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오늘부터 열흘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쉬어라! 내가 허락한다.”
“와아아아!”
“주인님 만세!”
부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면 하루 이틀 정도 휴식이 주어지고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휴가가 열흘이나 계속된다니?
“주인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무 많이 풀어 주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주인님. 열흘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깁니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부하들이 풀어지는 것을 걱정했지만 카일은 고개를 저으며 밀어붙였다.
“이럴 때 안 쉬면 언제 쉬겠어. 클랜으로 정식 승격하는 기념이다.”
그 말에 반대를 표하던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도 그건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은 바람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드디어 해내셨군요.”
카일과 가장 먼저 처음으로 함께 했던 검은 바람으로서는 감개가 무량한 순간이었다. 카일 역시 마찬가지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검은 바람을 단돈 1골드에 샀고 장비를 맞춰 줄 돈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검은 바람은 갑옷 하나 입지 못하고 롱 소드만 들고 던전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때부터 헌신적으로 계속 카일을 따라와 준 검은 바람의 공적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바람. 잔을 들어라.”
“잔을 말입니까?”
“그래.”
카일은 직접 검은 바람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네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 검은 바람.”
“황…송하신 말씀입니다, 주인님.”
검은 바람은 카일이 직접 따라주는 술을 받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야말로 주인님이 없었다면 진작 땅에 묻혀서 죽었을 몸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전사로서의 기회를 주신 주인님에 대한 은혜는 천 번을 죽어도 부족할 겁니다.”
검은 바람은 평소의 담백한 성격답지 않게 길게 말했다. 그만큼 카일에 대한 검은 바람의 충성심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카일은 이런 검은 바람에게 좀 더 실질적인 상을 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을 굳혔다.
“모두 들어라.”
카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모두를 향해서 말했다.
“이 순간을 기해서 검은 바람은 내가 만드는 클랜의 부클랜장이 된다.”
“주… 주인님?!”
검은 바람은 크게 당황했지만 카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세한 권한은 차후에 정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클랜 안에서 나 다음 가는 위치에 있는 이인자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에 걸맞은 존중을 보이도록 해라. 알겠나?”
“예.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인님.”
부하들은 재깍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검은 바람은 파티에서 이인자격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비록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고 발레리아와의 미묘한 기 싸움은 있었지만 검은 바람이 이인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렇게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사실 발레리아 본인도 별 불만은 없는 표정이었다.
“주인님. 이렇게 즉흥적으로 정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술에서 깨신 후에 다시 생각해 보시죠.”
“술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거야.”
카일은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어차피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체계는 잡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파티에서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네가 NO.2를 맡는 건 당연해.”
카일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검은 바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럼 삼가 주인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그렇게 카일은 검은 바람에게 부클랜장을 맡기기로 했다.
‘새롭게 늘어나는 인원에 관해서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일단 부하들은 물론이고 시설을 관리할 수 있는 일꾼도 골라야 하고, 그리고 빨리 슬롯이 늘어나야 다음 능력자도 만드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카일이었다. 그런 카일에게 아리시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주인님. 오늘은 저를 귀여워해 주시기로 하신 것 기억하시죠?”
“아… 아아아. 맞아, 그랬지?”
“일주일간 제가 주인님을 독점해도 되죠? 그렇죠?”
“그래. 그런 약속을 했지. 알았어.”
카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리시아에게는 이 약속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검은 바람이 NO.2가 되든, 부클랜장이 되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리시아에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카일을 일주일 동안 독점한다는 사실이었다.
“후후후후. 주인님. 고마워요.”
* * *
다음 날.
카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생각보다 많이 마시지 않았다. 머리는 좀 덜 아프네.’
그렇게 일어나는 카일의 곁에는 아리시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어제는 꽤 격렬했지.’
약속대로 어젯밤 아리시아는 카일에게 가장 먼저 안겼다. 그리고 안기면서도 그녀는 몹시 기뻐했다.
“주인님. 일주일간… 앞으로 일주일간 저만 귀여워 해주시는 거죠? 제가 주인님을 독점하는 거죠? 그렇죠?”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하듯이 말했고 카일은 그때마다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 카일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아리시아는 환희에 차서 기쁨에 떨며 카일을 갈구했다.
덕분에 늦은 밤에 시작한 행위가 날이 바뀔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후우우… 굉장했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카일은 아리시아의 하얀 피부를 이불로 덮어 가려주며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좀 졸렸지만 힘을 너무 많이 써서일까.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가니 거기서는 마침 레이나가 있었다.
“어머. 주인님 오셨어요?”
“응. 뭐해?”
“아침으로 스튜가 좀 남아서 빵하고 같이 먹으려고요. 저기… 같이 드시겠어요?”
