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노예 제도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돈만 주면 누구나 이성을 구입할 수 있다.
비록 아름답거나 잘생긴 노예들의 경우 거금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돈만 내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일까?
아름답고 잘생긴 노예를 가지고 총애하거나, 귀여워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성적 노리개로 삼아서 즐기거나 하는 그런 행위 자체는 별로 특별한 게 아니다. 그냥 이 세계의 상류층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 진심으로 마음을 허락하고 노예와 결혼을 하고 가족이 되려고 하는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세간에서는 그 사람을 어딘가 모자란 사람.
혹은 정상적인 감각에서 멀어진 이상한 인간으로 본다.
보통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떨어져서 평범한 이성과 관계를 맺을 수 없고 오직 자기 말에 복종하는 노예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기분 나쁜 인간.
그게 이 세계에서 노예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낙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낙인이 찍히면 사회적인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주변에서는 조롱과 멸시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발레리아는 하얗게 질린 아리시아를 보고 말했다.
“어때? 주인님이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장래가 촉망 받는 유능한 모험가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경멸받는 대상으로 보이면 좋겠어? 오직 너. 때.문.에 말이야.”
“나… 나는… 나는 그런…….”
아리시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신의 존재가 카일에게 해를 끼칠 거라면 지금 당장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절망에 빠져서 얼굴이 흙빛이 된 아리시아에게 발레리아가 말했다.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밖에 없어. 하나는 주인님에 대한 마음을 접는 건데……. 할 수 있겠어?”
발레리아의 말에 아리시아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휴우… 그래. 사람 마음이야 뜻대로 안 되는 거니까.”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 네 마음을 절대로 주인님에게 들키지 마.”
“그러면 될까요?”
“미봉책이지만 말이야. 어쨌든 숨겨. 가능하면 주인님에 대한 독점적인 욕심도 드러내지 말고 항상 감정을 숨기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주인님을 대해.”
“…….”
“내 생각은 이 정도야. 따르고 말고는 네 자유야.”
발레리아의 말에 아리시아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자신의 감정이 카일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 못했던 아리시아였다.
노예인 자신에게 항상 자상한 카일의 호의에 기대서 결코 꿈꿔서는 안 될 미래를 꿈꾸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두 번 다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잠시 후.
아리시아는 식당에서 식사중인 카일의 앞에 나타났다.
“주인님. 식사하셨어요? 제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데 죄송해요.”
평소와 다름없는 아리시아의 모습에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한동안 쉰다고 했잖아? 그보다 식사 안했지? 뭐라도 먹어 둬.”
“예. 주인님.”
아리시아는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카일을 대하고 있었다.
‘나는 노예야, 노예. 자기 분수를 알고 오직 주인님을 섬기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자.’
그녀는 속으로 엉망진창으로 허물어지려는 자신의 마음을 더 강하게 다 잡았다.
그게 언제까지 갈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525년 9월.
드디어 카일의 새로운 근거지가 될 클랜 본부가 완공되었다.
본부가 다 지어지고 그 안으로 들어온 카일은 상당히 놀랐다.
“호오오… 이거 참…….”
처음에 이 부지를 살 때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그냥 풀밭이었다. 그런데 완공된 모습을 보니 제법 훌륭한 모양새가 갖춰져 있었다.
군대를 연상하게 하는 건물 두 개와 그 안쪽에 카일과 측근 노예들이 머무는 저택. 그리고 넓은 연무장과 말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방목장과 마구간.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형 식당에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까지. 카일이 주문한 것은 모두 다 갖춰져 있었다.
“이 정도면 훌륭하군.”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노예들도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봤던 허허벌판과는 완전히 다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식 연병장이 생겼으니 앞으로 부하들 훈련시키기도 용이하겠습니다.”
“맞는 말이야. 사실 뒤뜰은 너무 좁았지. 이제 좀 제대로 훈련시킬 수 있겠어.”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넓은 연무장에서 부하들을 굴릴 생각에 벌써 신이 난 모양이다. 그리고 둘의 이런 설렘은 말의 방목장을 봤을 때 더 놀랐다.
“주인님, 말을 키우실 생각입니까?”
“그렇지. 원래 목장 부지였던 만큼 말을 키우기에 참 좋은 조건의 땅이잖아? 이동 수단으로 사용해도 좋고 키워서 팔아도 좋고. 어떻게 해도 손해는 아닐 것 같더라고.”
“오오오… 그렇군요!”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둘은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발레리아. 너는 기사 출신이니까 말에 관해서 잘 알겠지?”
“예. 물론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제 기마 성적은 기사단 내에서도 최고였습니다.”
발레리아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크게 대답했다.
“그런 너를 믿고 말의 구입과 관리. 그리고 부하들의 기마 훈련까지 맡기고 싶은데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주인님.”
발레리아는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검은 바람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크흐음, 주인님. 제가 한 가지 간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왜 그러나 검은 바람?‘
검은 바람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주인님. 저는 투란인입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그거야… 아아? 맞다. 너 유목 민족이었지.”
“그렇습니다. 저희 투란인은 말 위에서 태어나서 말 위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말에 정통합니다. 발레리아가 말에 약간의 취미가 있다고 해도 저에게 비할 정도는 아니라고 단언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말 하면 기사라고 생각해서 발레리아에게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유목민족인 검은 바람 역시 말에 관해서라면 둘째 가라할 전문가였다.
