의 집사였으며 그 옆에 있는 여성들도 같은 저택에서 일하던 메이드들이었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런 노예들은 상당히 비쌉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집사 한 명과 메이드 스무 명.
그게 카일이 주문한 내용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겠지만 이들의 몸값은 어지간한 전투 노예만큼이나 비싸다.
우선 집사는 다재다능의 대명사 같은 존재다.
가문의 재정을 보살피기 위해서 상재를 익혀야 했고, 귀족가를 보필하기 위해서 품위와 교양을 익혀야 했으며, 귀족가의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학문과 문화, 역사, 예술 등등에 대한 조예가 있어야 하며 자기 주인을 지키기 위한 호신술도 익혀야 한다.
앞에 나온 대부분의 기술을 최소한 B급 정도로는 익혀 두고 있어야 어디 가서 귀족가의 집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몹시 비싼 몸이다.
그리고 메이드들도 마찬가지다.
집사만큼은 아니라도 귀족가의 메이드들 역시 예절과 교양을 익혀야 한다. 또한, 귀족가의 메이드는 대부분이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귀족들이 뽑을 때부터 어느 정도 외모를 보고 뽑기 때문이다.
솔직히 젊은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노예로서 비쌀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다 귀족가 출신의 메이드라고 하면 은근히 가격이 더 나가는 법이다.
메이드들 중에 상당수가 귀족의 애첩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성노예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지저분한 평가이긴 하지만 ‘높으신 귀족 나리들이 즐긴 여자.’ 라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술집이나 밤거리에서는 꽤 고가에 거래되는 품목이다.
정작 카일은 그런 목적으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시장의 가격이 그렇게 형성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흐음, 그런 이유로 이들의 가격은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가격은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집사 노예가 3,000골드, 메이드 스무 명은 다 해서 4,000골드, 다 해서 7,000골드가 어떻습니까?”
빌 존스가 부른 가격은 카일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
메이드 노예가 1인당 200골드라면 그건 언 듯 들으면 타당한 금액이다. 사실 그녀들이 밤거리에 팔려 가면 그 정도 가격대로 시세가 형성된다고 들었다.
카일은 그런 쪽으로 사려는 게 아니라서 약간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세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집사 노예가 3,000골드라니?
“그건 너무 비싼 것 아닙니까? 5,000골드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카일의 말에 빌 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집사는 백작가를 모시던 인물로 실질적으로 백작가의 영지의 행정을 총괄하고 백작가에서 운영하던 상단을 관리하기까지 했던 유능한 인물입니다. 사실상 행정 능력과 상인으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는 말이죠.”
“그건 유능한 조건이지만 저는 저택과 사용인의 관리를 목적으로 구입하려는 겁니다. 행정 능력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값어치는 따져 주어야죠.”
“그건…….”
카일과 빌 존스가 흥정을 위해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실례합니다. 예의가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부디 제가 한 마디만 하게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노예인 중년의 집사가 나서서 말했다.
그러자 빌 존스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감히 어디서 노예가 끼어드는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빌 존스의 모습에 중년의 집사는 움찔했지만 이내 강한 눈을 하고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제 가치가 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부디 제가 자기소개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은근슬쩍 나서서 ‘나는 네 편이니 말 좀 하게 해달라.’ 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빌은 어림없다는 듯이 화를 내며 말했다.
“시끄럽다. 아직 교육이 덜 되도 한참 덜 됐구나. 죄송합니다. 카일 씨.”
“예?”
그는 뜬금없이 카일에게 사과를 했다.
“제가 아직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을 소중한 고객에게 판매 할 뻔했습니다. 부디 이해를 구합니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의 말을 들어 보고 싶기도 하군요.”
“하지만 이건…….”
“고객은 왕이라고 하셨죠?”
카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빌 존스는 한숨을 내쉬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물러나면서 중년의 집사 노예에게 말했다.
“신중하게 잘 말해라. 만약 카일 씨가 널 구매하지 않으시면 너는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는 노예 상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영역이 침범 당해서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카일을 향해서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저는 샐런트 백작가를 모시던 집사 파르트라고 합니다.”
“유감이지만 망한 가문의 이름을 말해도 후광은 나지 않아. 네 가치를 줘.”
카일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앞에서 설명을 들으셨다시피 저는 영지의 행정과 상단의 경영에 관해서 10년이 넘는 실무 경험이 있으며 다섯 가지 대륙어를 읽고 쓸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 교양, 예술에 관해서도 보통 집사들보다는 더 깊은 견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이긴 한데 모험가인 내 입장에서는 별 쓸모없는 조건이군. 다른 건 없나?”
“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뭐?”
“뭐라고?”
그 말에 카일뿐만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빌 존스도 상당히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