“그래. 좋지.”
카일은 별 생각 없이 레이나의 앞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 * *
“주인님… 주인님?”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닿지 않는 허전한 감각에 아리시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카일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급하게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1층에서 카일의 목소리가 들리자 빠르게 내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본 것은 레이나와 카일이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광경이었다.
“더 드실래요? 주인님.”
“응. 부탁할게.”
그 순간 아리시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지? 왜지? 왜 저러는 거지? 지금 주인님은 일주일간 내가 독점하라고 했는데? 왜 레이나 씨가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지? 도대체 왜?’
아리시아는 홀린 것처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레이나의 뒤편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덥석.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기사 발레리아였다.
“발레…….”
“쉿.”
발레리아는 아리시아를 조용하게 하게 하고 슬쩍 이끌었다.
발레리아는 아리시아와 단 둘이 방에 앉았다.
방에 들어오자, 발레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차라도 마실래? 커피 있는데.”
“…됐어요. 그보다, 왜 부른 거예요?”
아리시아는 평소의 나긋나긋한 성격과 달리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발레리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네가 레이나의 목이라도 조를 것 같았는걸?”
“…….”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아리시아였다.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아리시아의 앞에 앉았다
“아리시아. 하나만 물어볼게.”
“…….”
“주인님을 어떻게 생각해?”
“제 전부예요. 주인님이 죽으라면 죽겠어요. 이유도 필요 없어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그런 충성심은 나도 있어. 검은 바람도 있고, 아마 레이나도 가능하겠지.”
“…….”
“하지만 네 마음은 그 정도가 아니지?”
“…….”
“주인님을 사랑하니?”
발레리아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 말에 아리시아는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고민 끝에 그녀는 결국 자기감정을 인정했다.
“…예.”
발레리아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짐작은 했지만…….’
카일에 대한 아리시아의 감정은 이미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카일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발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큰 은혜를 입었고 그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검은 바람이나 레이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구원받은 카일에게 은혜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리시아가 카일에게 느끼는 감정은 다른 것 같았다. 발레리아는 그런 낌새를 전부터 느껴 왔고, 그런 아리시아의 감정은 점점 밖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문제는 발레리아가 보기에 아리시아의 감정이 점점 집착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신이 카일과 함께 있을 때 종종 뒤통수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돌아보면 거기에는 항상 아리시아가 있었던 게 그 시작이었다.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고는 있지?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노예라는 게 결말이 좋게 끝나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상관없어요.”
“아니야. 상관있어.”
“어째서요? 발레리아 씨하고는 상관없잖아요? 비켜요. 지금 여기서 당신한테 이런 말 들을 이유가 없어요.”
아리시아는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아리시아를 잡았고 아리시아는 순간 시간 가속 능력을 이용해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좀 더 능숙하게 움직여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비틀고 구속했다.
“으읏…….”
“움직이지 마. 움직이며 다쳐.”
발레리아는 능숙하게 아리시아를 제압해서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아리시아는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리시아가 많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발레리아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다.
발레리아는 아리시아를 강하게 구속한 채로 말했다.
“아리시아, 진정해.”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널 탓 하려는 게 아니야. 널 돕고 싶은 거야.”
“놔! 놓으라고 했…….”
“계속 이러면 주인님이 널 싫어하실 거야.”
“…….”
그 순간 날뛰던 아리시아의 몸이 멈칫하며 굳어버렸다.
“내 얘기를 들어 줄래?”
발레리아는 동생을 달래는 언니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는 볼게요.”
그렇게 둘은 다시 자리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인님에게 네 감정이 어떻든 그걸 뭐라고 하지는 않을게. 사실 생각 같아서는 말리고 싶지만 내가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
“그보다, 말해 주세요. 주인님이 저를 싫어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인님은 파티의 단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 이제는 클랜이 되었으니 더 중요하게 생각하실 거야. 검은 바람을 부클랜장으로 올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제 본격적으로 태세를 정비하려고 하시는 거야. 뭐, 한마디로 말해서 중요한 시기라는 거지.”
“그건 나도 알아요.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그렇게 중요한 시기에 네가 질투심 때문에 클랜에 균열을 가져온다면 과연 주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
그 순간 아리시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발레리아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아리시아에게 발레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네가 주인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주인님이 네 마음을 꼭 헤아려 줘야 하는 건 아니지.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발레리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노예야. 만약 주인님이 노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세상에서 어떤 평판을 들을까?”
“그, 그건…….”
아리시아도 알고 있었다.
노예를 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서 비정상적이고 기분 나쁜 인간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은 말이다.
사회 부적응자.
딱. 그 말이 맞을 것이다.