“주인님 부디 말에 관해서라면 이 검은 바람에게 맡겨 주십시오.”
“주인님. 말을 기마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 방식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접하는 유목민족의 방식은 병사들에게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군 투란의 방식으로도 병사들은 잘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안장도 없이 말에 올릴 거잖아? 병사들 반은 죽거나 불구가 될 거야.”
“그렇지 않아. 투란에서는 어린애들도 말 위에서 맨몸으로 놀고 다닌다.”
“그러니까 그건 투란의 얘기고, 대륙인들은 그렇게까지 말에 친숙하지 않아. 무엇보다 대륙의 말과 투란의 말은 다르지.”
“그렇다면 투란의 말을 수입해서…….”
“그만!”
카일은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의 말을 끊고 말했다.
“결정했다. 말의 구입과 육성은 검은 바람 너에게 맡기겠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이 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역으로 발레리아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그녀에게 카일이 말했다
“대신 병사들의 기마 훈련은 발레리아 네가 맡아서 완수해라.”
“아… 예. 감사합니다. 주인님.”
발레리아는 몹시 기뻐했고 검은 바람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카일은 그런 검은 바람을 보고 말했다.
“투란인과 대륙인의 말을 접하는 차이에 관해서는 발레리아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주인님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둘 다 말에 관해서는 범상치 않은 애착이 있는 듯하니 카일은 두 사람에서 서로 나눠서 일거리를 주는 것으로 다툼을 종결지었다.
“자, 일단 나머지 시설도 둘러보자. 혹시 필요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빠르게 고치는 편이 좋아.”
“예. 주인님.”
그리고 그날 카일과 측근 노예들은 클랜 본부의 시설과 건물을 둘러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도심에서 좀 멀어지기는 했지만 그게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시설은 훌륭했다. 이전보다 크게 넓어졌고 내부 설비도 훨씬 더 좋아졌다.
카일은 물론이고 노예들도 몹시 만족했다.
“오오오… 이게 우리 집이구나.”
“집이 아니고 숙소다.”
“어쨌든 좋아졌어. 훨씬 넓잖아?”
“그건 그래. 여럿이 지내기에 훨씬 편해졌어.”
“공동 샤워실이라는 게 뭐지?”
“써보면 알겠… 우와! 위에서 물이 나오잖아?”
“이럴 수가! 이런 게 가능하다니?”
전에 노예들이 살던 건물은 평범한 보통의 방이었고 그 방에 다섯 명씩 들어가서 살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짓는 숙소의 건물은 처음부터 단체 생활을 염두에 두고 군대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당연히 공간도 넓어졌고 단체 생활을 위한 편의시설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부하들은 크게 만족하는 모양이군.”
“만족하다 뿐입니까? 주인님. 여기는 제가 전에 있던 크로노 왕국의 정규군 막사보다 더 좋을 정도입니다.”
발레리아의 말에 카일을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지. 자, 이제 우리는 우리 집을 보러 가자.”
부대시설을 다 둘러본 후에는 카일과 측근 노예들이 머물 저택을 둘러봤다.
기존에 살던 집을 참고해서 더 크고 편하게 만들어 달라고 말했었는데 그 요구는 충실하게 지켜져 있었다.
“방이 열 개는 더 늘었어요. 주인님.”
“거실이 굉장히 화려해졌어요. 어머? 샹들리에까지…….”
“주인님. 부엌과 식당도 커졌습니다.”
개조된 저택은 기본적으로 커지고 편리해지고 또 화려해졌다.
1층의 로비 이외에도 개인 서재와 세련된 테라스까지 있어서 하급 귀족의 저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륭했다. 게다가 지하에는 이전 집에 있었던 스파 시설보다 더 커진 스파 시설이 있었다.
“이 정도로 크면, 관리할 사람을 따로 뽑아야겠는데요?”
발레리아의 말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야지. 안 그래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어머? 정말인가요?”
“그래. 이번에 노예상인을 부르면서 귀족가에서 일하던 고용인 출신의 노예들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이 정도로 넓은 저택을 카일과 측근 노예들이 일일이 관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전문 인력을 고용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카일은 노예상인에게 말해서 거기에 해당하는 경력자를 데려와 달라고 요청한 상태였다.
“노예 상인은 며칠 후에 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좀 기다리자.”
“예. 주인님.”
* * *
며칠 후.
클랜의 본부에 한 무리의 마차 무리를 이끌고 누군가가 방문했다.
“온 모양이군.”
저택의 테라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일은 저 마차 행렬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주인님. 손님이 왔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모두 함께 마중 나가도록 하자. 큰 거래니까 정중하게 대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카일은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노예 상인을 마주했다.
카일이 내려가자 마차 행렬의 가장 앞 열에 있는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주문을 넣으신 고객님이 맞으십니까?”
“맞소. 내가 카일이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작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빌 존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빌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요. 성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귀족이신 듯한데 어찌 그러겠습니까?”
“하하하. 장사의 유리함을 위해서 구입한 작위일 뿐입니다. 제 본질은 어디까지나 상인이죠. 그리고 저는 고객을 왕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신조이니 말을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